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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예수님과 벗되기! 주님을 기다리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by 분당교회 2020. 3. 29.

2020년 3월 29일 가해 사순 5주일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사제 

요한 11:1-45

방역 수칙 잘 지키시며 한 주 잘 보내셨지요? 이제 한 주만 더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교구장 이경호(베드로) 주교님께서 다음 주일부터는 정부의 7가지 방역 지침을 지킨다면, 건강한 교우들에 한해 성당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지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 고난주일에는 성당에서 오전 11시와 오후 2시, 2회 예배를 드립니다. 오전 11시에는 큰 아버지회(바울로회)와 여성 제1.제2.제3 또래모임이 참석하시고, 오후 2시에는 작은 아버지회(바르나바회)와 여성 제4모임, 그리고 청년회, 교회학교가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시간이 여의치 않으신 분은 편한 시간에 참석하셔도 됩니다.

 

‘고난주일 성지축복예식’은 오전 11시 예배 때 하고, 오후 2시 예배 중에는 ‘책가방 축복식’을 합니다. 교회학교 어린이가 참석 못하면, 부모님이 책가방을 가져 오시기 바랍니다. 

 

오전 11시 예배를 인터넷으로 방송하니, 기침이나 몸살 기운이 있으시거나 면역력이 약하신 분들은 가정에서 영상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7가지 방역지침에 따라, 예배 전 후에 성당과 홀 방역을 하고 성당 입장 전 발열 체크를 합니다. 손을 씻고 성당에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세정제도 충분히 비치되어 있습니다. 2미터 거리를 확보하고자 성당에 20명, 홀에 10명 착석하도록 합니다. 자리에 표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예배 중에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성체만 영하도록 합니다. 예배 후 애찬 시간을 갖지 않구요. 당분간은 이렇게 예배드리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4월 12일 부활절에는 3회 내지 4회로 분산해 예배를 드릴 계획입니다.

 

이제 사순 5주일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 기록한 7가지 기적 이야기 중 마지막 7번째 로, 죽은 나자로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은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고, 다음 주일 고난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 복음에 대한 묵상을 설교로 준비했습니다. 묵상의 내용이 3가지인데, 제목을 “예수님과 친구 되기, 주님을 기다리기,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삶으로 나아기”로 정해 봤습니다. 

 

첫째, 11절에서 예수님이 라자로를 친구라고 부르는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내가 가서 깨워야 겠다.” 

 

예수님에게 라자로의 집은 편하게 들러 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12장을 보면,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내어놓고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마지막 여정 중에도 라자로의 집에 들르십니다. 사랑하는 친구의 얼굴을 보며 마지막으로 우정을 나누고 싶은 것이죠. 

 

예수님도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기에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외롭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

 

예수님은 제자들도 자신과 우정을 나누는 친구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5절에서 제자들에게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지만,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자신의 벗으로 삼으셨고 마침내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벗으로 살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도 친구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께 내 마음을 알아 달라고, 내 소원을 들어달라고 일방적으로 말하고 돌아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마음을 알고 당신의 꿈인 하느님의 나라를 비전으로 품고 살아가는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말씀 묵상과 기도로, 주님과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우정을 더 깊게 영글어 가는 시간이 사순절입니다. 이제 사순절도 두 주 남았습니다. 코로나19로 정신없이 보내고 있지만 남은 사순절 두 주, 우리를 위해 외롭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주님의 친구가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나자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후에야 베다니아로 가신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17절,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 보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뒤였다.”

 

라자로의 병세가 위중해져서 마르타.마리아 자매는 예수님께 속히 와주십사 전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6절을 보면, 예수님은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다가 베다니아로 가셨습니다. 

