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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7월 27일 (연중17주일) 강론초 (마태 13:31-33,44-52 겨자씨, 누룩, 보물, 진주, 그물의 비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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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3:31-33, 44-52

31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에 비길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밭에 겨자씨를 뿌렸다. 32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나면 어느 푸성귀보다도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

33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온통 부풀어올랐다. 하늘 나라는 이런 누룩에 비길 수 있다."

44 "하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45 "또 하늘 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

47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 48 어부들은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버린다. 49 세상 끝날에도 이와 같을 것이다. 천사들이 나타나 선한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는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51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지금 한 말을 다 알아 듣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예." 하고 대답하였다.

52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맺으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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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나라’, 우리 삶의 현실! (마태 13:31-33, 44-52)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나라”의 추구입니다.
하느님나라를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신앙생활의 차원을 결정합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땅의 나라는 살아가는 이 세상, 하느님나라는 죽어서 가는 저 세상이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은 별개로 둘이 아니라 통째로 하나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저 세상에 있는 것으로만 여기게 되면 이 세상의 삶이 불건강, 불건전해집니다.

하느님나라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이상세계를 우리가 상상 속에 그려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치기준으로 그려낸 하느님나라는 이름과는 달리 우상의 나라에 불과합니다.

하느님나라는 어딘가에 객관적으로 있다 없다 할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장소라는 개념에 규정지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은 이 우주와 내가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차원의 문제로서, 증명할 문제가 아니라, 어떤 차원에서 어떻게 경험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신약성서와 초대교회의 중요한 미스테리 중 하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 자체와 같은 분이 되신 일, 곧 처음에는 복음(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던 그 분이 나중에는 복음 그 자체가 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 한 사람(스승, 예언자)으로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셨는데 어찌하여서 초대교회는 그 예수님을 두고 예언자라 칭하는데 머물지 않고 하느님나라를 이루시는 분, 곧 하느님의 주권적 다스림을 물려받은 분, 나아가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즉 하느님의 현존으로 고백되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 결정적 전환이 십자가 사건, 곧 부활사건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나라는 그에 관하여 정보를 얻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직접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 현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알려주시는 하느님나라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 당신의 인격과 영을 통하여 일생 유지하였던 하느님 아버지와의 생생한 ‘올바른 관계’입니다. 세상살이에서 세상은 부정하는 그러나 하느님께서 긍정하시는 그 올바른 관계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알려진) 하느님나라는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적 대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입국비자를 얻듯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가는 곳’이 아니라 ‘사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입국비자 얻는 일을 대행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나라는 지금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과 생생한 관계 속에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규정하고 제한한 우리 삶의 범위에 머무는 수준이 아니라 이 세계 현실 가운데 열려진 존재, 소통하는 존재, 초월하는 존재로서 살아가는가 하는 ‘영적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인성과 신성을 포함한 예수님의 인격이야말로 하느님과 인간과의 올바른 관계, 곧 하느님나라, 영원한 생명, 구원의 내용을 이 땅에 구체적으로 이루신 현실이 됩니다. 

하느님나라에 우리를 초대하시고 인도하시고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영은 하느님의 현존으로서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하느님나라는 관념적, 추상적, 타계적 세계가 아니라 오늘 우리 삶에 침투해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와 능력입니다.  

오늘 주님의 비유는 그 하느님 나라의 현실성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입신상태에서, 가사상태에서 보고 온 영계의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나라는 우리 안에 자라나는 생명력(겨자씨)입니다.(참조: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마태 17:20)

하느님나라는 우리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한 영향력(누룩)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우리 삶의 전부를 걸고 추구할 만한 절대적인 가치(보물과 진주)입니다.

하느님나라는 막연하고 덧없는 백일몽이 아니라 우리 인생살이에 대하여 엄연하고 엄중하고 예외없는 하느님의 심판(그물)이 됩니다. 

이 세상의 삶 가운데 하느님나라를 생생히 느끼라고 들려주신 비유를 깨닫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은 서두에 말씀드린 하느님 나라에 관한 몇 가지 오해에 머물기 때문은 아닐까 합니다.  

