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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다함없는 사랑의 의무!

by 분당교회 2017. 9. 11.

2017년 9월 10일 연중 23주일 설교말씀

성공회 분당교회 김장환 엘리야 신부

마태오 18:15-20


다함없는 사랑의 의무!


1. 지난 주간에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건들이 연속되었습니다. 북한이 핵  실험을 계속함으로 남과 북의 긴장의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임시라고는 하지만 성주에 사드가 배치되고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평화는 더 멀리 달아나고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하느님의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하게 기도할 때입니다.   


2. 여러분도 충격을 받으셨겠지만,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에 경악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엄중한 책임과 처벌이 따라야 하겠지만, 그토록 그들의 영혼이 무너지게 된 데는, 우리 어른들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성공과 돈만을 추구하는 무한 경쟁 사회에서 생명을 경시하는 가치관으로 가정과 사회가 무너져 버린 것이죠. 이런 사회 속에서 자라난 청소년들의 내면에는 생명을 존중하고 가치를 따르는 양심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3. 이런 잔혹한 사회를 만든 어른들의 모습은 강서구 특수학교 유치를 위한 공청회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학교만 건축할 수 있는 서울교육청 부지에 한방병원을 유치하겠다고 공약한 국회위원. 한방병원이 들어오면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생각에 특수학교 건립을 반대하는 어른들. 장애우들의 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호소하지만, 외면하고 돌아서는 국회위원과 지역 주민들. 너무나 마음 아프고 안타깝기만 한 이 시대 우리의 모습입니다. 


4. 오늘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시대의 가지 가치관과 너무나 다릅니다. 오늘 복음이 있는 마태오복음 18장은 말합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이다.’ ‘너희 가운데 보잘 것 없는 그 누구도 업신여기지 마라.’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 99마리의 양을 두고 찾아 나서야 한다.’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존중과 상생의 가치입니다. 


5.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거나, 손해를 입히거나, 명예를 훼손시키는 일을 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개는 다른 교회로 떠나갈 겁니다. 보기 싫은 사람과 마주한다는 것은 고통이죠.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은 ‘갈등 회피의 심리’가 강해 외면하고 맙니다. 


6.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남선교회 회장을 했던 형제가 있습니다. 남선교회 행사로 바다낚시를 추진했었습니다. 8명이 가기로 약속해서 계약금을 보내고 당일이 되었는데, 출발 시간에 4명만 나온 겁니다. 2명은 전 날 저녁에 사정이 생겨 못가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럼 6명이라도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2명 중 1명은 당일 새벽에 못 간다고 문자만 보내왔고 한 명은 문자도 없이 나타나지 않은 겁니다. 남선교회 회장은 화가 나서 행사를 취소하고 계약금을 날려버렸습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7. 사태를 파악한 저는 즉시 형제를 만났습니다. 얘기를 다 듣고 위로하고 권면했습니다. ‘그렇게 상처받아 떠나버리면 당신은 편하겠지만, 교회는 그만큼 병들게 된다. 병든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없고 성장할 수 없다. 힘들어도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에 헌신해라!’ 감사하게도 형제가 제 권면을 받아들였습니다. 용서하고 화해하기까지 1년이 걸렸지만, 그 덕분에 형제나 교회가 더 성숙해지는 영적인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8. 오늘 복음은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어려움들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호환, 마마 같은 것들이 무서운 것이었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습니다. 관계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지침이 있다는 건, 이미 초대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은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를 보십시오. 파벌, 법정 소송 등 갈등으로 아파했습니다. 교회를 너무 이상적으로 바라보고 거룩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교회는 그저 “구원받은 죄인들의 모임”일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갈등을 극복해 갈 때, 성숙해지는 주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9. 15절에서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라’고 합니다. 뒷담화하지 말고 분을 품고 따지지도 말고 ‘내가 너의 이런 언행으로 힘들었다. 고쳐줬으면 좋겠다.’고 대화하며 화해를 도모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말을 듣지 않으면 16절,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그가 행한 잘못을 확인하고 화해를 도모하라’고 합니다. 


10. 그래도 듣지 않으면 17절, ‘교회에 알리라’고 합니다. ‘교회에 알리라’는 말은 공동체 전체에 폭로하라는 말이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에게 화해를 위한 죄치를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가 그에게 권면하고 그래도 안 되면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합니다. 


11. 보면, 상처 입은 사람의 수고가 대단해 보입니다. 그저 공동체를 떠나버리면 그만인데, 주님은 화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권면하십니다. 18장 문맥을 보면, 이렇게 권면하시는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 보입니다. 오늘 복음 앞에 ‘길을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가 나오고 오늘 복음 바로 뒤에는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의 마음은 주님이 부르시고 하나되게 하신 공동체에서 한 지체라도 실족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12. 상처 입은 사람이 오늘 주님의 권면처럼 행하려면 선행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만나 대화할 수 없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 용서를 결단하고 화해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 부어지기를 축복합니다. 


13. 여기서 잘못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끝내 교회의 권면까지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실제 유다인들이 이방인이나 세리를 대하듯이 왕따 시키라는 말일까요? 그런데 이 구절의 헬라어 원문을 그대로 번역해보면, “너에게 있어,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입니다. 유다인들은 이방인과 세리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지만, ‘너’ –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인  ‘너’는 유다인들처럼 하지 말고 ‘나’ – 예수처럼 하라는 말씀입니다. 


세관에 있는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는 예수


14. 예수님은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세리장’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 머무셨습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이방인; 여인을 만나 대화하셨습니다. 그녀에게 생수를 부어주셨습니다. ’이방인‘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방인‘ 백부장의 청을 들어 하인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인종적인 편견도, 직업적인 편견도, 그 어떤 편견도 없이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15. “너에게 있어,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씀은 끝내 너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 사람을 예수님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영영 깨달아 알지 못하는 그 모습이 그의 연약함임을 알고 그를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용납’이라고 말합니다.  


16. 주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던 때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로마서 15장 7절,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여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주님이 용납하여 주신대로, 서로 용납하십시오.’ 공동체 생활에서 가장 성숙한 영성의 표현은 “그려려니”라는 말입니다. 


17. ‘용서’와 ‘용납’을 통해 ‘화해’하고 하나 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 개인이나 공동체는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용서’와 ‘용납’은 오늘 서신 로마서가 말하는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입니다.” ‘용서’와 ‘용납’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행할 수 있는 사랑의 의무입니다. 


18. 그래서 오늘 복음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우리 성공회 분당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 용서하고 용납함으로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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