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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하느님 나라를 경험하는 참된 믿음!

by 분당교회 2020. 8. 16.

2020년 8월 16일 연중 20주일

한반도 평화통일 기도주일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신부

마태 15장 21절-28절

 

성당 안으로 햇살이 비치네요. 이렇게 긴 장마가 끝났습니다. 반갑지만 마음은 무겁습니다. 이상기후로 인한 우기와 같은 장마였다는 의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와 긴 장마는 지구가 인간들에게 던지는 경고장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나라 중에 하나로, 기후환경 깡패 국가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환경 보전을 위한 개개인의 실천이 소중하지만, 미래 세대를 위한 녹색 정책들이 시급하기만 합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상황입니다. 주범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무서워요!’라고 단 댓글을 보고 너무 미안하고 속상했습니다. 모범이 되고 희망을 주어야 하는 교회가 무서움을 주는 기피 집단이 되었습니다.

 

대다수 한국 교회들은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일부 몰지각한 교회로 인해 한국 기독교 전체가 욕을 먹고 있습니다. 그 일부 교회들은 특징이 있습니다. 그릇된 신앙을 가르치는 이단적인 집단들이라는 것입니다. 

 

가까이 용인 우리제일교회는 방언을 기독교 신앙의 전부인양 가르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 장로교 백석교단에서 이단 판정을 받았습니다. 자기 교회는 코로나도 걸리지 않는다고 황당한 설교를 합니다.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찬양하며 예배드리고, 교인들끼리 애찬을 나눴으니 이렇게 몰지각한 집단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설교한 목사도 코로나에 감염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제일교회는 이단적인 교회의 원류인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의 주장을 추종하는 교회입니다. 전광훈 목사도 자기 교회는 코로나 걸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확진자가 무더기로 나오고 있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코로나 증상이 있는 교인들에게 지금 검사 받지 말고 3일 후에 받으라고 했습니다. 검사 받으면 다 양성으로 판정을 내려서 교회 활동을 차단할 것이다. 검사받지 말고 8.15집회에 나와야 한다고 선동하는 것입니다. 

 

사랑제일교회와 우리제일교회가 사회에 해를 끼치는 일에 누가 제일인가를 다투고 있습니다. 신천지와 다름없는 사회악입니다. 전광훈목사가 코로나19의 헬게이트를 열어 버린 것 같습니다. 이런 교회를 보고 아니,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집단이라고 하죠. 사람들은 ‘미친 거 아냐’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미친 사람들입니다. 광신도들인 것이죠. 

 

이런 신자들을 만들어낸 목사들이 제일 큰 문제이고, 그 목사말만 믿고 따라가는 신자들도 큰 문제입니다. 성서만 제대로 읽어도 이런 집단에 빠지지 않을 텐데 그저 목사말만 듣고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으니 한심하고 불쌍합니다. 

 

이렇게 그릇된 믿음에 빠지면, 개인의 인생만이 아닌 가정과 사회가 받게 되는 피해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릇된 믿음에는 미신 광신 맹신이 있습니다. 없는 것을 믿는 미신, 덮어놓고 무조건 믿는 맹신, 그리고 자기 멋대로 믿는 광신.

 

코로나19 시대에 사회에 해를 끼치는 집단으로 드러나고 있는 교회들은 이런 그릇된 믿음들로 뒤범벅된 집단들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이 하신 일,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그 진리 위에 서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니, 28절에서 예수님은 여자를 향해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고 칭찬하시고 여자의 소원대로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인정한 여자의 믿음이 바른 믿음일 것입니다. 그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예루살렘에서 율법학자들과 정결법 문제로 논쟁 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 띠로와 시돈으로 가셨습니다. 띠로와 시돈은 이스라엘 위 북쪽 해안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고대에 해상 무역으로 매우 발달한 도시였고, 이방인들의 도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방 지역인 띠로와 시돈에서 믿음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가나안 여자이었습니다. 같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마르코복음에서는 이 여자를 헬라인으로 시로페니키아 출생이라고 소개합니다(7:26). 

 

그런데 마태오는 굳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토착민들을 경멸하는 투로 말할 때 사용하는 ‘가나안 사람’으로 기록했습니다. 아마도 나중에 이 여자의 믿음을 드러내기 위한 편집자의 의도로 보입니다.

 

22절, 그 여자가 예수님께 나와 큰 소리로 간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여자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까요? 

