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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by 분당교회 2021. 7. 25.

안타까운 소식을 전합니다. 박철성 루이스 형제가 지난 목요일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고 지금 아산생활치료센타에 들어가 계십니다. 지지난 주말, 직장에서 확진자가 나와 검사했을 때는 음성이었는데 밀접 접촉자로 분류되어 집에서 자가 격리 하던 중, 다시 검사하니 양성 반응이 나온 것입니다. 다행히 가족들은 모두 음성이 나왔지만, 집에서 자가 격리 중에 있습니다. 생활치료센타이든, 자가 격리든, 작은 공간에 갇혀서 14일을 지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기도와 격려 바랍니다. 

 

코로나 확산이 좀처럼 잡히지 않아, 거리두기 4단계가 8월 8일까지 두 주 더 연장되었습니다. 현장예배에 10%의 출석이 허용되지만, 엄중한 시기여서 계속 비대면예배를 드리기로 결정 했습니다.  

 

폭염과 코로나 감염이 계속되고 있어 방역당국과 의료진들이 너무 고생하고 있습니다. 자영업자, 소상공인들의 어려움도 극심하구요. 좀 더 참고 인내하며 4차 대유행을 이겨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나눕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교회력으로 나해인 2021년 연중주일에는 마르코복음을 읽도록 합니다. 주일마다 마르코복음을 읽어왔죠. 지난주일은 마르코복음 6장 30-34, 53-56을 읽었습니다. 가운데 건너 띤 내용이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인데, 오늘 읽은 요한복음 6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난주일 복음 내용을 기억하시나요?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보고하는데,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모여들어 음식조차 먹을 겨를조차 없어 예수님께서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좀 함께 쉬자’며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났는데, 많은 군중들이 그곳으로 미리 달려 와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6장 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등성이에 오르셔서 제자들과 함께 자리를 잡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군중들은 그 앞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모습은 산상설교가 나오는 마태오복음 5장의 시작 장면과 유사합니다. 

 

지난주일 복음 마르코 6장 3절에서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나라 백성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등 여러 가지를 가르치시며,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보다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영적인 양식을 먹이셨습니다. 

 

그렇게 날이 저물자, 예수님은 군중들의 육적인인 배고픔도 해결해 주고 싶으셨습니다.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어 한적한 곳을 찾아왔고 군중들을 종일 가르치셨으니 예수님도 무척 배고프셨을 겁니다. 군중들의 처지도 마찬가지구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사람들을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사올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오늘 복음 6절에 “이것은 단지 필립보의 속을 떠보려고 하신 말씀이었고 예수께서는 하실 일을 이미 마음속에 작정하고 계셨던 것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남자만도 5000명이나 되는 군중을 먹이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필립보는 ‘군중들에게 빵을 조금씩이라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와도 모자란다’고 대답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이백 데나리온은 월급 여덟 달치, 최소 2,000만 원의 비용을 들여야 겨우 요기 정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전달하는 겁니다. 필립보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의견입니다.

 

이 때 안드레아가 말합니다. “여기 웬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6절) 아이가 예수님과 제자들 가까이에 있었나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순전하게 “아저씨 이거요’ 하고 안드레아에게 건네주었을 것입니다.

 

보리빵,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거친 빵입니다. 작은 물고기, 어부들이 상품 가치가 없어 버린 작은 물고기로 가난한 사람들은 이걸 주워 다가 소금에 절여서 먹던 ‘옵살리온’이라고 합니다. 안드레아 역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가 이 수많은 군중들을 먹이는데 무슨 소용이 되겠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반응에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앉히게 하십니다. 그리고 오병이어를 손에 들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달라는 대로 나눠주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이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것만도 12광주리에 가득 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했을까 궁금합니다만, 주목할 것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와 함께 4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가능했던 요인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장 먼저는 군중을 먹이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뜻입니다. 