저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 나라가 공허한 개념이 아니라 우리 삶의 생생한 현실이 되기를, 그렇게 살아가도록 성령님께서 이끌어주실 줄로 믿고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2008.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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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원하는가? 하느님 나라를 원합니다. 

참으로 무지 무지한 더위입니다.
여름이 더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좀 쉬라고 방학(휴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 자체에는 방학(휴가)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토록 정성을 다해,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쓰기에도 모자란다고 여기는 귀한 시간과 물질을 바쳐가며, 이렇게 하느님 앞에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솔로몬에게 현몽하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 하신 바로 그 질문을 지금 우리에게 하신다면 우리는 무엇을 청하겠습니까?
“사업의 번창”, “건강과 아름다움”, “화목한 가정”, “평안한 마음”... 물론 우리는 구할 것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답은 어떨까요?

“저는 오로지 하느님 나라에 살기를 원합니다.”  

물론 이 대답의 의미는 늘 강조하지만 “제발, 저를 저 세상 천국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십시오. 이 세상은 짧지만, 저 세상은 영원합니다.”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런 내용이라면 실은 “저 세상 따위는 난 관심 없어요. 그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죠.” 하는 정말 “아무 생각 없는” 미신자보다 그리 나을 것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것은 대략 이런 내용일 것입니다.

“저는 오로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살고 싶습니다.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누리며,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며,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느님의 뜻 안에 겸손과 순종으로 살고 싶습니다.”  

물론 우리가 현세의 삶을 포기하다시피 초탈하여 가난과 고난을 자원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닌 것도 정직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여 지혜에 더한 모든 영화를 누릴 수 있었듯이, 우리도 다른 것 말고 오로지 하느님나라를 구하면, 하느님 그 분과의 사귐에 더하여 이 세상의 모든 선한 것을 다 누리고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하느님나라는 모든 인생에게 허락된 기회요 초대입니다.
하느님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에의 순복(順服)이고 주님과의 동행이며 주님과의 사귐이고 하느님 품에서의 안식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말씀으로 시작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변화로 자라나며, 그 변화된 인격과 삶, 사회구조의 의로움과 평화, 자연과의 조화들로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나라는 생명력(겨자씨)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영향력(누룩)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우리 삶의 전부를 걸고 추구할 만한 가치(보물과 진주)입니다.

하느님나라는 하느님의 심판입니다.(그물)

우리 인생은 하느님 나라를 내면에 깨닫고 외면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2005.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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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있는 믿음, 보배로운 믿음 

성전을 넓히고자 건물과 땅을 보러 다녀보니 좋은 곳일수록 제값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모자라는 재정을 생각하면 “왜 나는 이다지도 가난할까” 답답해집니다.

마음 같아서는 큰 몫을 봉헌해서 단번에 성전건축을 이루어내고 싶지만 그것은 기분이 그렇다는 것 일뿐 실제로는 재력도 부족하고 또 그렇게 봉헌할만한 제 믿음도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결국 모든 일을 다 아시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우리들을 들어 쓰셔서 큰일을 이루어 내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제가 재력이 부족한 까닭은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역시 필요한 만큼 열심히 일하지 않은 때문이고, 해야 할 저축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적시에 투자를 제대로 하지 못한 때문일 것입니다.  

제게 믿음이 부족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를 들 수 있지 않을까요? 필요한 만큼 열심히 기도하지 않은 때문이고, 해야 할 공부를 하지 않은 때문이고, 또 온전히 헌신하지 않은 때문이 아닐까요?  

현세의 “투자”에도 바른 판단이 필요하고 또 용기가 필요합니다.
판단도 흐리고 용기도 없다면 그냥 이대로 평생 살게 되고 맙니다.

우리의 믿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에게 귀한 것인지, 무엇이 생명력이 있는 것인지 주님의 뜻과 사랑과 복음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발견하고 분별해낸 복음의 진리를 위해 내가 소유한 것, 아니 나 자신 전부를 투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삶으로 누릴 수 있고, 다른 이에게 감화력 있게 하느님나라 소식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2002. 7.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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