 

그런데 바로 앞 14장에서, 측은지심으로 사람들을 환대하시며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이 이 여자의 간절한 호소를 외면합니다. 23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23절이 “그러나”로 시작하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예수님은 대꾸하지 않으시고 여인은 계속 부르짖으니,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 여자를 돌려보내시라고 요청했습니다. 빨리 고쳐주시고 돌려보내라는 요청입니다. 이 때 비로소 예수님이 입을 여시는데 그 말이 도대체 이해되지 않습니다. 24절, “예수께서는‘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여기서도 우리가 보는 공동번역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원문에는 24절 예수님의 대답 앞에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24절의 말씀은 이미 10장 6절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태 10:6,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예수님은 인종적으로 유대인으로 오신 하느님입니다. 선민이었던 유대인들 가운데서 하느님 나라의 운동을 다시 시작하시어, 그들을 통해 전 세계 모든 열방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 전도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을 배제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에서 유대인이 먼저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근거는 마태오가 그의 복음서를 열방을 향한 선교 명령으로 마치기 때문입니다. 마태 28:19-20,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다른 한편, 지금 이 상황 가운데 예수님이 기대하는 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테스트하시는 것입니다. 여인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25절,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이만하면, 사랑의 예수님이 여인의 청을 들어줄 만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차갑게 말씀하십니다. 26절,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하며 거절하셨다. 여기서도 26절로 이어지는 25절 끝에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사용됩니다. 

 

유대인들은 종종 이방인들을 개로 불렀습니다. 개 같은 이방인! 이 정도 말까지 들었으면 여인도 포기할만합니다. 제가 이런 상황에 있다면 욕이나 실컷 퍼붓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27절을 보십시오. “그러자 그 여자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이 여자의 말로 모든 상황이 종료됩니다. 28절,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이 말씀을 듣기까지 세 번의 ‘그러나’가 있었습니다. 여인이 간절히 호소하지만 ‘그러나’ 아무 말 없는 예수, 제자들의 제안에도 ‘그러나’ 거절하시는 예수, 여인이 끓어 엎드렸어도 ‘그러나’ 강아지 운운하시는 예수. 그런데 부스러기라도 요청하는 여인의 말에 “그제야” 예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마태오는 이 구조를 통해서 세 번의 ‘그러나’를 뛰어넘어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칭찬받은 여자의 행동을 주목하게 합니다.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인데, 여자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믿음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요? 어떻게 여인은 예수님께 칭찬받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저는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예수님 앞에 나올 때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하느님의 나라를 열어갈 메시아를 부르는 호칭입니다. 가나안 여자가 구약에서 전승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알고 계십니까?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비전이신가요?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느님이 통치하시는 상태와 영역이 될 때, 힘과 돈이 다스리는 피라미드 제국의 질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져 샬롬이 넘치는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차별과 배제로 갈라진 세상이 아니라, 포옹과 환대로 화해하고 일치하는 세상이 됩니다. 하여 상처입고 아픈 이들이 치유 받고 인간다움을 온전히 회복하는 생명의 나라 속에 살게 됩니다.  

 

이후 여자는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서슬 퍼런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만 사용되는 “주님”이라는 호칭을 이방 여자가 예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을 왕으로 모시고, 예수님이 이루어 가시는 하느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이 열방을 향한 것입니다. 열방이 하느님께 돌아와 예배하도록, 축복의 통로로 이스라엘을 세우신 것입니다. 

 

오늘 시편을 보십시오. 만방, 만백성, 열방, 온 세상 백성이라는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67:4, 당신께서 열방을 공평하게 다스리시고: 온 세상 백성들을 인도하심을, 만백성이 기뻐 노래하며 기리게 하소서.  오늘 1독서 이사야서도 하느님의 비전을 보여줍니다. 66:7, 나의 집은 뭇 백성이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이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가 열방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임을 알았고, 예수님이 바로 그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왕이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예수님이 자신에게 대답하지 않고, 외면하고, 자신을 개처럼 여겨도 예수 앞에 더 가까지 나가 부스러기라고 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자가 요청한 부스러기는 하느님 나라 잔치를 상징합니다. 성서에서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 앞, 14장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에서 남은 빵 조각이 12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 뒤에 나오는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야기에서는 남은 빵 조작이 일곱 광주리에 가득했습니다. 빵 조각 부스러기를 달라는 여자의 간구는 ‘나로 하느님 나라를 누리는 백성이 되게 해 달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하느님 나라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질문하고 공부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배워 가야 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역사적인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환대하시고 그들을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신 사랑의 왕 예수를 알고 믿고 따라야 합니다. 

 

여름 추천 독서 ‘우리 아버지’, 유튜로 성공회이야기 공부하기 등에 열심히 참여하십시오. 하느님 나라 복음으로 살기 제자훈련을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여름이 지나면 모세오경 통독하기, 줌을 이용하여 비대면 독서모임을 다시 시작할 예정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느님의 나라와 역사적 예수를 배워가며 바른 믿음으로 세상을 섬기는 건강한 교회가 되도록 더욱 함께 노력할 때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리고 우리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과 진리이신 예수님 위에 굳건히 서서 “네 믿음이 참으로 장하다!” 칭찬받은 가나안 여자처럼, 예수님께 칭찬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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