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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그 크신 하느님의 사랑, 용서!

by 분당교회 2020. 9. 13.

2020년 9월 13일 연중 24주일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사제

마태 28:1-10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게였습니다. 그지없이 좋은 가을입니다. 이른 아침 성당에 왔다가 세탁해 놓은 예복을 놓고 와 다시 집에 다녀오는데, 그저 상쾌하기만 했습니다. 탄천에 걷는 사람도 많고, 특히 자전거 타시는 분들도 많더군요. 날씨가 좋으니, 김희정 시인이 쓰신 “가을은 바람둥이에요”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가을은 흔들흔들

가을벌판에 가서

흔들흔들 벼들과

같이 춤추고,

 

살랑살랑

단풍잎 은행잎과

함께 뛰어 놀지요.

 

그리고 한들한들

코스모스 아가씨와

몰래몰래

사랑 나누는

가을은 바람둥이에요.

 

이 시간 먼저 창조주 하느님을 예배하고, 오후에는 방역 수칙 잘 지키시면서 주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을 만끽하려 합니다. 종일을 예배자로 살아가는 기쁨을 누릴 것 같습니다. 

 

그 크신 하느님의 사랑, 용서!

 

인생 여정에서 타인과 관계 맺는 것은 큰 기쁨을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교회 공동체로 모이게 하신 이유이죠. 주님은 공동체 지체들과의 사귐과 우정을 통해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그럴 때 사랑의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오늘 복음 바로 앞에 있는 말씀입니다. 마태 18:20,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관계를 좋게 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특이나 먹는데서 인심이 난다고 식탁의 교제를 갖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리고 서로에 대해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애정 어린 경청이 관계를 깊게 해 줍니다. 또 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습니다. 진솔하게 내 이야기를 나눌 때 상대방과 깊은 유대감을 갖게 됩니다. 

 

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도 관계의 깊이를 더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감사하며, 말이나 선물로 그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관계를 향상 시키게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모범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을 환대하시며 자주 식탁의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사람들의 아픈 사연들을 들어주셨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 활동의 거의 다가 이런 것들입니다. 애찬, 소그룹 기도모임, 제자훈련, 멘토링, 애경사를 기념하며 서로를 축복하는 일들로 사귐을 깊게 할 때, 진실한 공동체가 세워지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대면 만남을 불가능하게 하는 코로나 19는 교회에 직격탄을 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비대면 언택트 뉴노멀 코로나 19시대에 맞는 새로운 교회 활동을 세워가야 합니다. 

 

영상 예배만이 아니라, 온라인 소그룹 모임이 활성화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이용한 모임을 시작하여 합니다. 일단 다음 주일 견진 대상자 모임을 시작으로 또래모임, 기도모임, 독서모임 등을 정례화 하려고 합니다. 많은 협조와 참여 바랍니다.

 

그런데 어떤 관계들은 우리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기도 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고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서 많은 고통을 겪는 것을 봅니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관계의 어려움으로 헤어지는 부부도 많습니다. 하느님의 가족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빈번하게 겪는 일이 관계의 어려움입니다.

 

관계에서 어려움이 발생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서로에게 갖는 기대가 달라서, 성장 과정의 상황과 배경이 달라서, 가치관의 차이, 성격의 차이로 인해 어려움을 겪습니다. 또 사소한 오해로 인한 경우도 있고 금전적인 이유로도 관계에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이런 어려운 관계를 회복하기 힘들게 하는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교만, 시기, 질투, 사람을 대면하기를 두려워하는 마음,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는 용서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참 어렵고 힘들게 다가옵니다.

 

당시 유대교 랍비의 가르침에 따르면 3번까지는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7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래도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한 번도 용서하기 힘든 사회에서 7번까지라도 용서하며 살 수 있다면 성숙한 신자의 수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렇게까지 라도 용서해 보신 적 있나요? 진짜 7번 정도 용서한다면 관계 치유되고 화해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지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아무 조건 없이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혹 가족들끼리는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숱하게 범하는 자녀들의 잘못들을 끊임없이 용서하고 용납하는 부모가 있다면, 그런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은 그야말로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이 자녀의 가장 큰 축복이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가정은 용서하지 못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그 상처들이 트라우마가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누가 그렇게 살 수 있겠어요? 어떻게 그렇게 살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왕에게 일만 달란트나 빚을 진 사람이 있었는데, 왕이 그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탕감 받는 사람은 자기한테 백 데나리온 빚을 사람을 만나 빚 갚으라고 감옥에 가두었다. 이에 왕이 몹시 노하였고 탕감해 준 것을 무효로 하고는 빚을 다 갚을 때까지 형리에게 넘겨주었다.” 

 

이 비유를 실감나게 들으려면, 비유에 나오는 화폐 단위를 알아야 합니다. 1달란트는 금 30kg의 가치라고 합니다. 돈으로 환산하면 6,000데나리온입니다. 1데라니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10만원으로만 쳐도 1달란트는 6억이 됩니다. 그럼 1만 달란트는 6조가 됩니다. 날수로 계산하면 1달란트는 15년 치의 임금이고 1만 달란트는 15만 년의 품삯이 됩니다. 

