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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영혼의 순종

by 분당교회 2014. 12. 23.

영혼의 순종

이슬람 여성들의 인권에 관련한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서방 세계에서 제작한 것이라 편향적인 시각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만 너무나도 끔직한 장면들이 전개되어서 19세 미만인 사람들은 시청 불가입니다. 명예 살인(부정한 짓을 한 여인의 가족들이 명예를 더럽혔다고 해서 아버지나 가족들이 죽임), 돌팔매 처형(음란한 행위를 한 여인을 땅 속에 가슴까지 묻고 사람들이 돌팔매를 던져 처형하는 형벌), 종교경찰의 폭행(여성이 길거리를 다닐 때는 가족 남성이 동행해야 하는데 혼자 다니는 경우 채찍으로 때림) 등등... 비참한 여성인권의 실태를 동영상으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이슬람 사회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해도 적어도 이슬람 근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지금도 이런 야만적인 행태가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원래 이슬람의 가르침에는 없는 것이라 합니다만 아프리카 북부와 근동지역에서는 여전히 이런 만행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예수 시대의 여성들의 인권과 존엄성이 어떻게 대해졌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유다인들에 의해 끌려 나온 여인을 돌팔매질 하려고 했을 때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부터 돌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그 때 나이 많은 사람부터 사라지고 여인만 남게 되었을 때 예수께서는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했던 사건을 상기하면 어느 정도 그 현실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순박한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것이라 했으니 마리아가 당황하고 겁을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순결을 지켜야 하는 시기였고, 엄연히 약혼한 요셉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그 아기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 했고 영원한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혹시 마리아 자신은 믿어도 세상 사람들이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처녀가 아기를 잉태했으니 그 어떤 변명도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황당하게도 성령으로 잉태한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답변은 너무도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인생이 결정될 문제인데 좀 더 생각해 보겠다든지, 남편과 상의해 보겠다든지 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나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 더 귀한 집 자녀를 알아보라는 등 회피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사양하는 것, 사명을 맡기시려고 부르시는 하느님 앞에서 핑계대고 물러서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입니다. 또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힘과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자기 생각만 하기 때문에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는 믿음이 없이는 올바른 순종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핑계로 하느님의 부르심과 부탁을 거절하고 사는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 중심으로 생각하니까 이리 재고, 저리 재면서 도망갈 궁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지만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것에 감사했습니다. 또한 주인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종처럼 온전히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자기 자신을 비워드렸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성수태고지(Annunciation), Oil on canvas, 1623, Alte Pinakothek, Munich, Bavaria, Germany  ⓒ 2007 Orazio Gentleschi )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나시고...’라는 구절을 외웁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감추어진 것이 바로 마리아의 결단과 순종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마리아의 육신만 잠시 빌려서 뜻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마리아는 아기만 낳아주는 역할만 하는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하느님은 마리아의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의 순종을 통해 그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육신으로 아기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일이라면 아무나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필요로 하셨던 것은 하느님의 뜻을 기뻐하며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절대적인 믿음과 영혼이었습니다.

우리는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를 잘 기억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평화의 주인이 아니라 도구가 되도록 해 달라는 이 기도는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삶의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우리가 주님의 종으로서 도구가 되고자 한다면 영혼의 순종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기쁘고 영광스러운 성탄은 마리아와 같은 순수한 영혼에게 임할 것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12월 21 대림 4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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