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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사는 우리

by 분당교회 2017. 7. 24.

2017년 7월 23일 연중 16주일 설교말씀

성공회 분당교회 김장환 엘리야 신부

마태오 13:24-30,36-43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사는 우리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시고자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나라를 경험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신 분이십니다. 마태오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알게 하시고자 설교하신 비유를 모아 놓은 비유 모음집입니다. 


특이하게 마태오복음에서는 ‘하느님의 나라’‘하늘나라’라고 표현합니다. 마태오복음을 읽는 회중이 유대교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계명으로 인해 ‘하느님’‘하늘’로 바꿔 표현했습니다.


자주 말씀드리지만, 교회 안에는 ‘하늘나라’를 천국, 천당, 죽어서 가는 내세로만 이해하는 오해가 팽배합니다. 반쪽짜리 이해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영역과 상태’를 말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이생이든 내세이든, 하느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갑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대안적인 공동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전용어처럼 사용하는 ‘복음’의 넓은 의미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마르코 1:14-15,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15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 


좁은 의미로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에 ‘복음’이라는 단어가 원래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활동했던 때는 로마제국의 시대입니다. 기원전 44년 3월,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황제가 암살당합니다.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는 복수를 위해 카이사르의 친구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동맹을 맺습니다. 카이사르를 죽인 세력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제거합니다. 


그런데 곧 이어서 동맹을 맺었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절대 권력을 놓고 전쟁을 벌입니다. 기원전 31년 9월 2일, 그리스 서부 악티늄 근해애서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합니다. 


로마로부터는 먼 지역에서, 13년 동안 내전이 진행되는 동안에, 도시 안에서는 온갖 루머와 당파와 자리싸움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전쟁의 결과에 따라 각 진영에 속한 사람들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누가 승리하느냐에 상관없이 승리의 소식은 한 쪽에게는 복음, 좋은 소식이 되고 다른 쪽에게는 심판, 나쁜 소식이 됩니다. 


(카이사르의 암살, Vincenzo Camuccini)


마침내 로마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좋은 소식입니다!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가 이겼습니다. 이제 로마에 새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새 주인이 나타남으로 내전이 끝나고 평화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막 일어난 어떤 일에 관한 좋은 소식’입니다.


이렇게 당시에 ‘좋은 소식인 복음’이라는 단어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황제로 칭송받게 될 옥타비아누스가 세상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음을 공표하는 일반적인 슬로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이제 곧 일어날 일에 대한 좋은 소식’이기도 합니다. 전쟁의 승리는 장차 옥타비아누스가 황제로 로마에 복귀할 일을 확증합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승리를 확정하기 위해서, 마무리 군사 작전을 수행하고 로마로 돌아오기까지 2년의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 2년은 로마인들에게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했다는 소식과 이제 황제로 돌아올 일에 대한 기대 사이에서 살아가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황제로 복귀할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새로운 삶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성공회 신학자 톰 라이트는 복음이란 ‘결정적으로 일어난 일 – 그로 인해 일어날 일 – 그리고 그 사이,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태도!’를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복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기독교에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보여주신 하느님의 나라가 승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시어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겠다는 재림의 약속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Already – 아직 Not yet.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이해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 기다림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이런 이해로 오늘 복음의 말씀을 바라보면, 예수님의 교훈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예수님입니다.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입니다. 가라지는 악한 자들입니다. 가라지를 뿌리는 악마도 있습니다. 밭은 세상이구요. 추수의 때는 세상의 종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입니다. 


그때까지 세상에 하늘나라의 자녀와 악한 자들이 공존합니다. 악한 자의 자녀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훼방합니다. 하늘나라의 자녀들을 힘들게 합니다. 하지만, 추수의 때가 오면 심판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자녀들은 구원받아 해처럼 빛날 것입니다. 악한 자의 자녀들은 심판을 받습니다. 마치 옥타비아누스 진영의 사람들에게는 좋은 소식이고 반대 진영의 사람들에게는 나쁜 소식인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비유에 담긴 예수님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곧, 주님의 재림의 때에 있는 추수의 심판을 통과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누가 추수의 심판을 통과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사실 믿음은 그저 입술의 고백? 교리적인 인정?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삶으로 확증되는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는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주보의 해설에 있듯이 천국, 하느님 나라는 지금 나의 삶과 연속성이 있기도 하고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초월하고 이생의 수고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새로운 세상인데, 오늘 비유는 ‘연속성 차원’의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은 ‘지금 소유한 믿음이 살아있는 것이냐 아니냐’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 13:5, 여러분은 자기의 믿음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스스로 살피고 따져보십시오. 


오늘 복음을 보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확증하는 기준점을 3가지로 제시합니다. 


1. 38절, 좋은 씨!

오늘 복음에서 “좋은 씨”“하늘나라의 자녀”라고 합니다. 지난주일 복음에서는 씨앗을 ‘하늘나라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성육신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그 인격에 주인으로 품은 사람이 “좋은 씨”, “하늘 나라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씨란 예수님이 주인인 사람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이미-아직의 시기에 오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인이기에, 재림의 때에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우리도 사실 다 가라지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다만 은총으로 예수님을 믿었기에 하늘 나라의 자녀, 좋은 씨가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좋은 씨, 즉 하늘나라의 자녀로 그 존재가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사명이 있습니다. “나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합시다.” 


2. 43절, 아버지의 나라!

오늘 복음 43절에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성령은 좋은 씨가 된 우리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살게 하십니다. 오늘 서신입니다. 

로마 8:15,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빠”라는 표현은 친밀감입니다. 누가 아빠라고 부릅니까? 언제 아빠라고 부릅니까?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아, 아빠가 태산보다 커 보이고, 아빠는 뭐든지 다 할 수 있고, 아빠를 제일 좋아하는 어린아이가 아빠하고 부릅니다. 


이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가 ‘이미’와 ‘아직’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경험하고 누리며 소망하게 합니다. 바울로는 자녀가 곧 상속자라고 합니다. 로마 8: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악한 이들이 보란 듯이 살고 있는 이 사악한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누리며 소망하는 은총이 없다면, 어느새 ‘좋은 씨’는 죽어버리고 말라버려 가라지가 될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와의 친밀감이 그리스도인을 살아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3. 43절, 의인들!

‘의’라는 개념은 ‘관계가 좋다, 인정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아버지 되신 하느님과 친밀한 교제의 삶을 살면,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내가 나를 인정하고 수용합니다. 너그럽게 타인을 받아들이며 사랑합니다. 세상 속에서 청기기로 살아갑니다. 


마태 5장 13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16절, "세상 사람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는 말씀처럼, 그 믿음을 인정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좋은 씨!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그 나라를 경험하는 삶! 그래서 자신과 이웃과 화목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의롭게 사는 것! 이것이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심판을 통과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들인가요?


잠시 묵상합시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가 141장을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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