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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은총을 믿음으로, 멸망에서 영생으로!

by 분당교회 2021. 3. 14.

교회력으로 오늘 사순4주일을 ‘장미 주일’이라고 합니다. 주교좌성당 같이 규모가 있는 교회에서는 전례색도 ‘장미’라는 이름에 걸맞게 장미색을 씁니다.   장미는 화려한 색깔과 향기로 ‘기쁨’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왜 극기, 기도, 자선, 재정 훈련 등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순절기 중간에 화려한 기쁨을 상징하는 장미 주일을 지키는 것일까요? 

 

최근에 와서 사순절기 경건 훈련은 많이 약화된 것 같습니다. 제가 성공회에 왔던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교회의 전통에 따라 금욕, 금육, 금식 등을 엄격하게 실천하며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그래서 지루할 수도 있는 극기와 절제 시간 한 가운데서, 잠시 휴식을 갖고 다시 경건 훈련에 전념하도록 하여, 진정한 부활의 기쁨에 동참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장미’라는 이름을 사용한 이유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지배하는 신들은 장미를 엮어 화관을 썼는데, 그리스도교 신앙은 지배자들의 신화를 뒤집어서, 장미를 억압당하고 박해받은 순교자의 관으로 바꾸었습니다. 가시관 쓰신 예수님을 따라 순교자도 가시 찔리는 고난이 있었으나, 그 신앙은 아름답고 향기롭다는 뜻이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상징이 백합과 장미였습니다. 장미의 가시는, ‘예수를 잃은 어머니 마리아의 심장을 아프게 찌르리라’는 시므온의 예언과 들어 맞았습니다.

 

사순절 한가운데 지키는 장미 주일은,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 여정에서 누리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까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고통이 있지만, 순종할 때 말씀을 성취하시는 하느님을 경험하는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인들에게,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하늘의 기쁨과 평화를 주십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요 은총입니다. 남은 사순절 3주간, 더 깊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가운데, 이 놀라운 하늘의 신비를 경험하고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 나옵니다. 3장 16절입니다. 함께 암송해 볼까요?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루터는 이 구절을 작은 복음서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설교는 이 한 줄 말씀을 깊이 살펴보는 것으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 계십니다. 완전한 사랑으로 온전한 일치를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충만한 사랑을 나눌 존재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왕이신 하느님을 대신하여 피조세계를 섬기는 사명을 부여 받았습니다.  

 

“이 세상을” 세상은 하느님이 손수 만드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말에는 모든 피조 세계와 사람은 다 포함합니다. 

 

그런 세상이 파괴되었습니다. 피조 세계는 멸망 직전입니다. 파괴된 피조 세계로 인해 인류는 지금 코로나19 펜데믹이라는 엄청난 위기를 겪고 있지만, 기후위기비상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파괴된 피조 세계로 인해 인류가 겪을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는 사람 또한 그 존귀함을 상실한 채 배제와 차별, 독점과 양극화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깨어지고 신음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성서는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죄란 창조주 하느님을 무시하고 자기가 주인 되어 살아가는 인간의 태도와 자세입니다. 오늘 서신 에페소서 2장에서는 그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3가지로 증언합니다. 

 

1절에서 “죄와 잘못을 저질러서 죽었다.”고 합니다. 죄로 인해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영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2절, 3절에서 영적으로 죽은 인간은 세속과 마귀와 정욕을 따라 산다고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따라 살고, 지시대로 살고, 끌려 살아가는’ 비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원형을 상실하고 죄의 종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3절 끝에, “하느님의 진노”를 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어떻게 화를 낼 수 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확실히 하느님을 떠나 있을 때 그분의 진노 아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사적 감정이 아닙니다. 우주의 정의가 부정되었을 때 일어나는 분노입니다. 지난주일 성전 정화를 하시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거룩한 분노 같은 것입니다. 

 

중력을 무시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뼈를 상하게 되는 물리적인 법칙이 있듯이, 하느님을 무시하고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세속과 마귀와 정욕을 따라 살면 현재적인 하느님의 진노를 경험하게 됩니다.

