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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7년 9월 12일(수) 강론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는 참 생명, 나!)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9. 20.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는 참 생명, 나!

저를 포함하여 많은 신자들은 사실 “뭘 모르는 게” 아닙니다. 실은 이것 저것 대강은 다 압니다. 고상한 이야기도 알고 통속한 이야기도 알고, 하늘의 가르침도 알고 땅의 현실도 압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에 집중할까에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삶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경험은 참 사람 예수님께서도 절감하신 바입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바울로 사도는 인정합니다.

오래 믿음 안에서 교제한 우리의 교우들 마저도 특정한 사안에 대하여 제가 권면하는 말을 반박하지는 않지만 내심 그건 “(교회내에서만 유효한) 신앙용 언어와 판단”이야 하며, 정작 자신들의 실제 삶은 “(세상에서 통하는) 자신들의 현실적인 감각과 판단”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것이라는 게 바울로 사도의 이해입니다. 이제 “이 따위 것”(이 땅위의 것, 이 세상의 것; 유영모 선생의 표현)에 연연하지 말고 저 위의 것, 하늘의 것을 구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참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된 지식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나는 문득문득 죽음이 두렵습니다.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갈 확신이 없어서 일까요? 아니, 그것은 그런 종류의 확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의 문제가 그렇게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번민하며 기도하셨던 예수님”은 “악법도 법이라며 태연히 독배를 든” 소크라테스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요?

죽음의 두려움은 삶의 어려움과 같은 문제입니다. 도대체 살고 죽는 “내가 누구인가”의 문제입니다. 절대자 앞에서 이 깜박이는 것 같은 생명이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기쁨은 슬픔을, 쾌락은 두려움, 행복은 불행을 배경으로 일렁입니다. 사는 일이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소명’, 그 깊은 의미와 가치로 채워지지 않으면 인간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가끔 나는 실패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좀 더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생이었을 텐데... 후회 하다가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라 “완벽한 조건” 속의 나라면 어떨까 하고 상상을 해봅니다.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돈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고 건강은 걱정할 것 없고 인간적 매력도 철철 넘칩니다. 아무런 근심 걱정없이 그저 즐겁고 행복한 하루하루 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어떻다는 것이죠? 나의 환경과 조건이 달라진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죠? 실제로 나는 그저 나일뿐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덧없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습니다. 내게 소중한 것은 나의 연약함, 어리석음, 게으름, 실패, 고통, 슬픔, 두려움 모두를 포함하는 나의 인생 자체라는 걸! 나는 나의 인생 여정을 통해서만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모든 곤란은 배움의 기회입니다. 모든 고통은 깨우침의 계기입니다. 나의 삶 자체가 바로 나의 하느님을 경험하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된 지식을 갖게 되는 것, 곧 내가 참 내가 되는 것이 사는 이유입니다.

나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저는 이 진리를 온 몸으로 깨치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믿음으로 은총을 구하며 붙잡는 진리입니다. 내가 죽을 때 기꺼이 감사하고 웃으며 죽음을 넘어가 하느님 곁에서(다른 차원에서) 참 나를 발견하고는 달려가 인사하고 우리가 본래 하나임을 기뻐하며 포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미지가 상상이 되시나요?^^)

부요한 이들, 배부르고, 웃고, 칭찬받는 이들은 자기 만족에 머무르기 쉽습니다.

절대자 하느님의 존재가 아쉬울 리 없습니다. “모든 이에게 자비하신” 하느님의 위로가 그리울 리 없습니다. “모든 이에게 공평하신 ” 하느님의 진리가 달가울 리 없습니다.

“천상의 것”들은 우주 공간 저 너머나, 죽음 저편 저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이 세상에서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을 찾고 깨닫고 만납니다. 우리가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늘에 살고 있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지금 무엇을 욕망합니까?그 무엇이 하느님과 내가 함께 하는 이 고유한 삶을 대신할 수 있습니까?

가난과 굶주림과 슬픔과 시련과 고통이 전혀 없었더라도
과연 우리가 자비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사랑과 능력이신 하느님을 찾고 만날 수 있었을까요? 적어도 저는 하느님을 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인생을 살았을 게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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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12일 감사성찬례 성서말씀

골로 3:1-11

1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1)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시편 110:1.

2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3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5 여러분은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죽이십시오. 음행과 더러운 행위와 욕정과 못된 욕심과 우상 숭배나 다름없는 탐욕 따위의 욕망은 6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진노를 살 것입니다. 7 여러분도 전에 이런 욕망에 빠져 살 때에는 그런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8 그러나 지금은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비방과 또 입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운 말 따위는 모두 버려야 합니다. 9 그리고 거짓말로 서로 속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버렸고 10 새 인간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11 여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다인, 할례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 타국인, 야만인, 노예, 자유인 따위의 구별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전부로서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십니다.

루가 6:20-26

20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21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25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

26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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