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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7년 9월 7일(금) 강론초고 (그리스도의 평화, 새술에 취하라!)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9. 7.
그리스도의 평화, 새술에 취하라!


그리스도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평화다.
골로사이서가 노래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림으로써
하느님과 하늘과 땅의 만물을 화해시키셨다는 것이다.
무슨 말씀일까?

하느님과 만물은 어찌하여 사이가 나빠졌는가?
말하자면 만물이 배은망덕 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만물 중에서도 영장(靈長)인 인간이 배은망덕 했기 때문이다.
하느님 입장에서는 배은망덕이지만 인간 입장에서는 자수성가(自手成家)인 것이다.

그냥 경험에 비추어봐도
가치지향 없이 돈이나 권세나 명예를 얻은 자수성가자들은
대체로 인색하고 잔인하고 독선적인 경향이다.
진짜 성공한 인생은 물론 가치를 따라 살면서 모두를 위하여
돈과 명예와 권세를 방편으로 얻고 사용한 사람들이다.

좌우간 인간의 자수성가는 양면성이 있다.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
핵심은 인간의 ‘주체성’ 각성이 하느님을 잊고 하느님을 떠나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때 하느님은 ‘전체성’을 상징한다.

만물(萬物)이 전체성을 잊고 개체성을 주장하면 고통스런 것이다.
암세포와 이기적인 인간이 대표적인 예이다.
개체성을 말살하고 전체성을 강조하는 악덕(전체주의)에 인간들이 도리어 매력을 느끼는 것은 개체성을 강조할 때 겪게 되는 고독과 소외를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체와 개체는 서로 닮고 서로 경쟁한다.
협력이 지혜로운 일이건만 싸움(전쟁)이 보통이다.
대립하는 양자 사이의 갈등과 전쟁은 그칠 수 없다. 그 때 희생양이 필요하다.
구약의 제사는 희생양을 잡아서 이룬 하느님과의 화해, 인간들 사이의 화해였다.
희생양에게 인간의 죄를 전가시켜서 잔인하게 죽이고 태움으로써
인간 상호간의 폭력성을 승화하고 상호 보복을 회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희생양 제도가 인간의 이기적 공격성 자체를 없애주지는 못한다.
도리어 이기적공격성을 인정하고 조장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 당대의 성전 시스템, 율법 시스템이 모두 실은 사회적 약자를 여전히
희생양으로 삼아 기능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예수님의 선포와 가르침과 사역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사회적 약자들, 곧 죄인들인 희생양을 예수님은 적극 편드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희생양들의 희생이 더 이상 당연한 게 아니라는 가르침이었다.
예수님은 스스로 희생양 중의 희생양,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어서
하느님의 심판을 빙자한 인간적 보복의 악순환을 끝내고
동시에 끝없이 희생양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는 옛 종교를 끝장내었다.
“예수님께서 단 한 번 자신을 온전한 희생제물로 드려서 하느님과의 완전한 화해를 이루어주셨다”는
히브리서의 견해가 명쾌하지 않은가?

이제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신다는 것은
희생양이 되신 예수님이 단순히 억울한 개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만물을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말하자면 하느님과 인간이 둘이 아님을
즉 인간의 개체성과 하느님(전체성)이 합일하는 길을 몸소 걸으신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부활의 신비는 십자가의 희생양 예수가 곧 만유의 주님이심을 깨닫는 일이어서
부활을 고백하는 일은 더 이상 남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이 오늘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기뻐하고 자원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상은 르네 지라드의 희생제의(犧牲祭儀) 이론을 듣고 반영하여 해석한 것이다.)

물론 그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감당 하시는, 아니 먼저 감당하시는 희생이다.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에서 그리스도는 스스로를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과 동일시한다.
이 비유말씀은 단순히 구원을 얻으려면 보잘것없는 이로 변장한 예수님을 눈치빠르게 알아채고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인간의 모든 희생적인 고통, 사회적 약자의 가난과 억울함에는 원조 희생양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이 이룬 것이 곧 그리스도의 평화이다.
이것은 단순히 고통과 수난을 참고 견딘 것에 초점이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느님과 만물의 화해를 이룬 일에 가치가 있다.

서두의 표현을 빌면 자수성가한 인간이 자신의 성취가 혼자 이룬 일이 아님을
깨닫고 모든 재산을 기쁘게 사회환원하는 일이다. 군부의 위협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성찰로 감사와 찬양을 아는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무모한 도전이거나 무의미한 자포자기가 아니었다.
하느님의 생명, 곧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사건(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인간은 이제 하느님과 둘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인간은 이제 만유가 나와 둘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만유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오늘 복음서에 주님이 말씀하시듯이
참된 희생은 종교적인 제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엄연한 삶의 문제이다.
먹고 마시고, 단식하는 일은 구분되는 영역의 일이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서 하느님과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희생이 자신과 모두의 구원임을 깨닫기 어렵다.
나의 강력한 힘으로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일이 훨씬 편하고 익숙하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이 영원한 희생양으로 남아주길 원한다.
나더러 희생양이 되라고? 희생양이 안되려고 예수를 믿는 건데 무슨 소리야?
예수님이 알아서 또 한 번 희생양이 되시던지,
아니면 내 적들 가운데서 희생양을 찾아주시겠지 하는 마음이 우리 마음이기 쉽다.

새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을 수는 없다는 주님의 말씀이다.
사랑과 자기 희생으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 그 구원의 새 포도주를
여전히 힘과 타인 희생을 의지하는 옛 종교의식의 일부로 여길 수 없다.

오늘 우리가 성체성사 가운데 보혈을 마시거든
그리스도의 평화, 그 새포도주에 황홀히 취할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실은 그 술기운으로^^ 살아가는
사랑과 축제의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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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7일 감사성찬례 성서말씀

골로 1:15-20
15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16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
18 그리스도는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습니다.
19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20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루가 5:33-39
33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 "요한의 제자들은 물론이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제자들까지도 자주 단식하며 기도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합니까?" 하며 따지자
34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잔칫집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그들을 단식하게 할 수 있겠느냐?
35 이제 때가 오면 신랑을 빼앗길 것이니 그 때에는 그들도 단식을 할 것이다."
36 그리고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못쓰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새 옷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그리고 새 술을 헌 가죽부대에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릴 것이니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는 못쓰게 된다.
38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39 또 묵은 포도주를 마셔본 사람은 '묵은 것이 더 좋다.' 하면서 새 것을 마시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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