 

요즘 뉴스에 LH공사 직원들의 땅 투기 사건이 연일 보도되고 있고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이 내부 정보를 이용해 투기했다면, 엄벌에 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맘몬의 노예로 세속과 욕망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거주 공간이어야 하는 집이 투기의 수단이 되어, 정당한 노동의 결실이 아닌 부동산 투기로 부를 획득하는 부동산 공화국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했던, 공평과 정의가 무너진 타락한 이스라엘의 모습과 같습니다. 

 

성서는 “땅은 하느님의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느님이 명령하신 희년의 정신에 따라, 부동산을 통한 불로소득에 토지보유세를 강화하고 그 자원으로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사회가 되도록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이것이 제도화 되지 못해 투기꾼들이 판을 치고 양극화는 심해지며 ‘영끌’이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심각한 부작용이 온 나라를 병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음으로 겪게 되는 하느님의 현재적 심판 같습니다. 

 

성경적 토지 정의 실현은 교회가 앞장서서 외쳐야 하는 선교적 사명입니다. 

 

“극진히 사랑하사”

 

깨진 피조 세계와, 죄인 된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피조 세계를 회복하고 우리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외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자신 생명을 인류의 죄 값을 대신하는 희생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1독서를 보면,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에 대해 하느님께서 불뱀을 보내시어 물게 하셨고, 이스라엘을 살려달라는 모세의 간청을 들으신 하느님은 구리뱀을 만들어 높이 들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쳐다보는 자들이 질병으로부터 살아나도록 하셨습니다. 

 

높이 들린 구리뱀이 불뱀에 물린 사람들을 살리는 하느님의 구원방식이었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구원 받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새로운 구원의 방식입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요한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단어를 37번이나 사용했는데, 구원과 같은 의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생명을 말합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오늘 서신에 나와 있습니다. 

 

에페 2장 5절, 6절입니다. “5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듯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6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자리에 앉게 하여 주셨습니다.”

 

“다시 살려 주신다는 것“은 죽은 영이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아가며 그분과 사랑을 나누는 교제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함께 살리신다”는 말은 개역성경에서 “함께 일으키사‘로 번역되어 있는데, 부활을 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더 이상 세속과 마귀와 정욕에 끌려 살아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한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진노의 자식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비전으로 품고 이 땅에서 그 나라를 경험하고 누리며 그 나라를 일구어 가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들이 누리는 영원한 생명의 실제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들을 살펴보면, 다 과거형을 되어 있습니다. “다시 살려주셨다. 일으키셨다. 한자리에 앉게 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으면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이 구원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시는 분은 아멘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느님에 대하여 살아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 안에 있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이어받는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누리십시오.

 

오늘 복음 앞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대화하시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들어가는 거듭남의 은총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 8장에서는 거듭남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예수는 당혹스러워 하는 (니고데모)를 향해 바람이 어디서 부는지 알 수 없고, 어디서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소리는 들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바람은 (성령) 곧 (주님의 영)입니다.

 

복음주의는 (회심)과 (거듭남), (새롭게 됨), (구원)이 이어지는 과정으로 세례를 이해하기보다, 인생에서 한순간 체험하는 (회심)을 강조했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 이 말에 담긴 근본적인 의미는 우리에게 세례를 준, 우리를 돕는 이들에게 우리는 일생에 걸쳐 의존하고 있으며 세례를 통해 우리가 받은 약속에 응답하며 살아가려면 (교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 켈벵 또한 (유아세례)에 관해 말하면서 비록 아기는 그 예식에 온전히 참여할 수 없고, 온전히 회개할 수도, 믿을 수 없지만 “성령의 은밀한 움직임으로 (믿음의 씨앗)이 아기 안에 심긴다”(그리스도교 강요 4권 14장 20절)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살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능력이 우리 속에서 이미 역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과 함께 하느님의 우편에 앉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만 했을 뿐인데,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 놀라운 축복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선물을 주시고자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에페소서 2장 8절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 놀라운 은총,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을 깊이 되새기며, “그 사랑, 주님께 감사하여라. 기쁜 노래 부르며 감사 예물 바쳐라”는 오늘 시편의 말씀대로, 구원의 감격으로 예배드리고, 선한 생활로 하느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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