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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3월 22일 (사순4주일) 강론초 (요한 3:14-21 니고데모와의 대화)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3. 17.

2009년 3월 22일 사순 4주일 성서말씀

민수 21:4-9

4 그들은 에돔 지방을 피해 가려고 호르 산을 떠나 홍해 쪽으로 돌아갔다. 길을 가는 동안 백성들은 참지 못하고 5 하느님과 모세에게 대들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죽일 작정입니까?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습니다. 이 거친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6 그러자 야훼께서는 백성에게 불뱀을 보내셨다. 불뱀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이자, 7 백성들은 마침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야훼와 당신께 대든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뱀이 물러가게 야훼께 기도해 주십시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자, 8 야훼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
9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았다. 뱀에게 물렸어도 그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다.


시편 107:1-3, 17-22

1 주님께 감사노래 불러라. 그는 어|지시|다. ∥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2 주께서 구해 주신 자들아, 모두 노래|하여|라. ∥ 원수의 손에서 |구해|주시|고
3 동서남북 사|방에|서 ∥ 불러 |모아|주셨|다.
17 미련한 탓으로 하느님께 거역|하다|가 ∥ 그 죄악 때문에 비참|하게|된 자|들,
18 입맛이 없어 음식마저 |지겨|워 ∥ 저승의 문턱에 다|다랐|던 자|들,
19 그러나 그들이 그 고통 중에서 울|부짖|자 ∥ 주께서 사경에서 |건져|주셨|다.
20 말씀 한 마디로 그들을 고|치시|고 ∥ 죽음에서 구|출해|내셨|다.
21 그 사랑, 주님께 감사|하여|라. ∥ 인생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들, 모두 |찬양|하여|라.
22 그 이루신 일들을 노래로 |엮-|어 ∥ 기쁜 노래 부르며 감사 |예물|바쳐|라.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에페 2:1-10

1 여러분도 전에는 죄와 잘못을 저질러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여러분이 죄에 얽매여 있던 때에는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고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의 두목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으며 오늘날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조종하는 악령의 지시대로 살았습니다. 3 실상 우리도 다 그들과 같아서 전에는 본능적인 욕망을 따라서 육정에 끌려 살았던 사람들로서 본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4 그러나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5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듯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6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자리에 앉게 하여주셨습니다. 7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 보여주시려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이렇게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8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9 이렇게 구원은 사람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10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대로 선한 생활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신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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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3:14-21

14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17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8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20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21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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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사랑의 하느님, 우리는 주님 안에서만 참 평화를 누릴 수 있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주님의 지극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따라 삶으로써 어둠의 행실을 벗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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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삶이 곧 영원한 생명
(요한 3:14-21)

사람들은 대개 자기의 인간적 경험을 반영하여 하느님께 대해 이렇게 저렇게 미루어 짐작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생각과 다른 경험을 하게 되면 “그래, 역시 하느님이 있다는 것은 말이 안돼” 합니다. 참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걸 지혜라고 주장하니 세상은 하느님을 알기 어렵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공동체를 통해서, 그리고 성경말씀과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살아계심을 경험하고 확인합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3:1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은총을 누린 이들이 고백한 간결 명쾌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치거나 행하기를 요구하시고 우리가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벌을 내리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로잡아야 할 오해입니다.

이런 이해에 머물러 있으면 자기 욕망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꾸 하느님과 거래를 하려고 듭니다. 자기욕심을 채우려는 열망을 가지고 좋은 믿음인 양 착각합니다. 그건 우상숭배이지 주님이 가르치신 믿음이 아닙니다.
냉정히 말하자면 하느님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송두리째 원하십니다. 우리가 판단해서 이것은 내 것으로 남기고 저것은 하느님께 드리자는 식의 헌물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자비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하느님이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온전히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하느님으로 인해 의미를 가지며 마침내 하느님께 돌아가리라는 것! 이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지적인 인식보다 훨씬 깊은 깨우침이요 신뢰이며 헌신으로서 우리 삶의 기본적인 태도와 자세를 이루게 됩니다.

