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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685

2007년 9월 13일(목) 강론초고 (황금률- 사랑의 기초) 황금율- 사랑의 기초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줄이면 ‘박애(博愛)’, 사랑이라고 합니다.예수님은 613가지 율법조항을 단 두가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하셨지요. 그런데 그 사랑은 전제 또는 근거가 되는 것은 바로 황금율, 즉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는 말씀입니다.사랑은 참 좋은 것이지만 사실 모든 고통은 사랑에서 생깁니다.사랑이라지만 실은 애욕, 애착일 수 있습니다.경험하거니와 실제로 사랑하는 일은 그저 기쁨만이 아니고 고통과 슬픔을 동반합니다.그래서 사랑에는 진리가 요구되고 분별이 필요하지요.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들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바울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무작정한 희생이 사랑의 내용이 아닌 것이죠.분별의 시작이 바로 나와 남의 올바른.. 2007. 9. 20.
2007년 9월 12일(수) 강론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는 참 생명, 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는 참 생명, 나!저를 포함하여 많은 신자들은 사실 “뭘 모르는 게” 아닙니다. 실은 이것 저것 대강은 다 압니다. 고상한 이야기도 알고 통속한 이야기도 알고, 하늘의 가르침도 알고 땅의 현실도 압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에 집중할까에 있습니다.본래 우리의 삶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경험은 참 사람 예수님께서도 절감하신 바입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바울로 사도는 인정합니다.오래 믿음 안에서 교제한 우리의 교우들 마저도 특정한 사안에 대하여 제가 권면하는 말을 반박하지는 않지만 내심 그건 “(교회내에서만.. 2007. 9. 20.
2007년 9월 11일(화) 강론초고 (예수가 '신화'가 아닌 까닭) 예수가 '신화'가 아닌 까닭 몇 년 전에 “예수는 신화다” 라는 제목의 베스트셀러 책이 있었습니다. 기독교계의 압력 때문에 절판되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과격한 주장의 내용이었지요. 초기 기독교의 시대와 지역을 살펴볼 때 지중해 연안에 보편적이었던 각종의 “신화”들과 그리스도교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읽어보면 공감이 가는 내용이 적지 않은데, 정작 문제는 그 사실관계 자체보다도 그를 통해 “예수는 신화다”라고 단정한 저자들의 결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독보적이고 유일한 역사적 인물이라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 신앙의 중요한 기반인데 예수님을 한낱 신화로 단정 지으면 따라서 그리스도교 전체가 인공적이고 허구적인 가공물에 지나지 않는가 하고 의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스스로.. 2007. 9. 20.
2007년 9월 10일(월) 강론초고 (하느님의 심오한 진리인 그리스도) 하느님의 심오한 진리인 그리스도“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입니다.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정보를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진실을 경험하고 살고 전하는 것입니다.“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는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그 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뜻과 행동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그 풍부한 경험과 고백의 내용을 살피지 않으면 그저 “X 는 Y 이다” 라는 명제의 틀만 남게 되고 제멋대로 X 와 Y 의 자리에 아무 내용이나 들이대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그러므로 신자는 어째서 예수가 그리스도인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주관적인 고백으로 내게 예수가 그리스도인 까닭을 전할 수 있어야 하죠.객관적인 증언으로.. 2007. 9. 20.
2007년 9월 9일(연중 23주일) 설교 (루가14:25-33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우리 가운데 맑고 깨끗한 믿음을 ! (루가 14:25-33)언제부터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그다지 명예롭지 않게 되었습니다. 수십 년간 교회와 신자들이 보여준 삶의 모습이, 그리스도인들이 도대체 무슨 가치를 따라 사는 사람들인지를 헷갈리게 만든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독선적인 믿음을 무기로 삼아, 모든 상식을 초월하여, 자기와 교회집단의 욕심을 채우려는 인간들로 보여진다면 얼마나 참담한 불행입니까? 두렵고 두려운 일입니다.본래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느님나라’를 향해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교리적 독선과 아집이 아니라, 십자가 지는 삶의 선택이요 순종입니다. 상식을 무시하는 몰상식한 이들이 아니라, 고정관념과 이기주의를 초월하는 지혜로운 이들입니다. 교회는 욕심을 채우.. 2007. 9. 9.
2007년 9월 8일(토, 성모탄신) 강론초고 ( 주님과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 주님과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에 대하여는 논란이 적지 않다. 예수님께서 참 사람인 동시에 참 하느님이신 분으로 고백되는 까닭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그 위상이 신비롭게 논의되는 것이다. 참 사람이신 면에 촛점을 두면 마리아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 평범한 여인이어도 충분하다. 참 하느님이신 면에 촛점을 두면 마리아는 천주의 모친, 보통의 여인일 수가 없는 것이다. 마리아의 위상을 말할 때 개신교는 전자, 천주교는 후자의 입장을 택한다. 어찌되었든 결국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은 분명하다. 마리아는 스스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중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가 아니 계시면 그리스도교 신앙이 불가능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 2007. 9. 8.
