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김은경 가브리엘라 (분당교회 신자사역자)
워낙 교인 수가 적은 교회이다 보니 낯선 이가 방문하면 금방 눈에 띈다. 17년 전 쯤, 그 주일도 처음 보는 남자 3,4명이 미사를 드리고는 곧 사라졌던 것 같다. 가끔씩 교회를 순방하듯 기웃기웃 하다가 우리 교회에 정착하기도 하지만, 한두 번 얼굴내밀다가 떠나버리는 이들도 있어서 우리 교회에서는 새 신자를 만들기 위해 호들갑스럽게 환영하는 언행은 조심스러워한다. 본인 스스로 결정하고 자리잡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편이다.
그 남자들도 한두 번 보이다가 안보이다가 하더니 어느 날부터는 키 작은 남자만 외롭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척추장애인이었다. 그런 남자를 보호하듯 둘러쌌던 남자들은 더 이상 안 보였다. 미사 끝 무렵 신부님께서 소개하셨다. 서울서 이 근처로 이사를 와 우리 교회에 나오게 된 지금식이라고, 그동안 옆에 계셨던 분은 서울서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으로 어릴 적 보호자셨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러니까 가족이 없는.... 모두들 속으로는 ‘고아? 시설에서?’ 라는 생각을 했었으리라. 나 역시 ‘몸도 성치 않은데 버려졌단 말이야?’라고 한숨을 지었으니까.
성남 이 곳의 임대아파트에 입주를 하게 되어 가까운 교회에서 예배드리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몇몇 교회를 알아보러 다니던 중 우리 성공회 교회로 나오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동안 신부님과의 면담과 얘기가 있었을테고, 이 친구가 잘 적응할 수 있는 교회를 목사님과 지인들이 함께 찾았다는 것이다. 우리같이 규모나 시설이 소박하다 못해 궁색하게 보이기도 하는 순수한 곳이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나이가 비슷한 젊은 아빠들이 지금식 형제를 챙겼다. 그이도 빠지지 않고 미사를 드리며 배워나갔다. 같은 기독교이지만 예배 방식이 다른 성공회는 천주교의 미사와 거의 같은 전례, 감사성찬례로 예배(미사)를 드리기 때문에 타 교파 신자들은 영접식을 통해 세례명을 받는다. 지금식 형제는 안드레아를 세례명으로 지었다. 안드레아는 잘 어울렸다. 교회가 아무리 초라하다고 해도 지역적인 분위기와 수준은 국민 평균을 넘어선 중상류층인데, 안드레아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며 당당했고, 조금도 꿀리거나 주눅들거나 하는 일 없었다. 오히려 퉁명스레 답하는 듯한 말투로 알아서들 하시라는 말을 자주 던졌다. 가족도 없이 지내다 보니 독립심이 강해서일까, 그저 식구들에게 허락이나 구하듯 물어보고 말이 많은 엄마들한테 잔소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온지 얼마 안 되어 내가 아팠을 때, 그리고 힘들어 할 때도 비스듬히 나를 쳐다보며 마주친 눈으로 위로의 말도 넌지시 보냈으니 속마음은 따뜻했었다..
젊은 아빠들은 그를 야구장에도 데리고 가고, 치맥도 나누며, 발야구도 하고 심심찮게 놀며 챙겼다. 교회의 큰 절기 때는 미사 전날 어머니들이 미리 음식 준비를 하는데, 안드레아는 어머니들과 함께 즐거워하며 일했다. 그이는 특히 막걸리를 좋아했다. 비오는 날이면 근처에 사는 부부가 그를 초대해 막걸리와 안주를 즐겼다. 교회에 나가는 부모를 마땅찮게 여기던 그의 아들도 안드레아가 집에 오는 걸 환영하고 술을 나누고 어울렸다고 했다.
처음 그를 맞이한 신부님이 가시고 새로운 신부님이 오셨다. 그 신부님은 대학교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셨었고, 우리교회에서도 ‘기독교와 윤리’, ‘기독교와 역사’ 같은 강의를 분기별로 하셨는데 안드레아가 은근히 관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어느날, 신부님이 “안드레아가 드디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 읽었대요.” 하셨다. 그때 어머니들이 깜짝 놀라서 설마, 우리도 읽다가 말았는데..... 그러나 그 후로도 계속해서 <죄와 벌>, <레 미제라블> 같은 소설을 다 읽었다고 했다. 신부님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보통 성인보다도 한참 작지만 나 보다도 작은 그를 보면 미안해진다. 등마저 굽어 더욱 초라해 보인다. 문제는 굽은 등 때문에 척추가 눌리고 폐가 압박되어 숨이 차다는 것이다. 천식이 그를 괴롭혔다.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니며 검사도 받고 약먹고 조절하고 있지만 혹시라도 모를 위급 상황에 대비해서 가족이 없는 그의 집에는 경찰과 연락이 닿는 비상벨이 설치되어 있었다.
