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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3월 29일 (사순5주일) 강론초 (요한 12:20-33 밀알 하나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3. 23.


2009년 3월 29일 사순 5주일 성서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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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 31:31-34

31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나 야훼가 분명히 일러둔다. 32 이 새 계약은 그 백성의 조상들의 손을 잡아 이집트에서 데려내오던 때에 맺은 것과는 같지 않다. 나는 그들을 내 것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나와 맺은 계약을 깨뜨리고 말았다. 귀담아들어라. 33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34 내가 그들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리니, 다시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주며 야훼의 심정을 알아드리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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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1:1-12

1 하느님, 선한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어지신 분이여, 내 죄를 |없애|주소|서.

2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 잘못을 깨끗이 |없애|주소|서.
3 내 죄 내가 알고 |있으|며 ∥ 내 잘못 항상 눈 앞에 아른|거립|니-|다.
4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만 죄를 |지은|몸, ∥ 당신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한 |이 몸|입니|다.
○ 벌을 내리신들 할 말이 있으|리이|까? ∥ 당신께서 내리신 선고, 천번 만번 |옳습|니-|다.
5 이 몸은 죄 중에 태|어났|고, ∥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습니|다.
6 당신은 마음 속의 진실을 기뻐|하시|니 ∥ 지혜의 심오함을 나에게 |가르|치소|서.
7 정화수를 나에게 뿌리소서, 이 몸이 깨끗해지|리이|다. ∥ 나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더 희게 |되리|이-|다.
8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려|주소|서. ∥ 꺾여진 내 뼈들이 춤을 |추리|이-|다.
9 당신의 눈을 나의 죄에서 돌|리시|고 ∥ 내 모든 허물을 |없애|주소|서.
10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시|고 ∥ 꿋꿋한 뜻을 새로 |세워|주소|서.
11 당신 앞에서 나를 쫓아 내지 |마시|고 ∥ 당신의 거룩한 뜻을 거두지 |마옵|소-|서.
12 그 구원의 기쁨을 나에게 도로 |주시|고 ∥ 변치 않는 마음, 내 안에 |굳혀|주소|서.
○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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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 5:5-10

5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는,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6 또 성서의 다른 곳을 보면, "너는 멜기세덱의 사제 직분을 잇는 영원한 사제이다."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7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8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10 하느님께로부터 멜기세덱의 사제 직분을 잇는 대사제로 임명받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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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2:20-33


20 명절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왔던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 사람도 몇이 있었다.

21 그들은 갈릴래아 지방 베싸이다에서 온 필립보에게 가서 "선생님, 예수를 뵙게 하여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22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이 말을 하고 두 사람이 함께 예수께 가서 그 말을 전하였다. 23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24 정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27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그 때에 하늘에서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29 거기에 서서 그 소리를 들은 군중 가운데는 천둥이 울렸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천사가 예수께 말하였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30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 들려온 음성이다. 31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 32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33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이 어떻게 돌아가시리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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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구원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목숨을 바쳐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나이다. 비옵나니, 연약한 우리를 성령으로 도우시어, 하느님 나라를 위한 씨앗으로 살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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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요한 12:20-33)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일이 예수님의 전지전능함을 믿는 일일까요?  하느님 버금가도록 전지전능하시긴 하지만 아직 우리 형편을 모르시어 우리를 도우실 계획이 없으신 예수님께 우리의 처지를 알려드리고 간청을 드리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봉헌하고 규율을 지키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천국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물려받으셨으므로 죽은 후에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왜 맨날 은혜롭지 못하게 이상한 물음을 만들어서 혼란스럽게 할까 서운하신 분은 혹시 안계신가요? 실은 저도 이런 어색한 물음을 지어내기가 민망스럽답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아 더욱 참되게 하기 위함이니 너그러이 이해하시고 저와 함께 천천히 답을 점검해보시지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일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신성은 전지전능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겸허와 사랑과 순종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요한복음의 표현을 빌면 하느님의 영광은 전지전능하신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사랑의 빛에 의해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권력"과는 다른 차원의 "사랑"의 전지전능함입니다. 세상권력의 전지전능함은 모든 문제를 계산적으로 파악하고 냉정하게 해결합니다. 목적달성을 위해 가장 힘없는 이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지요. 이에 비해 사랑의 전지전능함은 모든 문제를 나의 문제로 이해하고  자발적인 나의 희생을 통해 감당합니다.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이 바로 그 사랑의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 사랑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의 문제를 당신의 문제로 삼아주시고 외아들이신 예수님의 희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로 우리의 어떤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우리는 기쁨의 찬양과 함께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 사랑의 삶을 살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사랑을 누리고 행실로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 누군가의 사랑으로 우리는 삽니다. 그것이 생명의 원리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과 방법이 이 말씀으로 정리가 됩니다.