 

이에 반해 100데나리온은 100일치로 1000만 원 정도입니다. 15만년의 삯인 6조를 탕감 받은 사람이 100일치 삯인 1000만원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5만 년의 품삯인 6조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이라는 겁니다. 왕이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 준 이유는 오직 하나 27절, 종을 ‘가엾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가엾게 여긴다’는 말은 헬라어로 ‘스프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로, ‘애를 태우다, 애를 쓰다, 애를 끓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애’는 창자로서 걱정하고 아파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복음서에 자주 나옵니다. 왕은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엄청난 빚을 탕감 받았으면, 감사와 감격이 넘쳐났을 겁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를 갚으며 사는 것이 평생의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은혜를 입은 사람이, 자기가 탕감 받은 액수하고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겨우 100 데나리온 빚 진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다는 것은 배은망덕한 일입니다. 이에 왕은 탕감했던 일을 무효로 돌립니다. 

 

이 비유를 들려주신 예수님의 기대는 주의 은혜를 받은 자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33절,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만약 은혜 받은 자답게 살지 못한다면 그 은혜는 취소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35절,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이야기는 ‘하늘 나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에서 하늘 나라는 하느님 나라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조전적으로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다스려지는데, ’용서하지 않는 자‘는 그 나라를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서로 용서하는 삶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를 용서받았는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6조라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하느님께서 탕감해 주신 것입니다. 

 

실감나지 않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이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영영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한 채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입장에서는 존귀한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신 것입니다. 죄 사함과 용서는 우리를 향한 가장 큰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용서하시고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당했듯이 우리도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나를 무시하고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당하는 고통을 느껴보라고 복수하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을 용서하라는 말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삶이 지옥이 됩니다. 

 

그래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사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용서하며 살 수 있을까요? 

 

본문에서 사용된 ‘용서하다’, ‘탕감해주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피에미’라는 단어인데, ‘보내다’, ‘버려두다’, ‘풀어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과 문제를 보내고 풀어주지 않고 내가 붙들고 있다는 것은 내가 심판하겠다는 태도입니다. 

 

나를 힘들게 한 사람과 사건을 보내고 풀어주는 용서는 내가 심판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께 온전히 맡겨드리는 결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오늘 1독서, 믿음의 사람 요셉을 보게 합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9절,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 대신 벌이라도 내릴 듯싶습니까?”

 

서신 로마서에서도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믿음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14:10,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형제를 심판할 수 있으며 또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이 아닙니까?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을 풀어주고 주님께 보내는 믿음은 죽을 수밖에는 죄인인 나를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용서하시고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주일 감사성찬예배가 주는 은총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감사성찬예배에서 설교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 성찬의 전례입니다. 

 

성찬기도 중에 성목요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이 예를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그 사랑을 받는 내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하여 내가 작은 예수가 되어 그 사랑을 흘러 보내는 하느님 나라 백성임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그 믿음으로 주님의 성체와 보혈을 먹고 마실 때,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차오르게 됩니다. 그 사랑으로 내가 회복되고 충만해 지면 너그럽고 자비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드리며, 예배에 성공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비대면 영상예배를 드려 직접 성체와 보혈을 먹고 마시지 못해도 우리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모시며 하느님의 사랑을 먹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 나를 용서하시고 자녀 삼아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가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하여 용서하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흘러 보내며, 모든 묶임으로부터 자유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 과거에 받은 상처로 힘들어 하는 분의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잠시 갖겠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잘못된 관계로 인한 상처를 지닌 채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관계에서 오는 심각한 상처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상처를 예수님 앞으로 가져오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그 상처를 보여 드리십시오. 그 누구보다 깊은 상처를 받으신 예수님은 부활의 능력으로 치유하십니다. 

 

이 시간, 먼저 당신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아무개가 나에게 행한 일은 잘못이었고 그 일로 나는 깊은 상처를 받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를 그를 용서 하겠다” 선언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사람을 받으시고 상처를 덮어주십니다. 

 

이렇게 용서를 선포하고 기도했어도 기억은 자주 그 상처를 생각나게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마다 믿음으로 용서를 선포하고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권능이 우리 상처를 두툼하게 하시어 원래 훼손되지 않은 육체보다도 더 강하게 해 주십니다. 

 

용서하는 사랑은 느낌을 쫓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결단으로 시작되고, 인내로 유지되면서, 지혜로 성숙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토마스 아 캠퍼스의 기도문을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오! 나의 구원자시여,

이웃에 대한 사랑의 명령을 철저하게 따를 수 있도록 

주님이 저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저를 도와 주소서.

이것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이웃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세심한 사랑을 저에게 주소서.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주님의 눈동자에 상처를 입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저를 도와 주소서.“

 

한 주간 지내시면서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붙여주신 사람들로 인해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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