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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자비하고 너그러우신 하느님

by 분당교회 2020. 7. 19.

2020년 7월 19일 연중 16주일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사제
마태 13:24-30, 36-43

지난주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으면서, 씨앗이 열매를 맺기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좋은 땅임을 알았습니다. 우리 자신을 좋은 땅으로 기경하기 위해, 성서묵상이 중요함을 말씀드렸고, 렉시오 디비나를 다시 연습해 보았습니다. 

 

지난 한 주간, 물을 주고 잡초를 뽑는 농부의 마음으로, 매일 묵상하며 주님과 동행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복음 끝에 예수님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라들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은 ‘쉐마, 이스라엘’(신명기 6:4)이라 명령하시고 계명을 주셨습니다. 쉐마란 ‘들으라’는 말입니다. “들으라, 이스라엘!” ‘듣는다’는 말의 본뜻은 ‘순종’입니다. “순종하라, 이스라엘아!”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선택받은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하느님의 비전인 하느님의 나라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매 주일 설교를 통해 하느님의 뜻과 마음을 들어도 생활 속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누리고 일구어 가는,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음을 명심하게 됩니다. 따라 합시다. “그리스도인은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1독서는 지혜서입니다. 지혜서는 외경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공동번역에는 정경인 구약 39권, 신약 27권, 외에 외경이 들어 있습니다. 토비트, 유딧, 에스델 외경편, 마카베오 상하, 지혜서, 집회서, 바룩, 다니엘 외경편 등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전혀 읽지 않는 책들이지만, 우리 성공회는 외경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성품과 교훈을 배울 수 있기에, 예배 시간에 ‘하느님의 말씀’은 아니지만, ’단순한 독서‘로 읽습니다. 

 

오늘 읽은 지혜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모든 사람을 보살피시는 하느님이시기에 불의하게 심판하지 않으신다. 만물에 대한 주권을 가지신 하느님은 만물에 관대하시다. 자비로운 심판을 내리시고 대단히 너그럽게 다스리신다.’ 

 

지혜서에 나오는 “자비로움”과 “너그러움”이라는 하느님의 성품이, 오늘 시편에서도 고백되고 있습니다. 시편 86:15, “주님은 자비로우시고 너그러우시어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시고 참되신 주님의 사랑 그지없으십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을 경험해 보셨는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을 이렇게 기록했다는 것은, 그들이 바로 그런 하느님을 경험했기 때문인데, 그들은 언제 이런 하느님을 경험했을까요? 

 

저는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릴 때,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을 경험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쉐마 이스라엘!” 이라고 하셨건만, 이스라엘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곧 죽음입니다. 창세 2:15-17, “15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 하시며 16 이렇게 이르셨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마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이 말씀을 들었음에도,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에덴에서 추방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해 입히시며 그들을 보호하십니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구원을 위한 피의 제사가 등장한 것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제사법을 주셨습니다. 불순종의 죄를 범했을 때, 죄인인 나를 대신하여, 동물을 잡아 제물로 바치는, 피의 제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제사를 드리면서, 죽을 나를 용서해 주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운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본질입니다. 죄 사함과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며, 자원하여 순종하는 삶을 결단하는 것이 예배의 축복입니다. 현장예배를 드리든, 인터넷으로 영상예배를 드리든, 이 예배의 은총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2독서를 보면, 사도 바울로가 “우리는 과연 빚을 진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용서를 받은, 사랑에 빚 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가 누구이든지,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 앞에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죄인입니다. 로마 3:9, “이미 내가 지적했듯이 유다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다 같이 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죄의 결과는 죽음이구요. 로마 6;23,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은 예수님을 보내 주시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로마 8:3,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룩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오늘 서신의 말씀입니다. 로마 8:15,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잠시 눈을 감고 하느님을 바라보시며, 아빠 아버지라고 불러봅시다. 이 한 주간 자주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하느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는 상속자도 됩니다. 로마 8: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유산이 없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이지만,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치유와 회복으로, 기쁨과 평화로,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총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사랑에 빚진 자’, ‘복음에 빚진 자’라는 고백이 우리를 선교적인 존재로 살게 합니다. 사도 바울로가 그랬고 다음 주에 오시는 강명관 선교사도 그런 분입니다. 강명관 선교사는 하느님의 사랑의 빚을 갚고자, 현재 22년째 아마존 밀림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용서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물로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5:44-5, “44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이 관점에서 오늘의 복음 마태 13장 29절, “주인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씀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라지도 회개하면 알곡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라지를 뽑는 것이 알곡을 뽑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 16장에 보면, 예수님의 수난 예고 앞에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팔짝뛰며 예수님을 가로 막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따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면 알곡이 되고, 주님의 뜻을 불순종하면 가라지가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에게 추천도서로 소개한 알렉산더 수메만의 우리 아버지” 7장,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에 보면, 가라지와, 가리지를 뿌려 놓은 원수, 악마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는 글들이 나옵니다. 좀 읽어드리겠습니다.