 

팔레스타인은 더운 지방이어서 사람이 죽으면 그날에 바로 매장을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어서 매장되어 썩기 시작할 때를 기다리신 것 같습니다. 죽자마자 살리게 되면 정말 죽은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 나올 수 있으니 확실히 죽은 자를 살리려고 하신 것일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25-26절, 마르타에게 하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의 주님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5절, “이제 그 일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내가 거기 있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람을 보냈을 때 예수님이 즉시 오셨더라면 오빠 라자로는 죽지 않았을 텐데, 왜 죽은지 나흘이나 지나 시체가 썩어가는 지금 오셨단 말인가?’ 원망하는 마르타.마리아의 말처럼, 예수님이 오지 않던 시간은 마르타.마리아에게는 아픔과 고통이 처절했던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 부재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이런 시간을 겪기도 합니다. 그토록 부르짖으며 기도해도 하느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기도 응답은 예스, 노, 무응답, 3가지라고 하는데, 응답이 없이 기다리는 시간에 우리는 하느님의 부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은 당신의 때와 방법으로 일하시니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장 선한 것임을 믿고 주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믿음이 진실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양하며 고백합니다. 성가 142장, “1 주님의 시간에 주 뜻 이뤄지기를 기다려 하루하루 살 동안 주님이 인도하시니 주 뜻 이룰 때까지 기다려 2 기다려 그 때를 주 뜻 이뤄지기를 기다려 주 뜻 이루어질 때 우리들의 모든 것 아름답게 변하리 기다려” 

 

성숙한 믿음은 주님 뜻을 헤아리고 그 뜻 앞에 내 뜻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묵상과 기도가 깊어지면,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믿음으로 자라납니다. 

 

셋째, 눈물 흘리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33절, “예수께서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따라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35절,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온 인류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작은 미물인 바이러스로 인해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의 아픔을 함께 하시며 눈물 흘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눈물을 흘리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께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눈물 흘리고 계셨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는 코로나19로 고통 받고 죽어가는 우리 인간들에게만 관심을 갖지만, 주님은 인간으로 인해 고통 받아 오고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동식물들로 인해 아파하고 눈물 흘리고 계십니다. 그 모든 것들도 주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 하느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버드대학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고 초대 국립생태원장과 유엔생물다양성협약의장을 지낸 최재천 교수라는 분이 계십니다. 최교수님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비롯된 박쥐에 대한 논문을 서너 편 쓴 것은 물론, 인간의 생태계 파괴가 불러올 전염병의 위험에 대해 꾸준히 경고해 오신 분입니다. 

 

그분이 코로나19 사태나 나면서 인터뷰하신 내용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박쥐가 우리한테 일부러 바이러스를 배달했을까? 박쥐가 훨씬 자주 만나는 어떤 동물에게 옮겼고, 그 동물이 인간을 자주 만나는 바람에 제2, 제3의 숙주를 통해 온 거다. 이번에 천산갑이 중간숙주가 맞는다면, 중국인들이 천산갑 비늘을 한약재로 먹으니까 가공하는 과정에서 옮았을 것이다.....

 

박쥐를 직접 접촉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박쥐를 제법 먹는다. 우리나라에 있는 작은 박쥐가 아니라 열대지방의 큰 박쥐를 먹는다. 나이지리아 나이로비에 가면 유럽인들이 멧고기(야생동물 고기) 음식점 가서 고릴라 코뿔소 원숭이 박쥐를 골라 먹는다. 파리와 런던에도 그런 음식점이 생겼다. 그 고객들을 먹이기 위해 정글에 들어가서 야생동물을 더 잡아오고, 그 과정에서 동물들에 붙어살던 기생생물들이 인간에게 들러붙는 거다..... 

 

우리가 박쥐한테 접근한 거다. 박쥐가 사는 동굴은 보통 사람은 찾기도 힘든데, 동굴 앞까지 길을 내고 들어가서 들쑤시니까 이런 일이 벌어진다. 예전에 제가 ‘숲으로 난 길은 언제나 파멸로 이끈다’는 글을 썼다. 열대 정글 원주민들은 자기들이 먹을 만큼만 잡으니까 균형이 깨지지 않는다. 그런데 길을 덜커덕 내니….   

