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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삼위 하느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삶, 기도

by 분당교회 2021. 5. 30.

지난주일 성령강림주일로 부활절기가 끝나고, 오늘 삼위일체주일부터 연중주일을 시작합니다. 연중주일 Sunday in Ordinary Time을 시작하는 첫 주일이 성삼위일체주일인 이유는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았으니 삼위일체 하느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라는 메시지입니다.

 

저의 하루 일상을 돌아보면 온통 삼위일체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습니다. 잠에서 깨면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드리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침을 먹을 때면 감사기도를 드리고 성호경으로 부르며 십자성호를 긋습니다. 성호경이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하며 드리는 짧은 기도입니다. 

 

출근 길 운전을 시작할 때도 성호경과 함께 십자성호를 긋습니다. 주로 성당에서 혼밥을 하지만 점심을 먹을 때도, 퇴근하여 아내와 저녁을 먹을 때도 감사기도 드리고 성호경을 부르며 십자성호를 긋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성령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 앞에 머무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하루 일과를 마칩니다. 

 

삼위일체 신앙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한 분 하느님 야훼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한 가지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자신들의 경험에서 배운 살아계신 하느님을, 예수의 사역과 인성을 통해 새롭게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들은 예수님을 주와 구원자로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토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이 두 신(two gods)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한 분 하느님을 믿는 것의 일부를 의미하는가?”

 

성령님도 동일하게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자신들의 삶과 공동체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새로운 은사의 산물임을 목격하면서, 그들은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내려온 예수님의 생명과 능력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발생했습니다. “세 신(three gods)이 있었단 말인가? 그것이 아니면, 성령을 믿는 것이 한 분 하느님을 믿는 믿음의 일부인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위에, 그들 곁에, 그들 안에 있는 구원의 하느님, 즉 완전히 초월해 계시면서도, 예수라는 인격으로 역사 안에 현존하며, 그들의 공동체 속에서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3중으로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한 분 하느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이런 3중 패턴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을 경험하면서 일신론적 관점이 변화하여 예수와 성령까지 포함하게 된 것입니다.  

 

1세기에 기록된 서신들과 복음서를 보면 찬송, 인사말, 신앙고백, 전례형식, 송영, 짧은 신앙 관례는 이러한 3중적 마침 표현으로 가득합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의 말씀 마지막 구절이 대표적일 것입니다.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코이노니아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공식적으로 숙고하게 된 것은 4세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논란이 있고나서부터입니다. 

 

이집트 사제 이레니우스는 높으신 한분 하느님은 쪼개질 수 없으며, 신성한 존재는 여러 존재와 공유할 수 없으니, 예수님은 하느님에 의해 피조된 아들이며 유한한 본성을 가졌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에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성자를 반신으로 전락시켰으며 성자만이 죄인과 하느님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구속개념을 훼손했다고 반박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구원하는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교회의 믿음을 보호하고자 주교들은 325년에 니케아공의회로 모여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니케아 신조의 골격을 작성했습니다. 

 

이후 약 50년이 지난 뒤, 381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이 신경을 확장하며 성령의 신성에 대한 비슷한 고백문까지 포함시키게 되었습니다. 

 

니케아신경의 구조는 우리가 세례 때 받는 세 가지의 질문을 확장한 것입니다. ‘당신은 성부 하느님을 믿고 신뢰합니까? 당신은 성자 하느님을 믿고 신뢰합니까? 당신은 성령 하느님을 믿고 신뢰합니까?’ 

 

신경을 암송한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것들의 목록을 단지 소리 내어 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뢰하는 관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삼위일체 신앙은 예수님이 완전히 인간이며 완전히 하느님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보호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실제적인 지 모릅니다. 

