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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우리가 드릴 봉헌?

by 분당교회 2020. 2. 2.

2020년 2월 2일 

주의 봉헌 주일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사제 

히브리 2:11-18, 루가 2:22-40

 

오늘은 교회력으로 ‘주의 봉헌 축일’입니다. 교회는 성탄 다음 40일째 되는 2월 2일을 예수 성탄과 주의 공현을 마감하는 주의 봉헌일로 지킵니다. 성탄 후 40일째 되는 날 마리아가 산후조리 40일을 마치고 정결례를 드린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되셨습니다. 첫 아이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이스라엘 유법에 따라 예수님도 성전에 봉헌되신 것이죠. 이렇게 성전에 봉헌되어진 예수님은 장성하여 공생애와 십자가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봉헌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서 참된 봉헌이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봉헌하다”는 말은 ‘하느님의 것으로 구별되어 바쳐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 성찬예배를 위하여 하느님의 것으로 구별되어 바쳐진 그릇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성잔, 성반, 성합이라고 부릅니다. 면병과 포도주도 성찬의 전례 중 축성기도를 드리고 나면 성체와 보혈이라고 부릅니다. 구별되어 하느님께 바쳐진 것은 하느님의 것이 되고 하느님의 뜻 가운데만 사용되기에 거룩합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죄 사함 받은 그리스도인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인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구별된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예배를 시작하며 양초축복식을 했습니다. 축복된 양초는 교회의 전례와 가정기도 에 사용됩니다. 양초는 자신을 태워 빛을 밝히면서, 공간과 시간을 거룩하게 변화시킵니다. 

 

자신을 태워 빛을 밝히는 양초를 보면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세상의 빛 -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 되신 것은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께 봉헌하셨기 때문입니다. 빛이란 하느님 나라를 위해 생명을 봉헌할 때 드러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다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우리의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드릴 때 누리게 되는 하느님의 나라의 평화가 봉헌의 신비일 것입니다. 

 

실제 하느님을 위하여 생명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많은 성인들은 대부분 생명을 바치신 순교자들입니다. 우리는 생명처럼 여겨지는 것을 봉헌함으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명처럼 여기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생명처럼 여기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재물 아닐까요? 시간이 생명입니다. 그 시간을 바쳐서 얻어낸 결과물이 재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면, 여러 가지 삶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시간을 구별하여, 주일 감사성찬예배에 참석하고 매일의 삶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로가 오늘 2독서 4절에서 말하는 헌금의 특전입니다. “4 그리고 부디 자기들에게도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에 참여하는 특전을 달라고 자진해서 간청해 왔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드리는 헌금을 특전, 특권으로 여기는 생각은 맘몬이 지배하는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지는 특별한 운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5절을 보니까 사도 바울은 마케도니아 성도들이 힘껏 드린 헌금을 보고 그들이 “먼저 자기 자신을 드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헌금이 바로 자기 자신을 드리는 참된 봉헌이라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변화와 특전을 누린 한 자매가 기억납니다. 전에 섬기던 제자교회 자매입니다. 그 분은 서울대성당 대학부 출신이었습니다. 남편은 결혼을 위해서 세례는 받았지만, 신앙이 없어 예배에 나오지 않고 자매도 일이 있으면 빠지기 일쑤였습니다. 예배 올 때 드리는 주일헌금이 헌금의 전부였던 자매였습니다. 

 

남편이 교회에 나오기까지의 스토리도 있지만 길어서 생략하고, 이 자매가 여차저차해서 제 아내에게 일대일 제자양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훈련을 받기 시작하면서 눈에 띠는 변화가 나타나는데, 주일 예배를 빠지지 않았습니다. 자매가 고등학생 수학 과외를 하는데, 시험 때면 주일에 보충수업을 해서 예배에 나오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 주일미사를 다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청지기 헌금을 결단한 것이죠. 나중에 고백하기를 십일조를 드리고 싶었지만, 대출받아 집 마련하고 세 아들 키우면서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워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나니, 처음에는 돈을 전처럼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어려움을 느꼈지만 점차 규모있게 살림을 살면서 어렵지 않게 되더랍니다.