 

군중을 보셨던 예수님의 시선이 기억납니다. 지난주일 복음이었죠. 자기 앞에 모여든 군중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은 ‘주목하여 보는’ 환대의 시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시선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쉬기 위해 한적한 곳을 찾아왔지만, 측은지심으로 자기를 찾아온 군중들을 가르치시고 또 군중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지금 군중들을 먹이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주님의 뜻과 마음입니다. 인생 여정에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수많은 상황 가운데 주님의 뜻과 마음을 물어보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어떻게요? 

 

아이처럼 주님과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서를 통해 주님의 뜻을 알아가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깊은 기도의 삶을 살아다보면,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도 깊어 집니다.   

 

두 번째는 아이의 반응입니다. 

아이가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아이의 부모가 아이에게 도시락을 싸주고 일을 나갔을지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아이는 그 많은 군중들을 헤치고 예수님 곁으로 가서 종일 가르침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동일한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이성적 판단으로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있을 때, 아이는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워줄,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일 수 있는, 도시락을 안드레아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이것이 오병이어 기적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아이의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그것을 손에 받아 들고는 사람들을 식사 대형으로 앉힌 다음,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주님 손에 들린 건 오병이어일 뿐인데, 감사 기도를 드리고 나누니, 군중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보리 빵과 작은 물고기가 수 만개로 늘어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이의 반응과 예수님의 감사기도에 사람들이 감동했고, 그 감동이 전염되면서, 사람마다 가지고 있던 먹을 것을 내어 놓다 보니 이런 기적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과 1독서를 묵상하며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나누다’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아이가 나눈 빵을 들어 감사기도 드리시고 그것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물고기도 그렇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도 바알살리사에서 온 어떤 사람이 예언자 엘리사에게 보리떡 20개와 햇곡식 이삭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에 엘리사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먹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사의 제자들 역시 “어떻게 이것을 100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냐”고 포기하려 합니다. 그 때 엘리사가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먹도록 나누어주어라. 야훼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그 말대로 사람들이 먹고도 남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눔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하느님이 일하시는 통로입니다. 많은 것, 좋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전부가 주님의 뜻 가운데 나누어질 때 하느님이 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계시도다.”

셋째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뜻에 믿음으로 협력했을 때 일을 행하십니다. 아이의 나눔과 예수님의 감사기도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로도 그의 삶을 통해 이렇게 일하시는 하느님을 경험했나봅니다. 오늘 2독서 에페소서 3장 2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10:10,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 그 백성으로 살아가는 축복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풍성한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시고, 하느님은 이를 능히 이루실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처럼 반응할 수 있느냐 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주님의 뜻 가운데 나의 전부를 나누는 순전한 반응 말입니다.

 

제자들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가나의 혼인 잔치 기적을 비롯해서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기적을 경험해 왔지만 여전히 자신들이 합리적 이성으로 주님의 뜻 앞에 부정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오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8:3-4,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아이가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드리지 않았다면, 그저 자신만의 배고픔만 해결하는 도시락이었을 뿐입니다. 아이가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을 주님 손에 넘겨 드리자, 예수님의 감사와 축복기도를 통해, 남자만도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데 쓰임 받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면서 아이는 놀라고 기뻐하며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자라나 하느님 나라의 일꾼이 되었을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이 아이를 만나보고 싶네요. 

 

내가 가진 것이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사소하고 작은 것이라도 주님의 뜻 가운데 내어 놓고 나누면, 주님의 축복으로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을 일구어가는 위대한 헌신이 됩니다. 풍성하게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경험하며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는 하느님의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오늘 서신 에페 3장 21절 말씀으로 설교를 마칩니다. “하느님께서 성공회 분당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세무궁토록 영광 받으시기를 빕니다.”

 

잠시 기도합시다. 

 

주님의 뜻을 알고 나의 것을 드림으로, 풍성하게 이루시는 하느님을 경험하며 하느님께 영광 돌리는 나의 삶이 되도록, 성공회 분당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지금 내가 주님의 뜻 가운데 나누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주님께 물어봅시다. 

 

찬양 – 나의 기도하는 것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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