 

<‘악’으로 번역되지만, 그리스어 원문 ‘아포 투 포네루’는 ‘악’뿐만 아니라 ‘악한 이’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어떻게 번역되든 질문은 남습니다. 악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정말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계신다면 어떻게 악한 자가 이기고 악이 승리 하는 일이 일어날까요? 어째서 그분의 능력보다 악의 능력이, 그분보다 악이 더 선명히 보이는 것일까요? 그 분이 계신다면, 그 분이 왜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십니까? 게다가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분께서 어째서 고통을 겪으며 죽어가는 우리 주변에 있는 이들을 구해 주지 않으신 것일까요?

 

먼저 이는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점을 인정합시다. 좀 더 정확히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요. 적어도 합리적이고 지성인이 만족할 만한 이른바 ‘객관적인 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악’은 시험, 혹은 유혹으로, 우리 신앙을 무너뜨리는 의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 어둠이, 냉소가, 무력감이 우리 영혼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악이 지닌 경이로운 힘은 악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에 대한 우리의 믿음, 선한 힘이 악보다 강하다는 믿음을 무너뜨리는데 악의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시험에 빠진다는 말도 이런 뜻입니다. 합리적 논거를 써서 악을 해명하고 악을 선에 맞서는 실제적인 힘으로, 선에 대항하는 한 세력으로 적법하게 세우는 시도조차 ‘시험에 빠지는 것’, 은밀하게 악에 항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악에는 설명할 만한, 정당화할 만한 어떤 기반도 없습니다. 악의 기원은 그 분을 향한 반역, 그분에게서 이탈하는 것, 충만한 삶을 깨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악을 보는 관점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아버지께서는 악을 해명하시기보다 악에 저항하고 악을 극복할 힘을 주십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악에 대한 승리는 악을 이해하고 해명하는 능력이 아니라 충만한 믿음, 온전한 소망, 완전한 사랑의 힘에서 나옵니다. 시험과 유혹을 극복하는 무기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며 유혹에 대한 바른 응답도 이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유혹을, 악을 이기고 승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도 악을 해명하거나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계속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악을 맞서셨을 뿐입니다. 그분은 악한 세력을 멸하시기보다는 악과 싸울 수 있는 힘이 무엇인지를 밝히 드러내셨으며 우리에게 그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 간구를 통해 우리는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힘은 오늘 서신이 말하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믿음으로 얻게 됩니다. 로마 8:13-14, “13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14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면, 내 안에 충만한 믿음, 온전한 소망, 완전한 사랑이라는 성령의 힘이 충만하게 됩니다. 악을 이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가라지가 아닌 알곡으로, 추수의 때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하시는 주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 이렇게 되기를 바라시며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오늘 드리는 성찬예배를 통해, 우리가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 가는 알곡으로 자라나기를 바라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성령을 주신, 하느님의 자비로우심과 관대하심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여 “쉐마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믿음으로 나를 도우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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