 

거대 가구기업들이 세계 환경 파괴에 기여하는 바가 상당하다. 기업들이 아프리카 숲에 투자해 벌목해서 길을 내면 트럭이 들락거리고, 트럭 사이로 사냥꾼들이 들어간다. 동물들 잡는 게 쉬워지니까 산업이 돼버린다..... 

 

기후변화와 그로 인해 사라질 생물다양성, 그 두 문제에 코로나19도 연결돼 있다. 인간이 자연생태계를 파괴해 잘 살던 그 아이들이 우리한테 바이러스를 털어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자꾸 만들어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는 거다.”

 

인간이 피조세계를 파괴하니, 인간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동물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것이 코로나19 바이러스 같은 전염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코로나19로 인류가 멈추니까 피조세계가 회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네치아 운하에 돌고래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하루 10만대 이상 떠다니던 비행기들이 없는 하늘, 멈춰버린 공장의 소음과 화력발전소의 굴뚝연기, 바람은 맑고 사람들로 붐비던 봄꽃 밭도 고즈넉해 졌습니다.

 

코로나 19가 인간에게는 스스로 자초한 고통의 시간이지만, 어쩌면 인간을 잠시 멈추게 하고 지구에게 필요한 휴식의 시간을 갖게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70년 동안 포로로 끌려가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그 기간이 바로 이스라엘이 안식년을 지키지 않아 쉬지 못했던 이스라엘 땅의 안식년 기간이라고 말합니다. 코로나19의 기간이 지구에게는 안식의 시간이 되는 것이겠지요. 

 

눈물 흘리시는 주님께서 바라보신 라자로의 시신이 묻혀 있는 무덤은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패턴을 돌이키지 않았을 때 맞이하게 될 파멸의 상징이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이 자신만을 위해 자행하는 생태계 파괴와 독점을 멈추지 않을 때, 맞이하게 될 인류의 운명이 무덤인 것이죠. 

 

그 무덤을 향해 예수님이 외치셨습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이 말씀이 저에게는 탐욕으로 인해 죽음으로 치닫는 인류를 향해 “돌이켜 생명을 살리는 삶으로 나오라”는 주님의 명령으로 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삶이 십자가와 부활을 따르는 영성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새로운 삶의 내용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최재천 교수님이 자연을 통해 배운 지혜를 나눕니다. 

“자연에서 가장 위대한 성공사례가 꽃을 피우는 식물과 꽃가루를 옮겨주는 대신 꿀을 받은 곤충이다. 지구에서 무게로 가장 성공한 게 코끼리나 고래가 아니라 꽃을 피우는 현화(顯花)식물이다. 즉 무게로 가장 성공한 식물과 숫자로 가장 성공한 곤충이 손을 잡은 것이다. 서로 죽이는 게 아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것 대신 하이에나가 사자랑 맞짱뜨는 거, 이게 삶의 현장인 줄 알고 그것만 들여다본다. 

 

생물학자로 평생을 살면서 관찰해온 결과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 세상은 손잡은 놈들이 미처 손잡지 못한 놈들을 이기고 살아남은 세상이다. 어떻게 하면 주변 사람들과 함께 살 것인가 고민하는 게 훨씬 현명할 수밖에 없다. 이게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좋은 전략이라는 걸 이해하면, 공존과 공생에 좀 더 설득력이 생기지 않을까.”

 

자연은 성경과 함께 하느님을 뜻을 알게 하는 하느님의 계시의 책입니다. 하느님은 자연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삶이란 꽃과 나비가 공존하고 공생하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른 생명과 공존하고 공생하는, 다른 나라 민족들과 연대하는 삶이 생명을 살리는 새로운 삶의 방향입니다. 

 

하여 코로나 19를 통과해가는 교회는 힘차게 외쳐야 합니다. “라자로야, 무덤에서 나오라.” “인류여, 공생과 연대라는 새로운 삶으로 나가자!”  

 

그리고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활과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공존과 공생, 연대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저는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기적이야기를 통해 3가지 묵상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벗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때와 방법으로 우리 삶에 일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기다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그리고 모든 것들과 공존 공생함으로며 생명을 살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사순 5주일 설교말씀 - 유튜브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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