머리 속에 교리적인 신념을 가지는 걸 믿음이라 생각하고 그런 믿음을 하느님께 인정받으면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외적인 자격을 부여받는다는 식의 구원이해는 초보적인 설명입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신다”고 할 때의 믿음은 어떤 신조에 대한 동의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유한한 삶이 영원한 생명으로 되는 일이 하느님의 뜻임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향해 나가는 우리의 삶, 우리의 태도와 자세, 마음가짐이 모두 믿음의 내용이 되고, 예수님의 빛을 따라 사는 우리의 믿음이 또한 영원한 생명의 내용을 이루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 없다를 시비하고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애초에 “믿음”으로 살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지음 받은 하느님의 걸작(傑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삶” 자체입니다. 우리를 단죄하는 것은 하느님의 이끄심을 거부하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걷는 우리의 "믿음 없음" 자체입니다.(2009.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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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는 사람이 얻게 되는 영원한 생명 (요한 3:14-21)
 

오늘 복음의 핵심은 신약성서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고 일컬어지는 너무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3:16)
어린 시절부터 암송하던 구절이지만, 그 의미는 참으로 깊고 깊습니다.
그런데 정말 나는 이 구절을 분명하고 틀림없이 이해하고 있을까요? 아니, 정말 내 영혼을 울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확신하게 하는 귀한 말씀으로 여기고 있을까요?

‘하느님’은 한 분 하느님, 그 분이십니다.

‘이 세상’은 그 분이 창조하신 이 세상입니다.

‘극진히 사랑하셨다’는 말씀은 잠시 잠깐 변덕스런 관심이 아니라 하느님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을 향한 절대적 사랑’이시라는 뜻입니다.

‘외아들’이란 형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신비적 표현으로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신 분, 철학적 표현으로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를 믿는 사람’이란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하고 시인하고 고백하며 삶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뒤따르는 사람을 뜻합니다.
말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도 속셈으로는 주님의 전지전능함에만 관심을 두고, “어떻게 하면 주님 마음을 움직여 내 소원을 성취할까” 하고 머리를 굴리는 것은 결코 복음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나의 주관적인 확신, 곧 신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행업을 쌓으려는 노력을 대신해서 내세우는 또 다른 자격조건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어 오신 그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삶 전체를 온전히 맡겨드리는 자세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예수님의 뜻을 따라, 그 분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살아가는 삶 자체입니다. 즉 하느님을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사랑의 아버지 하느님으로 모시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합일되며, 성령에 감동되고 이끌리는 영적인 존재로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든지’라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을 아무런 차별없이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멸망’이란 하느님의 그 절대적인 사랑을 이기적인 자기중심의 어리석음과 고집으로 거절한 인간이 스스로 눈멀어 어둠에 갇히고, 부자유의 사슬에 얽매이며, 미움과 탐욕에 사로잡히고, 다가오는 죽음 앞에 소멸이나 지옥불을 두려워하게 되는 비참함을 뜻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그저 안죽고 오래오래 끝없이 산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의 질이 ‘신적인 생명’이 됨을 뜻합니다. 곧 하느님과 완전한 소통, 일치, 합일을 이루어 거룩한 친교를 누리게 됨입니다.
구원은 밖으로 ‘얻게 되는’ 천국행 티켓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의 영적인 삶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했음 바로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찬양받으소서!(2006.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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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살며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

세상은 암울하고, 우리네 삶은 피 흘리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우리가 바로 이런 세상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기 때문에 오히려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17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은 인간들이 내세우고 추켜세우는 따위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정하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은 인간들의 상상과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임을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광야의 구리뱀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어올려져야 한다는 말씀은 바로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처참히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영광은 화려한 인간적 성공을 통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인간들의 욕망과 어리석음과 증오가 엉겨 붙은 곳, 패배와 배신과 모욕과 수치와 고통과 죽임의 형틀, 십자가 위에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로 인해 아파하시며, 인간의 고통을 깊이 아시며 몸소 감당하시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은 인간들이 지어내는 어둠과 죽음의 세상을 넘어서, 십자가위에 높이 올려진 예수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오늘도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 십자가에는 우리의 죄악, 고통과 하느님의 사랑, 용서가 교차합니다.
이 참혹한 세상, 이 더럽고 비열한 우리들을 하느님이 그토록 지극히 사랑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전쟁의 포화와 울부짖음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회개의 기도를 바칩니다.

이라크의 비참한 전장은 오늘 모든 인류를 향해 높이 들려진 또 하나의 십자가는 아닐까요? 우리는 거기 나타난 인간의 악함과 하느님의 선하심을 분명히 보고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2003.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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