 

히브리서 4장을 보면,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등 양성을 잘 표현해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15절, 16절 말씀입니다. “15 우리의 사제는 연약한 우리의 사정을 몰라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셨습니다. 16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은총의 옥좌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받아서 필요한 때에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15절,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완전한 사람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짓지 않으셨다함은 그 분이 완전한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셨기에 여러분의 모든 형편과 처지, 슬픔과 고통을 다 아십니다. 또한 하느님이시기에 능히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16절, ‘그러므로’ - 예수임이 완전한 인간이시며 완전한 하느님이시므로, ‘용기를 내어’ - 담대히, 때로 믿음은 하느님 앞에 뻔뻔한 것입니다. ‘하느님 은총의 옥좌로’ - 시은좌(施恩座) 하느님은 은총 베푸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나아갑시다’ -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때에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또한 삼위일체신앙은 완전한 사랑으로 온전한 일치를 이루시는 공동체이신 하느님을 알게 함으로써, 지상의 교회인 예수 공동체를 풍성하게 하고 우리를 하느님과의 관계 속으로 초대합니다. 

 

최근 삼위의 공동체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그리스 용어는 동방 교회에서 사용하던 말인데, 바퀴의 회전처럼 순환하는 동작을 묘사합니다. 

 

이 비유의 의미는 각각의 ‘인격’이 서로의 둘레를 역동적으로 순환하고, 서로 작용하며 서로 간에 엮이는 것을 표현합니다. 서로 구별되어 존재하지만, 세분은 사랑의 교제 안에서 각각의 존재 속에 거하십니다. 하느님의 내적 생명을 아름답고 신성한 원형댄스로 표현한 이미지입니다. 

 

핵심은 상호적이고 역동적인 사랑의 동작 속에서 돌며 춤추는 세분 하느님은 정적인 분이 아니라, 자기희생적 사랑이시며, 구원의 신비가 충만한 분이고, 이분의 사랑이 죄악과 죽음의 세상으로 넘쳐흘러 치유하고 구속하고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어 친히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 요한 3:16,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이렇듯 하느님은 본질과 속성이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사랑이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은총의 선물이며(고전 12:31, 여러분은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13장 사랑장) 성령의 열매이기도 한 이유입니다(갈라 5:22. 성령이 맺어주시는 선물은 사랑... ). 

 

우리 인간 안에 깊은 공허와 갈망이 있는 것은 우리가 삼위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느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교제를 나누도록 지음받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리적으로 하느님을 아는 것으로는 삼위 하느님을 경험하고 그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 2독서를 보면,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 8:15)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주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하느님의 호칭인 “아빠”라는 말로 우리도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삼위 하느님의 사랑의 교제에 들어가 그 사랑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기도입니다. 삼위 하느님과 갖게 되는 원초적인 사랑의 관계는 기도로부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로가 말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뜻이 무엇인지 아시죠? 살전 5:16-18,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니다.”

 

“늘 기도하라”는 말씀을 저는 우리가 늘 기도해야만 삼위 하느님과 상통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성령의 코이노니아가 넘치는 공동체를 세워가는 하느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말씀으로 받아드립니다.

 

세상과 벗한 하느님의 모든 핵심 사역은, 바로 하느님 자신의 교제의 생명으로 우리를 다시 부르시고, 이 세상을 생명의 신성한 춤 속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기도가 여러분 삶의 우선순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 삼위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럴 때 나라는 존재는 “욕망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임을 알게 되면서, 내 안의 공허와 방황을 채워주는 하느님의 사랑이 부어집니다. 삼위 하느님의 페리코레시스에 들어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이 시간에는 모든 기도가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드리는 기도이지만, 가장 멸확하게 삼위일체 하느님이 나타나는 예수기도를 드리는 시간을 잠시 갖겠습니다. 

예수 기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을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를 반복하는 단순한 기도로,  “늘 기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열망했던 이름 없는 순례자가 발견한 기도입니다. 

 

동방정교회의 대표적인 전통입니다. 이 기도는 일상 속에서 쉬지 않고 기도하며 삼위하느님과 동행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 삼위의 하느님이 모두 등장합니다. 고전 12장 3절에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할 수 없다”는 말씀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에 성령의 활동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나의 형편과 처지를 다 아시기에 주님께 자비를 구합니다. 

 

다 눈을 감으시고 전심으로 기도합시다. 처음에는 소리 내어 기도를 드리시다가 점차 소리를 줄어가시고 나중에는 침묵 가운데 예수 기도를 계속 드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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