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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사탄이 될 수도

by 분당교회 2017. 9. 5.

2017년 9월 3일 연중 22주일 설교말씀

성공회 분당교회 김장환 엘리야 신부

마태오 16:21-28

사탄이 될 수도


맑은 하늘, 열매를 영글게 하는 강렬한 태양빛이 비치는 장하의 계절, 9월입니다. 이 9월에 우리교회에도 새로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어제는 조아가타 기금으로 음향 설비를 교체했습니다. 조아가타 기금이란, 전에 섬기던 제자교회 신자 셨던 조언길 아가타님이 별세하시면서 자손들이 우리 분당교회에 필요한 것을 구입하라고 봉헌해 주신 헌금 400만원입니다. 음향 설비를 위해서 수원교회 교우 두 분이 시장 조사하시고 구입해오시고 어제 밤까지 설비공사까지 해주셨습니다.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시는 하느님께, 아가타 교우의 후손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이번 주 중에는 지안드레 기금으로 오르간을 교제합니다. 지금 사용하는 오르간은 성가수녀원이 오르간을 교체할 때 얻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십 년이 된 거죠. 그래서인지 몇 개의 건반이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안드레기금으로 좋은 중고 오르간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윤지상 위원과 반주자 서하나님이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요한교우님이 9월은 우리 분당교회에 “소리의 계절”이라고 하셨는데 적절한 말씀입니다. 음향 오르간, 소리에 관계된 일들을 진행하는 이유는 하느님께 최선의 예배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우리 분당교회가 좋은 소리 가운데,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하는 공동체로 되기를 원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누리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냉담자 장기결석자들이 예배자로 회복되는 은혜를 기도합니다. 


또 9월에는 지역선교를 위해서 프로그램을 시작합니다. 주보 사이에 홍보물을 넣어놨습니다. 판교평화영성센타라는 이름으로 “에니어그램과 집단상담, 마음공부” 우선 두 개의 강좌를 개설합니다. 아주 유익한 강의들입니다. 주변에 많은 분들에게 알려주시고, 필요한 분들이 강좌에 오셔서 건강한 삶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시민강좌나 유익한 강좌들을 개설할 계획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건, 성공회 – 참 좋은 교회인데, 이곳에 이 좋은 성공회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 우선은 교회 홍보가 일차적인 목적입니다. 그리고 유익한 강의와 프로그램으로 유인물에 있듯이 “건강한 자아와 건강한 사회”를 세워가는 선교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북카페를 만들기로 했는데.... 가까이 판교도서관도 있고, 근처 큰 교회마다 카페도 있고 도서관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 중에 비어있는 이 공간에 사람들이 한 명이라도 와서 쉬고 기도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북카페를 운영합니다. 그 한명이 우리 분당교회 교우여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회 중심으로 자원봉사자를 조직하는데 동참해 주시고 또 집에 있는 깨끗한 양서를 기증해주시기 바랍니다. 일차로 19일 애찬 후에 책장 정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 복음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지난 주일을 복음을 기억하시는지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주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대답을 칭찬하시면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주님의 비전을 선포하셨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살아내고 보여주며 전수하는 공동체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세워가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은사로 섬기는 여러분의 헌신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 하신 때가 예수님 사역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고백 이후 무대는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면서 자신이 죽고 부활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반드시” 죽고 부활하셔야 하는 걸까요? 우리는 성찬기도 중에 신앙의 신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사람들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길이 십자가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주인이신 하느님의 자리를 찬탈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자신이 주인되어 살아가는 삶의 태도와 자세를 죄라고 합니다. 죄의 값은 죽음입니다. 하느님은 그 죄를 용서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 새 창조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구원을 이루어 갑니다. 오직 십자가의 죽음만이 하느님과 화해하는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이루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며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하며 ‘말리었습니다.’ ‘그런 일’이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하느님의 일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일까요? 당대에 유다인들이 가진 메시야관에 기초한 자신의 욕망 때문입니다. 당대 유다인들은 메시야가 와서 로마의 압제를 물리치고 다윗왕처럼 위대한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말리었다.’는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개역성경은 “예수를 붙들며 항변했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 지금 도대체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호통을 쳤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제자들의 공통된 입장이었습니다. 


마태오복음 20장 20절, 21절을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예수께 왔서 청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무엇인가를 청할 양으로 엎드려 절을 하였다.  예수께서 그 부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은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베드로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지금은 졸지에 사탄이 되었습니다. 사탄의 하수인이 된 것입니다. 


사탄이란 대적자라는 의미로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그가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사탄이 됩니다. 


지금 예수님께 “하느님의 일”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죽은 일입니다. 그것이 인류를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10:45,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셨다. “사람의 일”은 베드로를 대표해서 제자들이 보이고 있는 자기의 욕망을 따르는 일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개역성경으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자기 부인”“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동어 반복 강조법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렇게 적용합니다. 갈라디아 5장 23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복음 말씀대로 사는 일에 있어 문제는 ‘무엇이 하느님의 일이고 무엇이 사람의 일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말씀을 보면, 하느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전수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실천 지침이 나옵니다. 말씀 그대로가 하느님의 일입니다. 말씀 몇 구절만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10절,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다투어 서로 남을 존경하는 일에 뒤지지 마십시오.” 

14절,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어주십시오.” 

16절, “서로 한마음이 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천한 사람들과 사귀십시오. 그리고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21절,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십시오.” 

묵상하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요? 이렇게 사랑하며 사는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느님 일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오늘 1독서가 보여줍니다. 오늘 1독서에 나오는 모세는 히브리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해방시켜내는 하느님의 일을 행하라는 사명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세는 자신을 바라봅니다. “제가 무엇인데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내겠습니까?” 당연한 반응입니다. 80세 늙은 미디안 광야 목동 모세가 절대권력 파라오와 맞서 히브리 노예들을 이끌어내는 일 불가능합니다. 


그 때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말씀해주십니다. “나다” “나는 지금 너와 함께 하고 있는 하느님이다.” “너를 부른 이도 나고 너를 보낸 이도 나도 너와 함께 하는 이도 나 야훼이기에 나와 동행하면 하느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그분의 일을 맡기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 일에 순종함으로 하느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하느님의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이후로는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요한 14장 16절, 17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할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성령님이시다. ...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다.” 


그래서 저는 일상 가운데, 자주 성령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분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나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일로 알아차리는 그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나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라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묻는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잃지 않으며 어떤 고통과 시련도 견뎌 낼 수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 보라. 예상치도 않았던 힘이 솟아나게 될 것이다.“ 


예배는 사랑하는 주님의 이름을 마음껏 부르며 찬양하고 기도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 성령님이 주시는 힘과 지혜를 충만하게 받으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이 한 주간에도 성경을 묵상하며 나와 우리 공동체에 원하시는 하느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시고,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나는 나다” 하느님 성령님을 부르시며 하느님의 일을 기뻐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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