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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예수님 유언 바로 듣기

by 분당교회 2020. 5. 12.

2020년 5월 10일 부활 5주일

가정 주일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사제 

요한 14:1-14

 

김선재 모니카 교우님의 모친께서 어제 별세하셨습니다. 고인께서 하느님 품에 안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요양병원에 계신 어르신들이 많은데, 코로나로 인해 자식들이 부모님들을 찾아뵙지 못하다 보니, 부모님들이 ‘자식 놈들이 나를 버렸구나’ 생각하시며 외로움에 많이 힘들어 하신다고 합니다. 참 마음이 아픕니다.

 

현대 사회는 이런 저런 사고로 준비하지 못한 죽음을 많이 맞이하게 됩니다. 코로나로 인해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는 치명률이 적은 편인데, 외국 수치를 보면 코로나로 인해 많은 노인들이 죽고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비극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용산 이태원 클럽 방문자로 인해 다시 비상사태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생활방역을 철저히 하시고 코로나 종식을 위해 계속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당 정면 벽에 있는 기도문으로 잠시 기도합시다. “부활하신 예수님, 생명의 주여! 이 땅을 고치소서. 인류를 구원하소서.”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란 하루하루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을 돌아보고 새롭게 하기 위해 ‘유언장을 써보기’, ‘관속에 들어가 누워보는 체험’, ‘묵상 중에 자신의 장례식 장면 상상해 보기’ 등을 합니다.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스테파노처럼 의연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 설교 말씀을 나눕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 말씀이 바로 예수님의 유언입니다.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마지막 당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별담화라고 합니다. 

 

오늘과 다음 주일 연속해서 요한복음 14장을 통해 예수님이 남기신 유언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유언을 잘못 알아듣는다면, 유언을 남긴 분에게 얼마나 큰 결례가 될까요? 

 

그래서 바르게 성서를 해석하고 삶에 적용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고별설교 중 오늘 복음에 나온 두 가지 내용을 살펴보며 바른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1. 

14장 1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속에는 근심, 밖에는 걱정, 늘 시험거리가 넘치는’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격려일까요 기만일까요? 

 

걱정의 뿌리는 불확실한 미래에 맞닿아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3년 동안 의지하고 따라 다녔던 스승 예수가 이제 제자들을 떠나가시겠다니 어찌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요한 13:33,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이제 잠시뿐이다. 내가 가면 너희는 나를 찾아다닐 것이다. 일찍이 유다인들에게 말한 대로 이제 너희에게도 말하거니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그런데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은 서기 100년 즈음, 요한복음이 기록된 당시의 교우들에게도 주시는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으면 회당이 중심이 되는 유대 공동체에서 추방당하는 현실이었습니다.

  요한 9:22,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회당에서 쫓아내기로 작정하였던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걱정하기를 그치라’는 의미입니다. 걱정거리가 나를 사로 잡으려 할 때, 걱정하기를 그칠 수 있는 특효약이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요한 14:1,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은 2절과 3절로 연결됩니다. 2-3절, 2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만일 거기에 있을 곳이 없다면 내가 이렇게 말하겠느냐? 3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 

 

일반적으로 ‘아버지집’을 천국으로, 예수님께서 천국에 믿는 이들이 거할 처소를 마련하러 가신다는 말씀으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은 재림으로 이해합니다. 뭐 여기까지는 보통 교회에서 이해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교회들도 있더군요. ‘천국에 가면 금으로 된 집도 있고 다이아몬드로 된 집이 있다. 평수도 다르다. 죽기 전에 얼마나 교회에 충성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들어보신 분이 계실 겁니다. ‘아버지 집’을 천국이라는 장소에 있는 공간으로 이해하다 보니, 이런 왜곡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144,000에 들어가야 구원받을 수 있는데, 충성해야만 144,000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신천지랑 다를 바 없는 허무맹랑한 이해입니다. 

 

‘집’으로 번역된 헬라어 ‘오이키아’(οἰκία)는 요한복음 4장 53절과 8장 35절에도 나오는데, 건물로서의 ‘집’이 아니라 ‘가족’을 가리킵니다.

  4:53, 그 아버지는 그 때가 바로 예수께서 "네 아들은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와 그의 온 집안이 예수를 믿었다. 

  - 온 집안 = 가족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죠.

  8:35, 노예는 자기가 있는 집에서 끝내 살 수 없지만 아들은 영원히 그 집에서 살 수 있다. 

  - 노예도 공간으로서의 집에는 같이 있지만, 가족은 아닌 것이죠. 아들은 가족으로서 함께 살아갑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가야 하느님을 만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비판하시며, 당신 자신이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시는 맥락과 같습니다. 

