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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부활, 신실하신 하느님의 사랑!

by 분당교회 2019. 4. 21.

2019년 4월 21일 부활주일

김장환 엘리야 사제 설교 말씀

 

0.

알렐루야!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사순절동안 기도와 극기, 자선으로 십자가의 길 여정을 함께 걸어오신 여러분에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 새가족 일곱 분이 성공회 가족이 되는 신자영접식을 갖게 되어 참 기쁩니다. 서로 사랑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가는 복음 공동체를 함께 세워갑시다.

 

지난 성목요일부터 어제 밤까지, 사순절 전례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성삼일 전례를 진행했습니다. 전례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을 경험하는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성공회 신자라면, 생활이 아무리 바쁘고 분주해도 꼭 참여해야 하는 귀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1.

인간에게 가장 큰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죽음이 가장 큰 슬픔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 그리움이 사무칩니다. 늘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함께 했던 시간들과 장소는 기억의 성소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랑하는 그 사람은 기억 속에 살아 있게 됩니다.

 

옆에 있는 테라로사라는 커피숍이 제게 그런 곳입니다. 돌아가신 송준영 그레고리 교우님과 가끔 가서 커피를 마시며 교제를 나누던 장소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지날 때면 자주 그레고리 교우님이 생각납니다. 

 

사랑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대성당에 모임이 있어 올라가면 가끔 안식의 집에 내려가 나란히 계신 안토니오, 그레고리 두 분을 찾아뵙는 이유입니다.

 

지난 화요일이 세월호 참사 5주기여서 희생자 추모성찬예배를 드렸습니다. 보신 분도 있겠지만, 1층 파파이스 유리창에 “기억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실천하겠습니다.”라고 적은 현수막을 게시했습니다. 

 

일어나서는 안 되었던 그 참혹한 사건을 기억하며, 유가족과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더 이상 사회적 참사가 반복되지 않는 안전한 사회를 세워가기 위해 실천하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 된 사랑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2.

3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예수가 십자가 나무에서 죽임을 당했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예수를 통해 그 누구에게도 받아보지 못했던 사랑을 경험했고 하느님 나라를 배우며 새로운 삶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목요일 밤, 발을 닦아주시며 자신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던 예수를 배반까지 했으니 그 심경이 얼마나 참담했을까요?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는 예수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새록새록 떠올랐을 겁니다. 예수님이 보여준 사랑, 놀라운 기적들, 새로운 가르침들이 떠올라 미안하고 보고 싶고..... 예수님에 대한 기억이 더 또렷해 졌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이런 정신적인 부활, 실존적인 부활로 이해합니다. 제자들의 기억 속에서 예수가 살아나고, 스승 예수가 보여준 사랑, 가르침을 살아낸 것으로 부활을 이해합니다. 

 

1970년 11울 13일,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정신이, 이후 노동자들의 가슴에 살아나 노동운동을 이끌어온 것과 같은 이해입니다. 

 

지극히 이성적인 이해입니다. 죽은 사람에 대한 사랑은, 이렇듯 기억 속에 그를 살려내고, 그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3. 

하지만 성서는 예수의 부활을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증언합니다. 오늘 2독서, 1고린 15:2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안식일 다음 날, 날이 밝자 예수의 무덤으로 가보니 비어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 루가 24:3, “그래서 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으나 주 예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성서는 빈 무덤의 첫 증인들을, 당시에는 법정에서 전혀 증인의 효력을 갖지 못하는 여자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꾸면 낸 얘기라면 남자 증인들을 내세웠을 것입니다. 루가 24:10, “그 여자들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요안나와 또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다른 여자들도 그들과 함께 이 모든 일을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가 사도들에게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오늘 1독서, 사도 10:40,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시고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교회력으로 오늘부터 승천일을 지나 성령강림주일 성삼위일체 주일까지 부활절기를 지킵니다. 이 기간 동안 읽게 되는 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자신들의 기억 가운데 살아난 예수를 따라 나선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낙심과 절망 가운데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이야기로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부활 2주일, 요한 20장 19-31. 부활하신 날 저녁,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시고 여드레 지나 토마스를 만나고자 찾아오신 이야기

 

부활 3주일, 요한 21:1-19, 티베리아 호수로 돌아가 고기잡이 하는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이야기, 나를 사랑하느냐? 네 양들을 잘 돌보아라. 나를 따르라!

 

오늘 복음 루가복음에 뒤이어 나오는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루가 24:13-3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찾아오신 이야기.

 

2독서로 읽은 1고린토 15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가서 만난 사람들이 소개됩니다. “4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서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5 그 후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뒤에 다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6 또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교우들에게도 나타나셨는데 그 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7 그 뒤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또 모든 사도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8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4.

사랑하면 기억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기억은 흐려지기도 합니다. 뇌에 이상이 생기면 기억이 상실됩니다. 그러면 내 기억 속에 살아있던 사람과의 사랑의 관계는 단절됩니다. 연약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연약한 제자들의 기억 가운데 일어난 정신적인, 실존적인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제자들,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환대하시고 그들로 새로운 세상, 하느님 나라를 꿈꾸게 하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는 다시 살리시어 그 사랑의 관계가 계속 되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낙심한 제자들을 찾아가시고 격려하시어, 그들을 통하여 자신이 시작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가는, 위대하고 존귀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모세에게 계시하신 하느님의 이름은 ‘나는 나’(I am who I am. I will be who I will be.)입니다.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대로, 하느님께서 낙심하고 좌절하는 인생들, 가난하고 연약한 인생들과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그 사랑을 확증한 사건입니다. 부활은 신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부활절 성찬례 봉헌기도문이 이렇습니다. “우리가 이 예물을 바치며 이 빵을 나눌 때 부활하신 주님을 뵙게 하소서.” 이 기도대로, 이 예배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여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깊이 깨달아 알고, 우리도 제자들처럼 떨쳐 일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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