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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예수는 누구인가?

by 분당교회 2021. 7. 11.

코로나19 델타 변이로 인해 4차 대유행에 들어섰습니다. 내일부터 거리두기 4단계 조치가 시행됩니다. 4단계 방역지침에서 종교시설은 비대면만 허용됩니다. 지난 금요일 오전 교회위원들과 긴급 논의를 갖고 오늘부터 비대면으로 전환하기로 했습니다. 교우들의 안전을 위한 조치이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발병 이후 ‘코로나 이후’를 전망하는 여러 논의들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볼 때, 코로나 이후는 없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는 ‘위드-코로나’ 시대가 되었습니다. 현재 하고 있는 온라인을 이용한 기도모임과 성경공부를 더 활성화시키면서 온라인 또래모임을 정착시키고 메타버스 같은 가상공간을 활용한 선교를 준비해야 하는 때입니다. 

 

8월에는 대면예배가 가능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대면이 차단된 7월 한 달, 기도와 묵상으로 주님과 더 깊은 만남을 가지시고 온라인을 통한 기도회로 만나 서로를 격려하고 함께 기도하면서, 무더위와 어려움을 이겨 나가길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죽임 당한 이야기입니다. 요한을 죽인 사람은 헤로데왕입니다. 성경에 헤로데가 많이 나오는데, 여기에 나오는 헤로데는 예수님 탄생 때 아기들을 다 죽인 헤로데대제의 아들인 헤로데 안티파스입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을 통치했던 로마의 분봉왕이었지만, 로마 황제에게 자신도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요구했을 정도로 정치적인 야심이 컸던 사람이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프리스라는 도시를 재건축하여 갈리리의 수도로 만들었고 티베리아스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등 대대적인 토목 공사로 경제 부흥을 이끌었던  왕이었습니다. 

 

헤로데 가문은 근친결혼을 많이 했고, 성적으로도 매우 문란했던 집안이었습니다. 헤로데왕의 이복동생 필립보는 자신의 친조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하여 딸 살로메을 낳았는데, 헤로데 대제로부터 땅을 상속받지 않고 로마에 가서 부유한 귀족 생활을 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왕은 원래 아라비아 왕 아렛다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이혼하고, 로마에 가서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를 유혹해 동생으로부터 그녀를 빼앗아 결혼했습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왕의 조카이며 동생의 아내이기도 한 것이죠. 

 

이렇게 문란한 결혼에 대해서 세례자 요한은 계속 질타했습니다. 마르코 6:18, “요한이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누차 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경제를 부흥시킨 능력의 왕일지라도, 성경이 분명하게 근친간의 결혼을 금하고 있기에, 말씀을 대언해야 하는 예언자 세례요한은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레위기 20:21, “제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추한 짓이다. 그것은 제 형제의 부끄러운 곳을 벗긴 것이므로 그가 후손을 보지 못하리라.” 

 

이에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헤로데왕이 세례자 요한을 보호해 주고 있었습니다. 마르코 6:20, “그것은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여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간할 때마다 속으로는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그것을 기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헤로데왕은 일말의 양심이 있어서인지 요한의 질타를 감내하면서 다만 민중들에게 끼치는 그의 영향력을 잠재우려고 요한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헤로디아에게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헤로데왕의 생일에 권력자들이 함께 하는 잔치가 열렸고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추게 되었습니다. 

 

당시 왕족, 귀족, 자유민 여인들은 절대로 잔치 자리에 나와 혼자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그런 춤은 매우 천한 것으로 간주되어 무희나 창녀들만 추게 했던 것입니다. 헤로디아는 어떻게든 헤로데의 마음을 움직여 세례 요한을 죽이려고 그의 딸에게 창녀의 춤까지 추도록 사주한 것입니다. 

 

살로메의 춤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매우 기쁘게 했다고 합니다. ‘기쁘게 했다’는 단어가 “아레스꼬”인데, 이는 ‘성적인 관심을 일으키거나 성적으로 만족시키는 것’을 종종 암시하는데 사용됩니다. 

 

살로메의 춤이 얼마나 헤로데를 만족시켰는지 왕국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는 맹세를 합니다. 이 약조는 왕후의 자리를 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헤로데가 이제는 그의 딸 살로메까지 탐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토록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로마는 유대를 4지역을 나누어 각기 분봉왕을 세워서 대리 통치했습니다. 헤로데는 그저 갈릴리 베레아 지역을 맡은 분봉왕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헤로데왕은 자기의 영토도 아닌 것을 마치 자기 것 인양 허세를 부린 것입니다.

 

찬스를 잡은 헤로디아는 살로메를 시켜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했습니다. 결국 헤로데왕은 허세를 부리며 한 약속에 자신이 메여서 번민하는 가운데 세례자 요한을 죽이게 됩니다. 

