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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무엇이 거룩이고 어떻게 그 삶을 살 수 있을까?

by 분당교회 2021. 8. 30.

코로나 확산은 계속되고 있고, 탈레반에 장악된 아프카니스탄에서 일어난 IS의 카불공항 자살테러, 이에 대한 미국의 응징 등의 소식으로 더 마음 아팠던 한 주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8월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네요.  

 

그래도 성큼 다가온 가을이 폭염과 코로나, 전지구적인 아픔에 지친 우리를 위로해 줍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누군가 옆에 계시면 서로가, 홀로 계시면 스스로에게 인사합시다. “이 또한 지나갑니다.” “주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의 노예에서 해방된 히브리인들은 50일이 지나 시나이 산에 도착하고 1년 정도 머무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겠다는 언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40년이 걸린 광야 여정 끝에 가나안땅 입성을 앞두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나이산에서 받은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겨 주었습니다. 오늘 1독서 신명기서가 바로 이 설교의 내용입니다. 

 

설교를 마친 모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땅을 정복합니다. 이후 다윗 왕 때에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지는 명실상부한 하느님 나라를 이루었지만, 아들 솔로몬의 타락으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지게 되고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나 우상 숭배와 불순종으로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수많은 예언자들이 나타나 하느님의 간절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요즘 읽은 성서통독 365의 범위가 예언서들인데, 이스라엘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 지내던 유다인들이,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의 고레스황제의 칙령으로 포로 생활에서 벗어나 조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황폐한 예루살렘에 돌아온 유다인들은 무너진 성전을 다시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으며 대대적인 말씀운동을 벌였습니다. 하깨, 느헤미냐, 에즈라서의 내용입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지내며, 자신들이 심판받은 이유가 우상과 불순종에 있었다는 반성에서 시작된 말씀 운동은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율법을 생활 속에 실천해야 하는 세부항목으로 만들기 시작해, ‘하라’는 강제명령이 248개, ‘하지마라’는 금지명령은 365개로 613가지의 규정까지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에 매몰되다보니,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뜻과 마음을 사라지고, 규정을 잘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며 규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종교적 왜곡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 당대에 사람들이 만든 전통, 규정으로 대표적인 것은 정결법과 안식일법이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는 십계명의 제 4계명의 시행령이 무려 39개나 된다고 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안식일법으로 갈등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논쟁에서 하신 말씀 중에 유명한 말씀이 있죠? 마르 2:27,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오늘 복음은 정결법으로 인해 벌어진 논쟁입니다. 7:3-4, “3 원래 바리사이파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들은 조상의 전통에 따라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었고 4 또 시장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반드시 몸을 씻고 나서야 음식을 먹는 관습이 있었다. 그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았는데 가령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 같은 것을 씻는 일들이 그것이었다.”

 

예수님의 일행이 자꾸 이런 규정들을 어기며 문제를 일으키니까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을 파견했습니다. 1절,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께 모여왔다가 제자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의 행동이 그들에게 딱 걸린 겁니다. 그래서 5절,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왜 당신의 제자들으 조상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냐”고 따졌습니다. 

 

물론 손을 씻고 먹는 것이 좋습니다. 코로나 시기에는 30초 이상 손 씻는 일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위생상 문제 정도일 텐데 예수님과 논쟁할 만큼 심각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출애굽기 30장 17절 이하를 보면, 제사장들이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고 몸을 정결하게 한 다음에 성소에 들어가야 한다는 정결규정이 나옵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이 이것을 이스라엘 모든 구성원이 지켜야 하는 규정으로 확대했습니다. 

 

모든 유다인들이 제사장처럼 되고, 그들의 집이 성전같이 되며, 그들이 먹는 모든 음식이 성물처럼 다루기를 목표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목표를 갖게 된 단서는 출애굽기 19장 6절입니다.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줄 말이다." 

 

이 말씀처럼 제사장의 나라가 되려면 모든 유대인들이 제사장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고 이렇게 이스라엘이 거룩해지면 하느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위선자라고 호되게 비판하셨습니다. 

