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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성공회 그리고 비아 메디아 Via Media

by 분당교회 2019. 1. 31.

2019년 1월 27일 연중 3주일 설교/말씀

최성모 요한 신부


성공회 그리고 비아 메디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우리 교회, 성공회의 특징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교우분들께서는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우리 교회를 설명할 수 있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저는 그 중 가장 큰 특징이 ‘Via Media’라고 생각합니다. 이 라틴어를 영어로 그대로 옮기면 ‘Middle Road’가 되겠고, 한자로는 ‘中道’, 쉬운 우리말로는 ‘가운데길’입니다. 

교우분들께서 잘 아시다시피, 비아 메디아는 오백년 전 종교개혁 과정에서 나온 말이고, 특히 영국 종교개혁에서는 더더욱 중요한 단어입니다. 헨리 8세가 자신의 신앙과 신학적 견해가 아닌 왕위 계승이라는 가장 큰 정치적 이유로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고, 영국교회의 수장이 된 것이 영국 종교개혁의 시발점입니다. 그 이후 영국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충돌이란 엄청난 혼란에 휩싸입니다.

세상의 입방정에 오르는 것과는 달리 헨리 8세는 영국 종교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까지 받았던 헨리 8세는 죽기까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가 이룬 것은 로마교회로부터 벗어난 영국인의 교회, 영국이라는 나라의 가톨릭 교회를 세운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죽고난 이후입니다.

헨리 8세


헨리 8세가 많은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던 이유, 그가 그토록 원했던 왕자, 결국에는 세 번째 왕비로부터 얻은 에드워드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프로테스탄트식 교육을 받았고, 열렬한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가졌던 에드워드는 헨리 8세의 국교회를 보다 개혁적인 교회로 변화시켰습니다. 이 당시의 주요한 개혁 내용이 바로 기도서의 발간, 성직자의 결혼 허용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톨릭 추종자들이 배제된 것은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병약했던 이 어린 왕은 겨우 열 여섯이라는 나이에 죽고 맙니다.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헨리 8세의 첫 번째 부인의 딸, 메리입니다. ‘Bloody Mary’, ‘피의 메리’라는 별명을 괜히 얻은 게 아니겠지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가 상당했을 것입니다. 메리 여왕은 자신의 아버지 헨리 8세가 세운 국교회를 자신의 어머니 캐서린 왕비의 신앙인 가톨릭 교회로 다시 뒤집습니다. 수많은 국교회의 성직자, 신학자, 신자들이 처형 당하고 박해를 당하는, 말 그대로 피 비린내 나는 공포가 영국을 덮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인지, 메리 여왕은 우울증과 건강 악화로 결국 왕위에 오른지 6년만에 죽고 맙니다.

블러디 메리라 불렸던 메리 1세


그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의 딸, 엘리자베스입니다. 저는 영국 종교개혁의 완성, 오늘날 성공회라고 부를 수 있는 교회가 바로 엘리자베스 여왕 때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길다면 긴 시간, 좁다면 좁은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영국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갈등과 반목으로 크나큰 고통을 축약적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죽이면서요. 바로 이 역사를 통해 엘리자베스 여왕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두 극단을 지양하고, 두 가치가 공유하는 본질 위에 교회를 세우고자 한 것입니다.