그런데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예수님의 이 솔직한 고백은 사랑의 전지전능함으로 힘을 얻습니다.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히브리서는  이 대목을 두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주님을 본받아 우리가 겪는 고난을 통해서 복종하는 것을 배워 완전하게 되는 일이 참된 목적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보여주듯 하느님께 복종하는 일은 얼핏 버림받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리 없습니다. 고난을 겪으며 드리는 우리의 그 복종에 하느님께서 생명의 능력으로, 사랑의 전지전능하심으로 함께 하심을 신뢰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밀알에게서 배우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십자가를 통해 배우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그런 믿음인 것입니다. (2009.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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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요한 12:20-33)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제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분명하신 스승 예수께서 그토록 무력하고 무참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다니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야 비로소 그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 깨우침이 오늘 복음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 사람들의 방문을 들으시고 구약말씀을 인용하는 대신에 밀알 하나의 비유를 들어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의 죽음은 땅에 떨어진 밀알의 죽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개체로서는 언뜻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생명은 죽지 않고 도리어 더욱 많은 열매 가운데 풍성히 살아있게 됩니다. 별 볼일 없이 끝장난 것처럼 보인 예수님의 죽음이지만, 마침내 그 분의 죽음은 가장 위대한 죽음, 곧 죽음을 이기고 많은 이들을 생명으로 이끄는 죽음의 원형이 됩니다. 십자가 죽음으로도 그 분의 존재는 소멸하지 않고 말씀과 성사 가운데 더욱 풍성히 제자들의 마음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역설, 곧 죽음을 통해 많은 열매를 얻게 되는 이치를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부활은 십자가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본질은 단지 사망확인이 끝난 시신이 다시 소생했다는 전대미문의 기적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검시관이나 법의학자가 판정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분의 일생을 추종해온 제자들, 그 분의 가르침과 하신 일을 듣고 보고 따라온 제자들이 참으로 무참한 십자가 죽음의 충격을 넘어서 여전히 살아계신 예수님과 만나고 소통한 체험입니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 온전히 구현된 사랑과 진리, 하느님과 늘 완전한 일치되어 사셨던 그 분의 “생명”은 죽음으로 방해하거나 훼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조작도 환상도 아니고 제자들의 실존을 사로잡은 분명한 현실의 체험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영광”이 곧 부활의 본질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 비참한 패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를 향한 영원한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승리를 체험하며, 그 사랑에 응답하여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기를 원하는 이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시며 이천년 넘게 교회 공동체를 이어왔습니다.

우리 모두 안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습니다. 전도는 입으로 설명하는 홍보가 아닙니다. 우리 안의 그 생명이 세상을 향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고 우리의 겉껍질을 깨고 믿음을 삶으로 보이는 것입니다.(2006.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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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알 하나에 새겨진 믿음 - 생명의 원리

연일 참담한 폭격을 당하는 이라크 인들은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승리를 주셔야 한다고 부르짖는다지요. 그런데 미국의 부시 대통령을 비롯하여 백악관 사람들도 요즘 참으로 열심히 하느님께 승리를 기원한다고 합니다. 슬프고 씁쓸한 일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은 정녕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마음 편히 무슨 일이든 맘대로 해도 좋다는 것이 믿음입니까?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내 편에 되어 주셔서 내 모든 욕구와 소원을 다 채워주시고 들어주신다고 주장하는 것이 믿음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잘 믿으면 죄의식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고, 현세에서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죽은 후에는 천당에 가서 영원히 화려한 삶을 이어간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까?

그런 믿음들에 나름의 진실이 없지 않지만 우리들의 믿음이 밀알 하나만도 못한 믿음이라면 슬픈 일입니다.
밀알에게는 한 알 그대로 남아서 영원하기를 바라는 어리석음이 없습니다. 밀알은 땅 속에 떨어져 자신의 모습을 잃는 것이 결코 손해, 실패, 헛된 희생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기꺼이 자기를 내어 맡기는 것이야말로 참된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땅에 떨어진 밀알 하나의 죽음을 통해서 많은 열매를 얻게 됩니다. 그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얻는 길이며 그 열매는 대를 이어가고 다른 생명의 먹이가 되어줍니다. 그것이 사랑의 원리이고 생명의 원리이고 우주의 원리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덧없는 실패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승리임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진리는 우리의 욕심을 채워주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참된 생명의 길을 보여주기 때문에 소중합니다.

밀알 하나에 생명의 원리가 새겨져 있는 것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우리들의 영혼에는 성령께서 새겨주신 하느님의 사랑의 법, 진리의 법이 뚜렷하다는 것이 우리들의 자랑입니다. (2003.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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