10년을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던 그이가 쓰러졌다. 숨이 차서 비상벨을 누르자 구급차가 그를 응급실로 옮겼다고 했다. 모두 병원으로 달려갔다. 입원시키고 번갈아 가며 그를 간병했다. 삼계탕, 갈비탕 등을 끓이며 날랐다. 다행히 완쾌되어 조심스레 일상을 회복했다. 그러기를 2번 더. 점점 나빠지는건가, 갑자기 호흡곤란이 오면 어떻게 하나.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날도 좋은 5월, 나는 군복무 중이던 아들 면회를 가기 위해 진해에 가 있었다. 하루 만에 오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 며칠 쉬고 오려고 여관까지 잡아놓았는데 안드레아가 또 쓰러졌다고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의식이 없다고, 비상벨을 눌렀으나 구급대원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위태로운 상태였다고 했다. 위독하다고. 아,.. 정말, 영화가 따로 없었다. 아들 얼굴만 잠깐보고 허겁지겁 올라왔다.
안드레아는 중환자실에서 온갖 약과 의료기 줄에 온 몸이 칭칭 감겨 있었다. 하루에 두 번, 10분 밖에 허락되지 않는 면회 시간에 안드레아의 귀에 간절한 응원의 기도를 실어 보냈다. 밖에서는 시간을 짜서 비상대기를 하며 기다렸다. 병원에서는 보호자가 누구냐? 무슨 관계냐? 법적 책임이 있느냐? 누가 최종 사인을 할거냐? 그리고 치료비는 감당할 수 있느냐? 이런 사무적이고 행정적인 얘기로 시비를 걸 듯 덤벼들었다. 맘 여린 신부님과 젊은 아빠들의 얼굴이 벌겋게 흥분되었다. 어머니들은 어찌나 가슴이 뛰었던지. 이런 상황에서 의사는 저렇게 모질게 얘기를 해야 하는건가. 눈곱만큼도 이해와 도움을 구할 생각은 없었지만, 싹수없이 말을 내뱉는 의사가 저주스러웠다. 마치 이런 얘기를 다 들었는지 안드레아는 결국 깨어나질 않았다. 중환자실에서 1주일도 채 버티지 않고 떠나버렸다. 의식이 돌아와도 몸이 마비되는 상태라면 차라리 깨어나지 않겠다고, 고민하지 마세요, 이대로 가겠습니다라고 한 것만 같았다.
장례는 눈물바다였지만 따뜻했다. 우리 교회가 喪主를 맡았다. 냉담 중이던 교우, 해외에 나가 있던 교우들까지도 들어 왔으며, 영국에서 유학 중이시던 그 목사님도 급히 귀국하셨다. 특히 우리 교회가 알지 못하던 중학교 시절, 야학 선생하셨던 분들이 다 오셨다. 야학 하시던 선생 중엔 지금은 교수, 박사, 약사 등 전문가들이 많았고 한결같이 가족들도 안드레아를 다 아는 듯 부인, 남편, 자녀들과 함께 문상을 온 것이었다. 안드레아가 부모 복은 없지만 다른 人福은 많은 것 같았다.
속초 바다에 재를 뿌려주기로 합의를 했다. 그곳에 사는 약사와 자주 바다 낚시하러 다녔다는 것이었다. 속초에 들어서니 그 분이 피로회복제를 몇 박스를 나누어 주시고는 어두워진 후에 동명항 영금정에서 뿌리면 될 것 같다고 하셨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꺼려하거나 불쾌해할까 봐 아무도 없을 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맛집으로 안내를 하셨다. 눈물도 꽤 흘렸고, 기운도 없었다. 초상이 나도 눈물은 떨어지고, 밥숟갈은 올라간다는 말처럼 해물뚝배기를 보니 눈물과 입맛이 동시에 작용을 했다. 안드레아가 우리를 위해 베푸는 마지막 만찬이라고 눈물, 콧물 흘려가며 해치웠다.
점점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날은 동해바다처럼 시퍼렇게 검푸른 빛으로 어두워졌다. 영금정에 둥그렇게 모여 아직 온기가 남은 안드레아의 뼈가루를 한 움큼씩 쥐고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하늘나라에서는 부디 좋은 부모 만나세요.... 미안해요...
씩씩하던 젊은 아빠들도 그만 난간을 붙잡고는 온몸을 들썩였다. 며칠 동안 장례일정을 담담하게 진행하셨던 신부님도 억누르던 감정을 어찌할 수 없어 소리도 못 내시고 주저앉으셨다.
신부님이 또 새로 오셨지만 1년 후에 다시 영금정에 가서 별세기념미사를 올렸다. 그가 살던 집은 시청에서 처리했고 장례까지 치르고 남은 그의 유산은 몇백만 원. 의논 끝에 교회 오르간을 마련하기로 했다.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을 넘어서는 웅장한 오르간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하에서 겨우 벗어나 5-60명 정도의 교인들이 모이는 작은 공간, 그러한 곳에서 소박하게 예배드릴 수 있는 오르간이면 충분하니까.
장애인으로 태어났지만, 그가 우리한테 베푼 게 더 많았다. 오히려 비장애인들을 더 배려했다. 젊은 아빠들 역시 그날을 기리고, 추석, 설, 위령의 날에도 꼭 안드레아를 잊지 않고 챙기고 있다. 올 추석 때도 그의 추모 이름이 불리워졌고, 안드레아의 오르간 소리에 맞춰 성가를 불렀다. 앞으로도 그를 기억하는 후세대들이 그가 남긴 오르간 소리를 들을 것이다. 미사 때마다 들리는 오르간 소리에 안드레아의 얘기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그가 우리에게 무심하게 던진 말...
알아서들 하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202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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