이처럼 비아 메디아는 어떤 신학적인 통찰, 신앙적인 성찰을 통해서 어느 한 순간 번쩍이듯 깨달아 알게 된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비아 메디아는 영국이라는 특정 지역과 영국 왕정이라는 특정 시간, 종교개혁이라는 특정 사건 가운데서 얻어진 지극히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산물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비아 메디아가 갈등을 피하기 위한 절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과 저것의 장점만을 모아 합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되어버린 짝퉁, 맹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아 메디아는 아주 명백하고 확실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보편적 진리의 범주, 오직 이 안에서의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비아 메디아가 추구하는 바로 이 보편성을 우리 교회는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서의 가르침은 보편성을 가집니다. 성서는 이집트 노예로 살던 히브리인들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율법과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는 여정과 그곳에서의 정착생활이라는 아주 분명한 특정 시간과 공간, 역사적 사건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한 그것을 뛰어넘습니다. 성서의 가르침은 오늘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지으신 세상의 모든 민족과 나라를 향한 그분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 역시 보편성을 가집니다. 복음은 인종, 성, 종교, 신분, 나이, 그 어떤 경계도 뛰어넘어 세상의 모든 민족과 나라를 향한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사람이나 특정 집단에게만 한정적으로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아 메디아는 우리 교회의 신학적 방향을 제시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 신자로 하여금 어떤 신앙의 태도를 가져야 할지도 가르쳐줍니다. 오늘 2독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사도 바울로가 말하는 교회에 대한 생각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보편적인 사랑의 관계 안에서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룰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오늘 1독서 느헤미야서에는 느헤미야와 에즈라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들은 바빌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향 땅으로 돌아와, 하느님께서 거하실 성전과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율법을 재건하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들 앞에는 커다란 어려움이 있었는데, 무엇보다 그들 내부의 문제,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유다인들과 팔레스타인 땅에 그대로 남겨지고 버려졌던 유다인들 사이의 경계가 그것입니다. 

바빌론 유수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유다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남아있던 유다인들을 보며 죄인이라고 부정했습니다. 이방인들의 종교와 문화, 풍습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방민족 사이에 힘없이 버려졌던 유다인들 입장에서는, 그동안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땅을 지켜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자신들에게 죄인이라고 욕하는 동포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미움과 시기로는 서로 하나가 될 수 없겠지요. 한쪽은 하느님의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다른 한쪽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이들은 하나가 되어갑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루가 복음서의 편집 의도를 생각할 때, 오늘 복음서 구절이야말로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신 이후에 더더욱 단단해지신 예수님은 오늘 갈릴래아 회당에서 첫 선포, 선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들던 사람에게 되돌려주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에게 쏠렸다.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루가 418-21) 

보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예수님의 이사야서 낭독과 이어지는 선언이야말로, 예수님의 굳은 다짐, 의지의 표출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하느님의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누구를 향하고, 누구를 위하는 것인지, 그리스도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온땅에 천명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가난과 질병 역시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죄인은 죄인으로 취급하면 될 뿐, 그들의 사정을 살펴주거나 헤아려주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지만, 유다인들은 그 율법 하나 하나의 조항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쪼개고 찢어 나눈 것입니다.  

나와 다르다, 우리와 다르다는 차이를 인식하고서 그대로 경계를 긋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쉽고 편한 일차적 반응입니다. 저도 그렇고, 이 자리에 계신 교우분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음의 경계를 넘어서, 제도의 장벽을 넘어서, 하느님의 은총을 나누어라! 네 생각이 그것과 다르더라도, 네 느낌이 그것과 맞지 않더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의 보편성 안에 있다면, 그것을 따르라!’

성공회 신자는 ‘비아 메디아’를 살아내야 합니다. ‘비아 메디아’라는 말은 오백년 전 종교개혁으로 쓸모가 다한 말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발간하는 책자나 주보를 장식하기 위해서 쓰는 미사여구도 아닙니다. 비아 메디아가 제시하는 우리의 신학과 신앙을 되새기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의 관계 안에서 함께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공회 신자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어렵지요? 삼박자로 축복해주는 교회도 있는데, 우리 교회는 어려운 말만 합니다. 저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깊은 신앙생활을 하시는 교우분들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신앙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참 어렵고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찌 쉽고 편하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느헤미야와 에즈라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 앞에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 그런 우리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고, 잊혀진 율법을 다시 찾아 정리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 앞에서,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여 그 길을 걸어간 느헤미야와 에즈라처럼, 당신이 겪어내셔야 할 고난 앞에서도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세상을 향해 당신의 사역을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오늘 우리도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의지하여 비아 메디아의 신앙을 다짐하길 소망합니다. 성찬의 전례를 통해 우리가 모실 거룩한 성체와 보혈이 우리의 힘이 되길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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