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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하느님 나라의 복음

by 분당교회 2018. 1. 22.

연중 3주일, 마르코 1:14-20

하느님 나라의 복음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말씀이 마르코복음입니다. 마르코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많은 말씀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을 첫 선포의 메시지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입니다. 

  마르 1:14-15,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15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중에 하나가 복음이라는 단어일 겁니다. 그런데 복음이 뭐냐고 물으면 명쾌하게 답하지 못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13절에는 하느님의 복음, 14절에는 복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음의 실체는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14절,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라고 하시고는 이 복음을 믿어라고 하셨다. 


그래서 복음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려면 하느님 나라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 안에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죽어서 가는 천국으로 이해합니다. 잘못된 이해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란 공간의 개념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다스리신다는 통치의 개념입니다. 하느님의 통치는 자비로운 통치, 은혜의 통치, 하느님의 헤세드가 있는 통치, 인격적인 하느님의 통치입니다. 



왕이신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사랑으로 서로 위하는 마음이 흘러넘치고 공평과 정의가 실현됩니다. 하느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이 하느님처럼 자비로, 은혜로, 사랑으로, 인격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가 기쁜 소식,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세우신 하느님의 비전이 이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만을 왕으로 경배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공평과 정의를 넘치는 평화의 나라, 하느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열방이 이스라엘을 보고 하느님의 통치 아래 사는 삶이 얼마나 좋은지를 알게 되며 하느님께 돌아와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이 이스라엘을 세우신 목적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 요나서는 온 열방이 하느님께 돌아와 공평과 정의가 넘치는 평화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하느님의 비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요나를 시켜 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 백성들에게까지 가서 심판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인간 요나에게 니느웨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해야하는 나라입니다. 요나의 선포를 듣고 니느웨는 왕부터 어린아이까지 다 회개합니다. 하느님은 심판을 거두십니다. 그 때에 니느웨는 공평과 정의가 흘러넘치는 평화의 나라가 이룩되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하느님의 강렬한 비전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내 인간들은 다시 하느님을 떠나버립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택하신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실제를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로 하느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하느님 나라가 승리하였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삶에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그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누룩처럼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겨자씨가 자라나 새들이 깃드는 큰 나무를 이루듯, 여기저기 세워지는 예수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왔다’하지 않으시고 ‘다가왔다.’고 하십니다. ‘다가왔다’는 ‘엥기켄’는 ‘엥기제인’이라는 동사의 현재완료 직설법 동사로서 ‘이미 가까이 온 상태에 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통치가 이미 가까이 와 있다는 말은 곧 예수 자신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제 2위이신 성자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하느님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예수의 출현은 바로 하느님 통치의 접근, 즉 하느님 나라가 임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왕으로서 세상 통치를 목적으로 하고 오신 예수가 문자 그대로 인간에게 이미 가까이 와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까울 뿐 완전히 임한 것은 아닙니다. 완전한 통치는 인간 스스로가 하느님의 통치를 받는 상태에 들어감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느님의 통치가 바싹 다가왔다'고 말씀하셨고 ‘완전히 임했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인 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느님을 왕으로 인정하며 하느님의 통치를 받기로 결단하고 순종할 때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자발적인 복종과 굴복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와 믿음을 선포하십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자신이 주인되어 살아가던 삶을 돌이키고 하느님께 돌아와 하느님을 왕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회개이다. 왕이신 하느님을 의지하고 그 분의 말씀에 희망을 두고 순종하는 삶이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느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분의 통치 아래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통치를 받기에 이 세상의 가치나 논리로 살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살기에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며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가 됩니다.


하느님의 통치가 가장 어려운 영역이 경제 영역일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에 왕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이스라엘이 범한 불순종의 죄악이 바로 맘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느님을 왕으로 섬기는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가장 결정적인 삶의 변화는 재물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로 인한 재정 사용에서 나타납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통치하심을 받아들이면, 내 필요를 채우시는 하느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로마 8장 32절,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때로 궁핍함에 처하기도 하지만, 주님을 신뢰하며 견디어 냅니다. 재물로 염려하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는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 자족의 영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작은 집에 살아도 차가 없거나 소형차라도 그로 인해 초라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내 삶에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에 아멘이 됩니다. 


필립 4:11-12, 11 내 처지가 어려워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12 비천하게 살 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이 믿음을 소유하면 “모든 것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기에 내가 받은 것을 하느님께 드립니다”라는 봉헌의 기도가 진정 나의 고백이 됩니다. 자신에게 있는 물질은 선교를 위해 하느님이 맡겨주신 하느님의 것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청지기로 살아갑니다. 기꺼이 십일조를 드리고 선교구제하는 주님의 일에 기꺼이 재물을 나누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를 통해 교회가 힘있게 세워지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는 선교가 행해짐이 기쁨이 되고 보람이 됩니다. 


주님은 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조적인 신앙생활로 자기 의에 빠져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 23:23,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가난한 이웃들과 더불어함께 살아가는 분배적 정의, 쩨다카가 이루어지도록 선교와 구제에 힘쓸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쩨다카가 이루어지도록 미슈파트의 실현에도 기도하며 참여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지금 최저임금제가 사회적 이슈입니다. 임금이 오른다고 청소부나 알바생을 해고하는 곳이 많다는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울산의 어느 아파트에서는 입주민들이 월 8000원 오르는 관리비를 감수하고도 고용을 유지하기로 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해고를 결정하는 곳에 크리스챤이 있었다면 그는 가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관리비가 월 8000원 오르는 일을 주도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회개하고 믿는 자의 삶과 그가 속한 영역에 하느님의 통치가 시작되면 바로 그곳에 하느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주의 기도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란 주권, 사람, 땅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확장되기 위해서는 앞서 보았듯이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분께 순종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 하느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고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들을 찾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오늘 마르코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입니다. 어부였던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이들이 보여준 반응이 놀랍지 않습니까? 18절,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20절, 부르시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들을 배에 남겨둔 채 예수를 따라나섰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품으셨던 비전이 다시 제자들을 통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확장됩니다. 


예수가 부르십니다. 

“하느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라.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맛보아 알라. 

 하느님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의 축복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를 세상에 보여주라. 

 그래서 사람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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