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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항복에서 승리로

by 분당교회 2015. 1. 30.

항복에서 승리로


예수님은 새로운 체제나 질서를 만들어내기 이전에 먼저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만나고 거리의 사람들을 만나서 병자를 고치고,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했습니다. 어떤 권력자들과 싸워서 권력을 쟁취한다거나 구조적인 개혁을 위한다기 보다는 다분히 개인적인 변화와 구원을 위해 노력했다는 뜻입니다. 에른스트 트뢸취라는 학자는 그런 면에서 예수는 개인주의를 추구했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예수는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랑’을 실현함으로서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변화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제도와 이념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또 다른 억압의 장치가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은 ‘예수를 따르는 길’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길’을 가는 것이지 그 누구도 목표에 완전히 도달했다거나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어디까지나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길을 가장 충실하게 걸었던 위대한 후계자였습니다. 한 사람의 회심이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종파의 영역을 벗어나서 세계적인 종교로 만들었으며, 율법도 민족도 계급도 성차별의 장벽을 넘어선 사랑의 종교임을 확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접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앞에서 고꾸라져 눈이 멀게 됩니다. 흔히들 이 대목에서 바울이 완전히 회심해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가 ‘사도’로서 세상에 나타날 때까지는 그 역시 정화와 성장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우선 그는 예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의 옛 사람과 옛 세상에 대해서 죽어야만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음과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항복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신앙 성장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고 실망하거나 포기하려고 한다면 아마도 완전히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자문해 봐야 합니다. ‘나는 한번이라도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항복한 일이 있는가?’ 무슨 어려움을 당할 때나 심한 고통을 당할 때 하느님한테 간절히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만, 완전히 항복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옛 사람이 온전히 남아있을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라비아에 가서 은둔했습니다. 혈육들과 의논하지도 않고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과 교인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한적한 곳에서 그 체험의 의미를 깊이 ‘성찰’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예수의 인간적인 행적에 대한 사도들의 전승으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복음은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하게 된 생명에 대한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 둡니다. 이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갈라1:11-12)

33년에 회심하고 34~35년에 아라비아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다마스커스로 돌아온 바울은 36년에 그리스도인이 된 후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리고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도 바르나바의 조역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옛 사람이 벗어지기까지는 꽤 많은 세월 동안 ‘정화의 여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바르나바와 바울은 교회의 공식적인 위임을 받아 본격적으로 이방 지역의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여기에서 조역의 위치에 있던 바울은 갑자기 주역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에게 주어진 은사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놀라운 영감과 웅변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영적 성장의 과정을 겪으면서 그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감옥을 가도, 돌팔매를 맞아도, 채찍으로 맞아도, 회당에서 쫓겨나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부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어부들은 그물을 버리고 곧 예수를 따라나섰다고 했습니다. 이 대목을 기술한 마르코는 바울의 1차 선교여행 때 동행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돌아와 버려서 바울은 크게 실망하여 후에 바르나바와 결별하게 한 장본이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이 있는 마르코는 ‘제자도’를 유난히 강조하게 되는데 역시 그의 회심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물을 버리는 것이 예수를 따라나서는 데 첫 번째 일입니다. 이는 옛 사람을 벗는 것이고 그리스도에게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승리를 얻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 존재로 거듭나기 때문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1월 25일 사도 성 바울로의 회심 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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