2007년 9월 7일(금) 강론초고 (그리스도의 평화, 새술에 취하라!) 그리스도의 평화, 새술에 취하라! 그리스도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평화다. 골로사이서가 노래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림으로써 하느님과 하늘과 땅의 만물을 화해시키셨다는 것이다. 무슨 말씀일까? 하느님과 만물은 어찌하여 사이가 나빠졌는가? 말하자면 만물이 배은망덕 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만물 중에서도 영장(靈長)인 인간이 배은망덕 했기 때문이다. 하느님 입장에서는 배은망덕이지만 인간 입장에서는 자수성가(自手成家)인 것이다. 그냥 경험에 비추어봐도 가치지향 없이 돈이나 권세나 명예를 얻은 자수성가자들은 대체로 인색하고 잔인하고 독선적인 경향이다. 진짜 성공한 인생은 물론 가치를 따라 살면서 모두를 위하여 돈과 명예와 권세를 방편으로 얻고 사용한 사람들이다. 좌우간 인간의 자수성.. 2007. 9. 7.
2007년 9월 6일(목) 강론초고 (예수님의 '깊이'에서 만나자) 예수님의 ‘깊이’에서 만나자 10년 전쯤에 어느 교회에서 청년회 성경공부를 인도했었다. 지금 내 성경 공력의 80% 이상이 그 때 쌓여진 것이다. (잘 배우려면 가르치는 일을 맡는 길이 제일 효과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쓸데없는 이론이 장황한 편이어서 그다지 재미있는 공부시간이었다고는 할 수 없었겠다. 그래서인지 성경 공부 때마다 스스로 ‘평범’함을 온몸으로 보여주던 한 청년이 어느 날 눈이 빤짝빤짝해서 나타났다. 그동안 무거웠던 입을 열어 이제 비로소 ‘자신의 소명’. ‘인생의 의미와 삶의 자세’에 대해서 알게되었다는 것이다. 놀라 들어보니 나의 심오한(!) 강의를 통해서가 전혀 아니라 그 유명한 ‘다단계 합숙훈련’을 통해서 깨우친 것이었다. 한 사람의 변화에 대하여 교회와 복음이 다단계회사의 .. 2007. 9. 6.
2007년 9월 5일(수) 강론초고 (복음을 사지말고 복음을 살자) 복음을 사지 말고 복음을 살자 영적인 능력은 금식과 기도로 얻는 것일까? 식탐이 많은 나는 도무지 영적인 능력이 없는가 보다. 내가 듣기에 티브이에 나오는 대형교회 유명 설교자들 설교는 도저히 참고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천박하기만 한데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몰려드니 참 알 수가 없다. 당대 최신, 최선의 말씀 해석이라고 자부하는(혹은 착각하는^^) 내 설교는 도무지 은혜받았다는 이가 없는 것이다.에바프라를 통해서 골로사이에 전해진 복음은 많은 열매를 맺었다. 바울로는 그것을 감사하며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냥 말씀이 아니었다. 병을 고치고, 악귀를 쫓아내고,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는 능력이었다. 예수님이 무엇하러 오셨는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러 오셨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십.. 2007. 9. 5.
2007년 9월 4일(화) 강론초고 (살아있든지 죽어있든지) 살아있든지 죽어있든지 성경을 읽으면서 이른바 초자연적인 기사를 대하면 당혹스럽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미루어 짐작이 되지만 마귀들린 사람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 예수님은 그 마귀를 쫓아내셨다는 기사는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귀, 악령은 실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악한 일, 추한 일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일까요? “성령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악령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습니다만...전기불이 들어오고 나서 그 흔했던 시골의 '도깨비'가 몽땅 사라졌다는 주장도 있습니다.^^저는 아직 사제로서 (좁은 의미의) 축마, 축귀 의식의 경험이 없습니다만, 우리 성공회 공동체내에 신뢰하고 존경할 만한 신부님들께서는 실제로 축마의 경험.. 2007. 9. 4.
2007년 9월 3일(월) 강론초고 (예언자의 길) 예언자의 길 철 지난 쟁점이지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개인영혼”과 “사회구조”중 어느 것을 대상을 하는가 하는 물음이 있었습니다. 물론 성공회적인 답은 “둘 다” 이지만^^, 저를 포함해서 우리 성공회 사람들은 그 귀한 중도, 통합의 정답을 그만한 고민의 과정 없이 대충 머리로 내어놓고 만족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개인영혼에 대한 관심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자기의 신원을 소멸하는 육체가 아닌 영속하리라고 기대되는 영적 실체인 영혼에서 확인하려는 시도입니다. 사회구조에 대한 관심은 삶의 고통에서 비롯합니다. 절대로 공평하신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몫을 불의한 세상 탓에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억울함을 하느님께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기 전에 우리들의.. 2007. 9. 4.
[설교] 2007년 9월 2일(연중 22주일) 설교 (루가 14:1,7-14 낮은 자리에 앉아라)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서 체득하는 겸손 (루가 14:1,7-14) 높은 자리, 한 자리를 바라는 것은 동서고금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욕망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이유도 결국은 장차 예수님이 왕이 되실 때 한 자리를 얻으려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고 성경은 정직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장면에서 ‘윗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드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인들과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스스로 동의하기 이전에 이미 밖에서 강요되는 타율적인 통제의 힘이 강력하면, 사람은 스스로 자기 내면을 살피고 정화, 성숙시키기 보다는, 밖으로 보여지는 것들을 통해서 자기 신원(身元)과 사회 속의 안전(安全)을 확인하려 들게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 2007. 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