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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우리가 소금과 빛인 이유?

by 분당교회 2020. 2. 9.

2020년 2월 9일 

연중 5주일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사제 

마태 5:13-20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들어온,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이다”라는 표현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과 그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 주님의 기대가 담겨 있는 표현입니다. 신앙인의 정체성,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인 것이죠.

 

그런데 왜 예수님은 변하지 않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금”같은 것으로 비유하지 않으시고 소금과 빛으로 비유하셨을까요? 삶 가운데 소금과 빛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은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금이 없다면 맛을 낼 수 없습니다. 빛이 없다면 어두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세상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흔히 소금이란 부패를 방지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니, 소금처럼 교회가 세상의 불의와 부패를 막아내는 첨병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곤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본문에서 주님은 소금은 짠 맛을 내는 것으로 명확하게 말씀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사는 맛, 살 맛”을 주는 존재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는 맛, 살 맛”이란 무엇일까요? 재미와 쾌락? 재미와 쾌락으로 치면 세상에 널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살 맛, 사는 맛을 느끼시나요? 저는 사는 맛, 살맛이란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는 거구나!” 고백하게 하는 곳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우러러 모시고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세속과 정욕과 마귀에 이끌려, 헛된 인생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정신없이 살아가며 공허함에 목말라 방황할 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을 보고 “너는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냐”고 복음의 능력을 물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은 변하지 않지만, 소금은 그 맛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소금은 우리가 사용하는 염전의 소금이 아니라, 돌소금을 말합니다. 소금을 다 긁어 사용하거나, 물에 짠 맛이 빠져 나가면 돌만 남습니다. 그러면 길바닥에 던져 버리는 것이죠. 

 

교회도 자기 정체성-복음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상실할 수 있음을, 그러면 하느님께는 버림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런 지경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가 엊그제 발표된 설문조사결과에 따르면, 한국사회 성인 남녀 63.9%가 한국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교회가 맛을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지, 마음이 아픕니다. 

 

“세상의 빛”이라는 말에서는 세상이 어둠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없다하고 스스로 주인 되어 깨어지고 신음하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 구원의 빛을 비추고자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이 절대 탄식해서는 안 될 내용이 세상의 어둠과 타락과 부패입니다. 다만 신앙인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힐 한 줄기 빛이 없음이 우리의 탄식이 되어야 합니다. 

 

한 달 전 설교에서 우리가 비추는 빛의 내용이 오늘 복음 16절에 나오는 “착한 행실”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을 에페소서 2장에서는 “선한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그 착한행실, 선한행실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인 “의와 공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앞 팔복의 말씀과 이어지는 것인데, 본문의 맥락에서 “착한 행실”은 팔복 중 6절,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에 연결됩니다. 옳은 일이란 “주님의 뜻”을 말합니다. “주님의 뜻”을 바로 알고 행하는 것이 착한 행실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올 해는 성서 통독을 하고자 하고, 이번 사순절 동안에는 먼저 신약을 통독하려고 합니다. 

 

오늘 1독서를 봐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이 종교로 타락하면 단식을 종교적인 행위로만 이해합니다. 이사야 시대는 신앙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앙의 본질을 상실한 채 종교적인 행위만 남아 있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진정한 단식이 무엇인지를 외칩니다. 6-7절입니다. “6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주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7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 

 

먼저 7절을 봅시다. 어떤 내용입니까? 사랑과 구제의 활동을 말합니다. 어느 종교나, 누구나 인정하는 착한 행실입니다. 오늘 주보 2면에 나와 있듯이, 올 해 우리 교회는 적지만 이렇게 실천하려 합니다. 더 많은 것들로 나누고 섬기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한 주요 요인은 6절을 주목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합니다. 억울하게 묶인 이들이 있습니다. 압제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해방하여 자유를 주는 것, 사회정의의 문제입니다. 

 

구조적인 불의, 문화와 관습에 만연한 배제와 차별,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교회가 행할 착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어제 “살고 살리는 기독교 페미니즘”이라는 특강이 있었습니다. 40여명이 넘게 참석해서 무려 3시간 반 동안이나 진행됐습니다. 너무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교우들은 13분만 참석하셨는데, 너무 아쉬웠습니다. 

 

지난 5천 년 동안,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이사야 표현으로 하면, 압제받는 이들이 여자였습니다. 살고 살리는 기돌교 페미니즘은 “여자도 사람이다. 남녀 모두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사람이다.”는 성서의 선언에서 출발합니다. 

 

“여자도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사람이다!”는 선언은 여전히 배제와 차별 가운데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난민도 사람이다.” “이주민도 사람이다.” “소수자도 사람이다.” 등등. 이렇듯 배제와 차별 속에 있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존중받도록 하는 모든 기도와 행동이 착한 행실입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소금과 빛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필요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에게 사는 맛, 살맛을 주는 교회,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두운 세상에 한 줄기라고 빛을 발하는 교회되기를 바랍니다. 

 

나눔과 구제, 사회 정의를 위한 기도와 참여라는 “착한 행실”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힘차게 전파되며 하느님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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