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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우리를 통해 역사하신다.

by 분당교회 2019. 2. 18.

2019년 2월 17일 연중 6주일 

최성모 요한 사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신다.


정의의 하느님, 주님께서는 불의한 권세를 심판하시며 억울한 이들을 돌보아주시나이다. 비오니, 의로움을 분별하는 지혜와 실천하는 용기를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게 하소서.


예레 17:5-10

야훼가 하는 말이다. 나에게서 마음이 멀어져 사람을 믿는 자들, 사람이 힘이 되어주려니 하고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으리라. 벌판에 자라난 덤불과 같아, 좋은 일 하나 볼 수 없으리라. 소금쩍이 일어나서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뙤약볕만이 내려쬐는 사막에서 살리라. 그러나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개울가로 뿌리를 뻗어 아무리 볕이 따가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잎사귀는 무성하며 아무리 가물어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으리라. 사람의 마음은 천길 물 속이라,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이 야훼만은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본다. 그래서 누구나 그 행실을 따라 그 소행대로 갚아주리라.


시편 1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악한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


1고린 15:12-20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우리가 전파하고 있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셨을리가 없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을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는 우리는 결국 하느님을 거스르는 거짓 증인이 되는 셈입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루가 6:17-26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이르러 보니 거기에 많은 제자들과 함께 유다 각 지방과 예루살렘과 해안 지방인 띠로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더러운 악령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그들도 고쳐주셨다. 이렇게 예수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와 누구든지 다 낫는 것을 보고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예수를 만지려고 하였다.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우리 교우님들, 제 이름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최성모입니다. 최가에 성인 성, 거룩할 성을 쓰고, 본뜰 모, 본받을 모를 씁니다. 제 이름의 뜻을 아시겠나요? 제 이름을 풀이하자면, 성인된 모습, 성인과 같이, 성인을 본받아, 이와 같은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성인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라, 이것이 제 이름을 지어주신 뜻입니다.


제가 중학생 까까머리가 되었을 무렵에, 제 이름의 뜻에 대해서 깊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의 이름에 성인 성, 거룩할 성 같은 너무 고결한 가치를 뜻하는 어려운 한자를 쓰지 않는다고 하는데, 왜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어렵게 내 이름을 지으셨을까, 정말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 나는 이름값 하기 틀렸구나! 


도대체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성인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언감생심, 그런 생각조차 한 적이 없습니다. 교우님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제 이름값 하면서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못 살겠죠? (웃음)


그러나 우리 모두의 생각과 달리, 저는 제 이름값을 할 것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모든 교우님들, 주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고,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어머니, 아버지, 딸, 아들, 자매, 형제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인과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인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미 성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 멋대로 지어내거나 제 희망사항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를 통해, 우리가 거룩한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것 뿐입니다. 교회의 전통을 통해,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옆의 자매형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해왔는지를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것 뿐입니다.


개신교 신자분들이 교회 안에서 교우분들을 성도님, 성도님, 하면서 부르는 것을 우리 교우님들께서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성도’란 표현은 개신교만의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 공동번역성서에도 ‘성도’라는 표현은 정말 많이 나옵니다. 


보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신약성서가 쓰여지던 초대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을, 자기가 속해있는 공동체를, 그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부르던 존칭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역사가 기록된 사도행전이나, 바울로 서신을 포함한 신약성서에 이 ‘성도’라는 단어는 무려 68번이나 나옵니다. 우리가 감사성찬례나 성무일과를 드리면서, 사도신경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때 말하는 ‘모든 성도의 상통을 믿으며’에서의 ‘성도’도 마찬가지의 의미로 똑같습니다. 


성서가 이렇게 많이 사용하고, 또 개신교회 신자분들이 서로를 존칭하는 용어로 즐겨 사용하는 이 ‘성도’의 헬라어 원문이 ‘하기오이스(γίοις)’, ’거룩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이 용어를 영어로는 ‘세인트(saints)’로 번역하고, 우리말로는 ‘성도(聖徒)’, 성인 성, 거룩할 성에, 무리 도, 제자 도를 써서 ‘거룩한 무리’, ‘거룩한 제자들’로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모 마리아, 성 요한, 성 야고보 같이, 일반적으로 성인이라 부르고 축일로 기념하는 분들에 대한 호칭이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말로는 이분들과 같이 뛰어난 신앙의 모범을 보이신 신앙의 선조들을 ‘성인’이라 부르고, 그 외에 초대교회에서 그랬듯 신앙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성도’라 부를 뿐입니다. 영어로는, 앞서 우리가 성인이라 부르는 분들을 대문자 S를 쓰는 ‘Saints’, 우리가 성도라 부르는 분들을 소문자 s를 쓰는 ‘saints’로 그 쓰는 방법만 달리할 뿐, 그 의미는 모두 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초대교회로부터 신앙공동체는 스스로를 거룩한 사람들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 신앙공동체 안에서 함께하는 나와 다른 모든 사람을 거룩한 사람들로 이해하고 대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해, 이런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요? ‘나 좀 괜찮은 것 같은데?’ ‘우리 좀 착한 거 아니야?’ 이런 착각 혹은 자만에서 비롯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겠지요. 이런 이해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삶을 통해 참된 진리를 가르쳐주셨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서 그 가르침을 확증해주셨을 때, 그 거룩한 가르침을 믿고 따르겠다는 자기 자신과 공동체를 향한 선포입니다. 