 

세례 요한을 의인으로 여기고 보호하려 했던 헤로데왕이 결국 하느님의 사람을 죽이고 하느님을 거역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자신 안에 살아있던 일말의 양심을 따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수당하여 쟁반에 담겨진 세례 요한의 머리는 양심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양심 때문에 괴로워했지만, 결국 자신의 정욕과 허세로 양심을 죽이고 하느님의 예언지를 죽이는 헤로데왕의 모습이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다. 양심이 살아있지 않고 양심이 죽으면 그 인생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께 반역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따르는 것입니다.

 

마르코가 세례자 요한의 죽음 이야기를 이렇게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를 따르는 제자도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마르코는 4주 전 복음, 풍랑을 잠잠케 하는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은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왕이심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럼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마르코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 걸까요? 

 

오늘 복음의 전반부를 보면, 예수님께 파송 받은 제자들의 전도 활동을 통해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헤로데왕은 예수가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엘리야라고도 하고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생각한 예수는 예언자였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을 예언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장 1절부터 예수님이 고향을 가셨을 때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대하지 않았고 이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절,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예언자란 하느님의 기준으로 인간 사회의 부정과 불의, 부패를 폭로하고 하느님의 정의의 척도로 통치자들의 악행을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1독서로 읽은 아모스가 대표적인 예언자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하느님께 아모스에게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7:8-9, “8 나 이제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한가운데 드리웠다. 더 이상 이스라엘을 용서할 수 없다. 9 이사악의 산당은 쑥밭이 되고 이스라엘의 성소들은 폐허가 되리라. 나는 칼을 들어 여로보암의 나라를 치리라.” 

 

하느님께서 드리운 다림줄이란 하느님의 기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가졌던 하느님의 기준, 다림줄이 무엇인지는 아모스의 선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5:7, “저주받아라! 너희, 공평을 뒤엎어 소태같이 쓰게 만들고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자들아.” 

 

공평과 정의가 하느님의 다림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란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져 샬롬이 넘치는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 시편은 하느님의 통치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85:10-11,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 나오고 하늘에서 정의가 굽어보리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파송 받아 전도여행을 하면서 외친 복음이 바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마르코 1:14-15,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15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

 

“하느님이 왕이시다. 왕이신 하느님이 통치하러 오신다. 로마 황제를 숭배하고 제국의 가치인 힘과 부를 따르던 삶에서 돌이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오라.”

 

마르코는 4장 풍랑을 잠잠케 하신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 주권자, 왕이심을 알려주었고 오늘 복음을 통해서는 예수님께서 예언자이심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깊이 살펴 보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한 가지 더 알 수 있습니다. 

 

마르코는 그의 복음서에서 세례 요한을 예수님의 표본으로 소개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전도활동을 시작하신 때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였습니다. 1: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오늘 복음을 보면, 마르코는 예수님의 표본이 되는 세례자 요한이 죽임을 당한 이야기를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고 파송 받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돌아와 보고하는 그 사이에 넣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이 잡히듯 예수님도 잡힐 것이며, 세례자 요한이 넘겨지듯 예수님도 넘겨질 것이고, 세례자 요한을 죽이기 앞서 헤로데가 번민했듯이 예수님을 죽이기 전에 빌라도가 번민할 것이고, 의로운 세례자 요한이 죽임을 당하듯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죽임을 당할 것이고, 세례자 요한이 죽은 후 제자들이 장례를 치렀듯이 예수님도 숨은 제자들이 장례를 치를 것이고, 잔치 자리에 나온 요한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듯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당신의 몸과 피를 사람들에게 줄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르코는 이 내용을 다 자신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르코는 예수님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는 죽음이라고 소개합니다. 10:45,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셨다.”

 

그렇게 죽임 당한 예수님은 자신이 세 번이나 예언하신대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구원을 주는 이름이 되셨습니다. 16:15-16, “15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마르코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은 하느님과 사람을 화해시키고자 죽임 당하는 제사장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고자 기꺼이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서신을 보면, 사도 바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고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영적인 축복이라고 말하며, 이 복을 주시고자 사랑을 행하신 하느님의 은총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에페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신 왕이시고 예언자이시며 제사장이십니다. 이를 그리스도의 삼중직이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삼중직을 살아가라고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제자도입니다.

 

비록 영상예배를 드릴지라도 오늘 예배를 드리며 

삼위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새기고 감격하며 주님을 찬양할 때, 

삼위 하느님께서 코로나로 힘들어 하는 여러분을 위로하여 주실 것이며, 

한 주간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하시고 

외롭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흘러 보내는 

제자의 삶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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