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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흔들리며 피는 꽃처럼, 마침내 주님 앞에 서리라!

by 분당교회 2019. 12. 15.

2019년 12월 15일
대림 3주일 (마태 11:2-11)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사제
(성공회 분당교회 관할사제)

오늘은 대림 3주일입니다. 대림 3주일을 ‘장미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교회력으로 오늘 말고 ‘장미주일’이 한 번 더 있는데, 사순 4주일입니다. 아주 전통적인 교회에 가보면, 전례의 색깔도 ‘장미주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장미색을 씁니다. 장미는 그 화려한 색깔과 짙은 향기로 ‘기쁨’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왜 참회와 절제를 강조하는 절기 중간에 ‘장미주일’이 있는 걸까요?

 

요즘은 대림절기와 사순절기의 경건 생활이 많이 느슨해졌습니다. 전통적으로 대림과 사순 절기의 경건 생활은 아주 엄격했습니다. 금식 등 극기하며 기도 생활에 전념하기에 일상이 지루해 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경건생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자 잠시 휴식을 갖는 의미가 있겠습니다. 

 

장미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신들이 장미로 화관을 만들어 썼는데, 기독교는 혁명적으로 이를  순교자의 관으로 바꿨습니다.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을 따라 순교하는 믿음이 아름답고 향기롭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순교를 향해 나가는 믿음의 여정 중에 잠시 휴식을 갖는 장미주일의 의미가 더 비장하게 다가옵니다.

 

올 해 성탄절이 25일, 수요일입니다. 성탄 망일인 화요일에 성탄밤예배가 저녁 9시에 있어 당일 화요일 새벽기도는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대림절 매일예배가 이번 한 주만 남은 것이죠. 이제 한 주 남은 대림절기, 믿음의 선배들처럼 보다 엄격하게 지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집이나 직장에서 기도하시겠지만, 성당에서 드리는 매일기도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화, 목은 오전 6시 30분, 수요일은 오후 8시, 금요일 오전11시, 토요일 오전 10시입니다. 묵상과 기도 가운데 주님과 깊이 만나고 교회와 세상을 위하여 중보하며 누리는 주님의 은총이 참 좋습니다.

 

대림절기는 내용적으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 역사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그 나라는 완성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already 이미 시작되었고 not yet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초림과 재림 사이 그 중간기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 삶을 위해 성령이 오셨습니다. 사도 1장 8절. “성령이 너희가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느님의 나라를 대망하며, 초림으로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를 지금 경험하고 누리는 것을 종말신앙이라고 합니다. 이럴 때 우리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증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대림절기 동안 주님은, 우리가 종말신앙으로 무장한 증인이 되도록 말씀하십니다. 지난 대림 1주일에는?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깨어있으면 지금 일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하게 됩니다. 

 

대림 2주일, 지난 주일에는? “회개”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성탄으로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누리며 경험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믿음의 행위 입니다. 이 시대에 가장 긴급하게 요청되는 회개는 ‘생태적 회개’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회복해 가는 일에 앞장서는 생태적 회개 공동체가 되기기를  바랍니다.

 

오늘 대림 3주일에, 하느님이 주시는 말씀은? “인내”입니다. 오늘 서신 야고보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5:7-8, “7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농부는 땅이 귀중한 소출을 낼 때까지 끈기 있게 가을비와 봄비를 기다립니다. 8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왔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이 참는 것, 끈기, 인내입니다. 인내가 요청되는 이유는 흔들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알아차리고 회개하여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이 세상의 가치와 질서와 부딪치게 되고 갈등하게 됩니다. 이럴 때 의심이나 회의가 일어나고 좌절하게 되기도 합니다. 흔들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렇게 흔들리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지난주일 마태오 3장에 이어, 오늘 복음에도 등장하는 세례 요한입니다. 지금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당대 유대 왕 헤롯이 동생 필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하여 살고 있는 것을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헤롯에게 세례 요한은 눈의 가시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유다인들이 그를 추종하고 있어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이라크에 가면 세례자 요한을 메시야로 여기는 종파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종교 권력에게도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원래 세례는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받는 예식이었습니다.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 하려면 3가지를 해야 합니다. 물세례, 성전 제사, 할례. 그런데 지난주일 복음 마태오 3장에서 봤듯이,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요단강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물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죄 사함은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바치는 제사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을 비롯한 성전계급들은 이 제사를 이용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으로 오지 않고 요단강을 간다는 것은 종교 권력자들에게는 수입이 줄어드는 일입니다. 

 

이런 이유로 헤롯 대왕이 세례 요한을 투옥시키고 참수하는 일에 종교 권력자들이 협력해 주었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을 체포할 때도 일어난 일입니다. 빌라도와 대제사장 가야파가 연합하여 예수를 체포하고 로마의 극형인 십자자형에 처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항상 불의한 권력에 의해서 박해를 받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을 죽인 불의한 세상 권력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예수가 선포하고 시작한 ‘하느님의 나라가 옳다!’는 하느님의 우주적인 선언이 부활입니다. 주님의 재림으로 그 나라는 완성될 것입니다. 아멘?

 

불의한 권력에 의해 감옥에 갇혀 있는 세례자 요한에게 예수님만이 소망이었습니다. 이는 무려 700년 이상 식민지로 살아왔던 유다인들이 품고 있는 ‘메시야가 와서 모든 악과 불의를 심판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실 것이다’는 비전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1독서는 이런 비전이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이사 35:5-6, “5 그 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6 그 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리라.” 

 

여기서 “그 때”란 메시야가 임하는 심판의 날을 말합니다. 심판은 곧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는,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구약은 메시야가 오시는 그 날을 심판과 구원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날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로 여기던 나자렛 예수가 그들의 기대대로 행보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감옥에 면회 오는 제자들을 통해 듣는 소식이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심판받아야 마땅한 세리 같은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리같은 반역자들, 죄인들과 친구되셨다는 말은 그저 그들과 어울려 놀았다는 말이 아니죠. 루가복음을 통해서 보았듯이 그들을 환대하고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에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물어본 것입니다. 마태 11:3,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게 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보낸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마태 11:4-5, “4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5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예수님의 대답은 메시아가 오면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를 예언한 오늘 1독서 이사야의 비전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임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 11:6,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세상과 충돌하고 갈등하며 의심과 회의가 일어납니다. 말씀대로 살다보면 손해도 입고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믿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이 흔들림, 또한 신앙의 일부입니다. 

 

오늘 서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야고보 5:11, “우리는 끈기 있게 끝까지 견디어낸 사람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런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자 우리를 교회로 모아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연약한 인간이지만, 서로 격려하고 지지하며 함께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일으켜주고 손잡아 이끌어주며, 흔들리며 피는 꽃처럼 마침내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함께 서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시인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읽어드리며 설교를 마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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