 

이후 재정적으로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교우 중에 사업을 망하고 월세를 사는 어려운 가정이 있었는데, 저를 통해 500만원씩 두 번이나 플로윙을 했습니다. 지정헌금(바나바헌금)인 거죠.

 

교회 스타렉스가 노후 되어 할부로 차를 구입했는데, 자기가 차를 봉헌하려고 했다고 할부금을 떠맡았습니다. 또 제가 청빙사제직을 사임할 때는, 신자회장님께 전화해서 ‘신부님이 빚 남겨놓고 떠나시면 안 된다’고 ‘김신부님이 제자교회에 있는 동안 발생한 채무가 얼마냐’고 물어보더랍니다. 8천만 원의 빚이 발생했고 그 중 1천만 원을 갚아 7천만 원이 있었는데, 신자회장님이 착각해서 8천만 원이 있다고 하니까 그 날로 8천만 원을 입금했습니다. 특별목적헌금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 가정이 무지 부자인가 보다 생각하실 텐데, 그 때 그 가정이 서수지에 2억 대출받아 아파트를 구입해 살고 있던 때였습니다. ‘넉넉하지 않은데 왜 무리하게 헌금하셨는지’ 물어보니까 ‘인센티브 받고 이래저래 돈이 모였는데, 하느님이 그 마음을 주셔서 했다고, 그 돈 없어도 산다’고 대답하더군요. 

 

나눔의집 소식지가 발간될 때마다 보면, 책자 맨 뒤에 후원자와 금액이 기재되어 있는데 매달 10만원씩 후원 하더군요. 선교구제헌금입니다. 

 

지난 주 월-화 부산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차 내려가 부산교구 박동신 주교님과 일박이일 같이 지냈는데, 주교님께서 그 가정이 포항교회 건축헌금으로 천만 원을 봉헌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에 대해서 갖는 신앙의 태도가 봉헌기도에 나와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기에 우리가 받은 것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주여 이것으로 당신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인은 물질에 대해 다만 청지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수입이 많든 적든 청지기로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헌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성공회의 많은 형제교회들은 십일조서약서 봉헌식을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주님께 드리는 헌금의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십일조를 강조합니다. 이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이는 구약의 법이기에 무효화되었다고 반박합니다. 

 

故대천덕 신부님은 “신약시대에 와서 십일조가 더 이상 헌금의 기준이 아니라는 지적은 옳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구원받은 신약의 신자들에게는 봉헌의 기준은 십의 일이 아니라, 십의 십이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사람에게 십일조가 기준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더 봉헌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다만 최소한의 기준으로 십일조를 드리고, 나머지 9/10로는 검소하게 살며 선교와 구제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흘러 보내며,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 6: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세상에서 하느님과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재물만은 하느님과 동급으로 여겨집니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이기에 사람들은 돈에서 자신의 자존감, 안정감, 평안, 힘 등을 얻습니다. 

 

하지만 돈이 주는 위로와 힘과 자존감은 거짓임을, 돈을 우상처럼 섬기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신자들조차 하느님보다 돈을 더 사랑합니다. 

 

청지기 헌금은 물질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한다는 사랑의 고백이며,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겠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참된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1독서 말하는, “순금이나 순은처럼 순수하게 되어 올바른 마음으로 바치는 제물”(말라기 3:3)인 것입니다. 

 

한자말로 사랑을 뜻하는 ‘애, 愛’는 원래 ‘아낀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소중한 것을 참고 아껴서 누군가에게 베푸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 드려질 때 그것을 가리켜 ‘참된 봉헌’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청지기로서,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온전한 십일조와 선교구제헌금을 드리며 봉헌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특전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보람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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