 

성전이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면서 이 지상에 세우신 그의 몸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교회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새롭게 형성된 공동체인 교회가 하느님의 집입니다. 예수님과 헤어지게 될 제자들이 의탁할 거처가 예수님이 세우시는 하느님의 가족인 교회라는 것입니다. 

 

두 주일 전 설교를 기억하시나요? ‘서로 용서하라. 서로 용납하라. 서로 가르치라. 서로 격려하라. 서로 돌아보라.’ -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성령의 코이노니아로 하느님 나라를 경험하는 ‘서로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내가 이런 공동체에 속해 있다면, 불확실한 미래와 죽음의 공포로 걱정이 밀려들어도, 걱정하기를 멈추고, 이내 떨쳐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에는 미래가 더 불확실하고 불안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인류의 미래는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지금은 코로나로 인한 경제 위기가 ‘시작의 끝’이라고 합니다. 시작의 끝이란 또 다른 위기가 연이어 오고 더 심화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쁨의 50일 여정’ 신앙 실천 중에 코로나 특별기금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계속 진행될 코로나 경제 위기 가운데, 어려운 지체들을 돌아보며 더불어 살아가는 가족이 되고자 함입니다. 재난소득이 없어도 생활에 큰 지장이 없는 가정은 코로나 특별기금으로 봉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지체가 아니어도, 교우 여러분의 이웃이나 친지 가운데 위기 가정이 있어 그분들에게 우리 교회가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하느님께서 이 땅에 하느님의 가족으로 성공회 분당교회를 세우신 이유인 것입니다.

 

2. 

바른 이해가 필요한 두 번째 말씀은 6절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죠. 이 구절에서 주목해 보는 단어가 있습니다. the와 through라는 단어입니다. 

 

the라는 단어를 정관사라고 하죠. ‘유일한’ only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예수님만이 하느님과 화해하고 천국에 가게하시는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증하는 표현이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 through라는 표현입니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참 사람이시고 참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하느님과 화해할 수 없고 구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도 없고 영생의 축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분에게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느님께 이르는,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구원의 이름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예수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아멘?

 

이상이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설교되는 내용입니다. 예수 이름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이해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더 깊게 이해하지 않으면 큰 왜곡을 일어납니다. 

 

한국교회가 많이 실시했던 ‘전도폭발’이라는 전도 훈련이 있습니다. 매뉴얼에 따르면, 전도대상자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첫 번째 질문은 “만일 오늘 밤이라도 이 세상을 떠나신다면,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릴 것을 확신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어떠세요?

 

두 번째 질문은 “만일 오늘 밤 이 세상을 떠나 천국 문 앞에 섰는데 그 때 하느님께서 선생님에게 ‘내가 너를 나의 천국에 들어오게 할 이유가 무엇이겠느냐?’하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어요?”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실까요? 정답은? “예수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도 훈련이 가져오는 왜곡이 있습니다.  첫 번째 왜곡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을 죽어서 내세, 천국 가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새로운 하느님의 가족 공동체에 속하여 더불어함께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 가는 것도 중요한 구원의 내용인 것입니다.

 

두 번째 왜곡은 예수님의 이름을 마치 도깨비 방망이처럼 여기는 겁니다. 오늘 복음 14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라도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에 대한 이해도 그렇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말씀은 그저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단순한 말이 아닌데 말이죠.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님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길, 진리, 생명’은 그 앞에 생략되어 있는 단어들을 복원시켜야 그 의미가 명확해 진다고 주석합니다. 따라 해보실래요? “십자가의 길, 성육신의 진리, 부활의 생명.” 

 

그런데,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교리로 정리해 놓은 복음을 듣고 머리로 이해하면 아멘 합니다. 구원받았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길, 성육신의 진리를 살지 않습니다. 부활의 생명력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식론적으로는 유신론자이지만, 실천적으로 무신론자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길은 걸어가야 길입니다. 진리는 살아내는 것이구요. 이럴 때 풍성한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 through라는 말은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고는’, ‘성육신의 진리를 살지 않는다면’, 부활의 생명을 누릴 수 없고, 그렇다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주님의 일을 내 일로 여기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한 주간, 십자가의 길, 성육신의 진리, 부활의 생명, 이 세 가지 말씀을 화두로 삼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여 내가 걸어가야 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고, 내가 살아내야 하는 성육신의 진리를 살아내어 부활의 생명으로 풍성한 구원의 은총을 누림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느님의 능력을 널리 선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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