요한 복음서 16장 33절,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세상은 예수가 틀렸다, 예수가 잘못했다, 예수가 죽을 죄를 지었다며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수가 옳았고, 예수가 잘했고, 예수야말로 영원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그분의 부활로서 온 세상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과 가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분명 실패로만 보이는 예수의 삶과 죽음에 하느님께서 손을 들어 판정승을 내리신 것입니다. 예수가 옳다! 예수의 삶의 방식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법과 질서와 가치의 총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래서, 세상 가운데 살아가며 끊임없이 어떤 삶의 방식을 따라야 할지 선택해야만 합니다.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 즉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냇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무성한 잎사귀를 내고 제 철 따라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성서가 줄곧 염려하는대로 우리는 세상의 지식을 따르고 세상의 가치를 좇아야만 그런 나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신자도, 사제도, 교회도, 그렇게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구약성서를 관통하며,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고집 센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시편 기자의 노래처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등에서 짐을 벗겨주셨고, 그들이 곤경에 빠져 부르짖을 때마다 살려주셨지만, 고집 센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나 쉽게 하느님을 저버리고 잊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라는 강대한 제국 앞에서, 하느님보다도 그들의 힘을, 그들의 권세를 두려워하거나 의지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강력한 부와 권세를 믿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우리의 삶을 아주 충분히 보장해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이성적, 논리적, 합리적, 효율적인 이해와 판단도 사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이 비이성적, 비논리적, 비합리적, 비효율적인 것으로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볼까요?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가난이 행복이 될 수 있나요? 굶주림이 행복이 될 수 있습니까? 슬퍼 우는 일이 어떻게 행복이겠습니까? 미움을 받고, 내어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바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입니다.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들이 다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부유한 삶, 배불리 먹고 마시며 생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하하 호호 웃으며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것, 남들로부터 인정받아 가는 곳마다 환대받는 인생,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런 삶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교우님들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가난입니까, 부유함입니까? 굶주림입니까, 배부름입니까? 우는 것입니까, 웃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도로서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결정해야 하는 선택은 둘 중 하나를 골라 취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 선택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뜻을 어떻게 나의 삶의 태도로 삼을 것인지에 대한 지향의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어느 곳으로, 어느 누구에게 향하는지를 깨달아, 같은 방향으로 내 시선을 돌리고, 내 발길을 향하는 삶의 방식의 문제입니다. 


부유함은 흉이 아닙니다. 배불리 먹는 것도 흉이 아닙니다. 웃고 지내는 것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도 흉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가난함, 굶주림이 자랑이 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욕을 먹는 것, 누명을 쓰는 것 모두 자랑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유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살피지 않을 때, 배불리 먹고 지내면서도 굶주린 사람들을 돌보지 않을 때, 사람들의 칭찬과 갈채를 받으며 하하 호호 웃고 지내면서 세상의 편견과 차별을 뒤집어쓴 채 슬피 우는 사람들의 눈물을 가벼이 여길 때, 바로 그 곳에 죄가 자리합니다. 이 죄가 불행한 것입니다.


복음서에 이 죄에 대한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라자로와 부자’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들어다 놓은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 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더구나 개들까지 몰려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 얼마 뒤에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루가 16:19-23)


부자는 자신의 부유함을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축복으로 여기며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매주 성전에 들어가 흠없는 양을 바쳐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을지도 모릅니다. 꼬박 꼬박 절기에 맞춰 율법이 정한대로 예물도 열심히 봉헌드렸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부자는 죽어서, 소위 우리가 말하는 지옥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자신은 부유하면서도 가난한 라자로를 살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배불리 먹고 마시면서도 굶주린 라자로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을의 유지답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얻는 칭송을 즐기면서도 개와 같이 천대받는 라자로를 내버려두었기 때문입니다. 


지향은 관심입니다. 주님이 바라보시고, 주님이 걸어가시는 그 방향에 있는 사람들, 그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저이가 왜 가난한지, 왜 굶주리고 있는지, 왜 슬피 울고 있는지, 왜 미움을 사고 내어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써야만 했는지 물어야 합니다. 저이는 어떻게 부유한지, 어떻게 배불리 먹고 지내는지, 어떻게 웃고 지내며, 어떻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얻는지 궁금해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사역의 시작이고, 그분의 삶의 방식을 따르려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첫 걸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이 땅에 역사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로부터 피어나고,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손과 발, 우리의 피와 땀에서 시작됩니다. 완전한 하느님의 계획, 완전한 하느님의 나라, 완전한 하느님의 통치는, 오직 하느님께서 이루시고 완성하실 일입니다. 하지만 그 거룩한 계획에, 그 거룩한 나라에, 그 거룩한 통치에 그분이 지으신, 그분의 피조물인 우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거룩하신 주님처럼 거룩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에, 그분께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이르신 말씀, 레위기 19장 2절,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거룩한 사람’이란 호칭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불러주셨고, 또 그렇게 살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거룩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마땅히 그러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고 우리가 마땅히 믿기 때문입니다. 교우님들, 이제와 영원토록 성인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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