 

이런 행위들이 실상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라는 겁니다. 하느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면서,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규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죄인으로 차별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이 실종되어 버린 겁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이사야서를 보면, 1장부터 율법에 따라 열심히 예배드리지만, 생활 속에서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위선적인 신앙이 고발하면서, 그런 예배를 하느님이 역겨워 하신다고 말합니다. 

 

위선적인 신앙의 구체적인 사례로 이사야서 58장에 나오는 단식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단식은 진정한 회개나 간절한 기도의 외적 표현이고 또 경건의 훈련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성공회도 사순절이나 금요일에 단식하는 영적 전통이 있습니다. 요나서를 보면, 죄악으로 심판이 임박했던 니느웨가 왕부터 모든 백성이 단식함으로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게 되는 구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58장은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에 선포된 말씀인데,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은 1년에 4차례 단식일 정해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단식하는 날’이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예배와는 무관한 통속적인 절기로 전락했습니다. 3 한다는 소리는, '당신께서 보아주시지 않는데 단식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 당신께서 알아주시지 않는데 고행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 그러면서 단식일만 되면 돈벌이에 눈을 밝히고 일꾼들에게 마구 일을 시키는구나. 4 그렇다, 단식한다는 것들이 시비나 하고 싸움이나 하고 가지지 못한 자를 주먹으로 치다니, 될 말이냐? 오늘 이 따위 단식은 집어치워라. 너희 호소가 하늘에 들릴 리 없다. 5 이 따위 단식을 내가 반길 줄 아느냐? 고행의 날에 하는 짓이 고작 이것이냐? 머리를 갈대같이 구푸리기나 하고 굵은 베를 두르고, 재를 깔고 눕기나 하면 그것으로 다 될 듯싶으냐? 그게 이른바 단식이라는 것이냐? 그러고도 야훼가 이 날 너희를 반길 듯싶으냐?

 

이사야는 종교행위로 타락한 단식을 고발하면서 단식의 본질을 말씀합니다. 6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주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7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 

 

6절 - 미슈파트를 행하는 것, 7절 - 쩨다카를 행하는 것, 이것이 없는 예배와 기도는 하느님이 받지 않는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경건, 거룩은 그 행위를 통해서 이웃을 살리고 사회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합니다. “27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 거룩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죠!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일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참된 거룩입니다. 이런 삶을 기반으로 하느님께 나가는 것이 참된 예배가 됩니다. 이럴 때 하느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겁니다. “8 그렇게만 하면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 너희 상처는 금시 아물어 떳떳한 발걸음으로 전진하는데 야훼의 영광이 너희 뒤를 받쳐 주리라.”

 

교우 여러분 모두, 이렇게 하느님께 영광 돌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문제라고 합니다. 행위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1 주여! 당신 장막에서 살 자 누구이며 당신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자 누구입니까? 2 허물없이 정직하게 살며 마음으로부터 진실을 말하고 3 남을 모함하지 않으며 이웃을 해하거나, 친지를 모욕하지 않는 사람.  

 

호세 가르시아는 “세상은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은 세상으로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악한 생각들이 내 마음을 점령하고 있으면 경건의 모양만 있는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사랑으로 채워져야만, 오늘 시편이 말하는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살펴봐야 합니다. 내 마음이 이웃을 향하고 있는지를 성찰해야 합니다. 특히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등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측은지심이 있는지를 끊임없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암살당하기 몇 달 전에 한 설교에서,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노벨평화상이나 출신학교처럼 피상적인 데 주목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나는 (죽는) 그날,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옷을 입혀 주고, 갇힌 자들을 방문하려고 애썼던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나는 전쟁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취하려고 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내가 인간을 사랑하고 섬기려 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 그 외의 다른 모든 피상적인 것들은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회의 페드로 아루페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것, 즉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방식으로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 당신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것이 당신이 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사랑에 빠져라.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러면  그 사랑이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드리고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르는 예배와 기도 말입니다.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만, 오늘 서신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이 주시는 완전한 선물인 사랑을 받고 채울 수 있습니다. 1:17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늘의 빛들을 만드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변함도 없으시고 우리를 외면하심으로써 그늘 속에 버려두시는 일도 없으십니다. 

 

이번 주 성서통독365 범위인 미가서의 한 구절을 읽어 드리며 설교를 마칩니다. 6:8,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한결 같은 사랑을 즐겨 행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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