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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

by 분당교회 2021. 8. 23.

방역지침 4단계가 다시 두 주 더 연장되어 계속 비대면으로 예배드립니다.  교우 여러분 모두 잘 지내시지요? 오늘로 비대면 영상예배가 7주째가 되니 봰 지 오래네요. 너무 보고 싶습니다. 

 

보내 드린 주보 3면에, 온라인 예배를 경건하게 드리는 방법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읽어 드리겠습니다. 

1. 복장을 단정하게 하시고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 공간과 환경을 만들어 주세요. - 십자가 초 등 세팅 

2. 보내드린 주보를 보시고 미리 성경과 성가를 찾아 읽어보시고 기도서를 준비해 주세요. 

3. 예배 중에 핸드폰 사용이나 다른 행동은 삼가 해 주세요. 

4. 봉헌은 온라인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5. 예배 후에는 교회 단체 카톡방이나 유트브 채팅방에 인사를 남겨 주시고, 또래모임별 단톡방을 이용해 예배 후 소감을 나눠 주세요. 

* 서로 다른 장소에서 예배드리지만, 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성공회분당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성체를 영하기 원하시는 교우는 사제에게 연락주세요. 성당이나 가정에서 간단한 예식으로 영성체하실 수 있습니다.

 

이번 주간에 가을장마가 계속 된다는데, 건강에 유의하시고 방역지침 잘 지키시며 어려운 시기를 이겨나가시기 바랍니다. “이 또한 다 지나갑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오병이어 기적에 이어지는 이야기의 결론부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본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습니다. 이 낌새를 알아차리신 예수님은 혼자서 산으로 피해 가셨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가파르나눔으로 출발했습니다. 

 

가는 길에 풍랑을 만나 고생 했는데,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거센 물결을 걸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목적지인 가파르나눔에 도착했습니다. 이튿날이 되었는데,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이 배를 타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 시작되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정독하시면서 깊이 묵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은 예수님이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입니다. 

  35절,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48절, 나는 생명의 빵이다. 

  51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 이다”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표현입니다.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라고 하는데,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느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하신 말씀, “나는 나다”의 헬라어 번역입니다. 

 

‘에고 에이미’의 선언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하느님의 이름을 가진 자, 하느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자, 하느님의 계시자’임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이다’고 하신 ‘에고 에이미’의 표현이 일곱 번 나옵니다. 

6: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다.” 

10:7,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10:11-14, “나는 착한 목자이다”. 

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5:1,  “나는 참 포도나무다”.

 

오늘 살펴보는 ‘생명의 빵’에서 “빵”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르쿠스’라고 하는데, ‘주식’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밥’입니다. “나는 생명의 밥이다!”이라는 말씀입니다. 

 

51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는 밥’이고 ‘살게 하는 밥’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들은 유다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 박해를 받았던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식인주의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에는 절대로 피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근거립니다. 52절, 유다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서로 따졌다. 

 

이렇게 수군거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히브리 관용어에서 “살과 피”는 사람 전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56절에서는 ‘내 안에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고 말씀하셨고, 54절에선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54절의 ‘영원한 생명’은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자주 사용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문자적으로는 ‘오는 세상의 삶’이라는 히브리적 표현을 헬라적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속과 정욕과 마귀에 끌려 살며 죄를 짓고 죽음을 그 대가로 지불하는 이 세상의 삶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의와 생명으로 통치하는 오는 세대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오는 세상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통치하시는 하느님 나라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영원한 생명이란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누리고 경험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이 삶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다른 말로 표현 하면 하느님의 자녀라는 특권을 누리는 삶,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신자의 모습을 사도 바울로는 갈라디아 3장 28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아프카니스탄을 탈환한 탈레반이 여성을 멸시하고 박해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어떻게 저럴 수 있냐고 치를 떱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이 여성에게 가졌던 시각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예수 공동체는 남성과 여성이 아무런 차별이 없는 하느님의 한 가족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신적 생명을 지녔기에 배제하고 차별하는 세상 속에서 환대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신자의 삶을 사도행전 2장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42절,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고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서로 도와주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는 새로운 삶의 스타일이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44-45절입니다. “44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45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맘몬은 오늘날만이 아니라, 구약에 나오는 예언자 시대나, 예수님 당대에도 하느님과 견주는 강력한 우상이었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누리기 위해 빼앗고 독점하는 것은 타락한 인류가 보여주는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 자기의 것을 나누고 서로 공유했습니다. 교회 밖 가난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이러한 삶이 가능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하느님 나라를 전해주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들었고”, ”빵을 나누어 먹고“, 성찬례를 통해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회복했으며,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57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가 바로 이 뜻일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테파노는 돌에 맞아 순교하가면서 예수님의 본을 따라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에는 이, 칼에는 칼’, 복수가 정당화되는 세상 속에서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아내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와 하나 된 사람들이 보여주는 영원한 생명의 본질이니, 세상과 갈등하게 되고 박해를 받게 되며 또 세상의 유혹에 빠져 욕망대로 살고 싶을 때,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60절의 수군거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며 수군거렸다.”

 

이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 다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환호하고 달려오기까지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들은 물론이고 제자로 부름 받았던 사람들도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요한이 속한 공동체의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버림 받으신 예수,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예수님과 12제자만 덩그러니 남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2제자를 보고 “자 너희도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참 고마운 고백입니다.

 

12제자에게 던지신 예수님의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하느님은 오늘 1독서 여호수아를 통해서도 도전하십니다. 24:15 “만일 야훼를 섬기고 싶지 않거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여러분이 오늘 택하시오.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에서 여러분의 조상들이 섬기던 신을 택하든지, 여러분이 들어와서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인의 신을 택하든지 결정하시오.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야훼를 섬기겠소.” 

 

베드로처럼 대답하며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린 고백을 읽어 드리며 설교를 마칩니다. 요한 6:68-69, "68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69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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