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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깨어 있으라!

by 분당교회 2017. 12. 3.

2017년 12월 3 설교말씀

성공회 분당교회 김장환 엘리야 신부

마르 13:24-37


깨어 있으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교회력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먼저 주보에 실은 대림절의 신비와 신앙이라는 글을 읽어드립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대림1주일입니다. 대림절기란 성탄일 전 4주간 동안 세상의 구원자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待臨의 시간입니다. 라틴어로 “다가오다”(Adventus)는 뜻인 대림절기(Advent)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신비를 되새깁니다.


그 신비의 첫 번째는 이천 년 전 아기 예수님으로 오신 하느님의 사건입니다. 성탄절은 산타클로스의 날이 아니라,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시고 부활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러 연약한 아기 예수님으로 오신 날입니다. 우리가 기쁨과 더불어 겸손하게 회개와 절제의 마음으로 성탄절을 준비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두 번째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현존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성찬례를 통하여,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사십니다. 매일 순간마다 우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모시고 삽니다. 


세 번째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향한 기대와 희망입니다. 첫 번째 오심으로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를 주님의 다시 오심으로 온전히 완성하겠다고 예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나라를 우리는 믿음으로 경험하고, 희망으로 앞당겨 살아가며, 사랑으로 세상에 증언합니다.


깨어있는 신자는 대림절의 신앙의 신비를 온전히 누립니다. 대림절기에 요청하는 회개와 절제의 생활은 우울한 부담이 아닙니다. 신앙의 신비 속에서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려고 우리 자신을 깨끗이 단장하는 행복한 시간입니다. 


대림절기에는 제대 주위의 화려함을 피하고 ‘대영광송’을 하지 않습니다. 제대 아래를 보십시오. 사철나무 위에 4개의 초를 마련했습니다. 사철나무는 인간에게 내려질 하느님의 새로운 생명을 의미하고 네 개의 초는 구약의 4천 년을 뜻한다고 합니다. 


매주 촛불을 하나씩 늘려 밝힘으로써 구세주께서 가까이 오셨음을 알려 주고 마음의 준비를 갖도록 해 줍니다. 대림절기에 사제는 회개와 속죄의 뜻으로 자색 제의를 입습니다.


대림 절기 동안 읽게 되는 성경 본문들은 모두 종말과 관련된 말씀들입니다. 오늘 서신을 보면 종말에 대한 초대교회선조들의 신앙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고전 1:7-8, “모든 은총의 선물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도 여러분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끝까지 굳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고대하고 있다”는 말이 영어성경에는 “eagerly wait for‘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초대교인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강렬하게, 열정적으로, 간절히, 기쁨과 설레임으로 기다렸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온 생애는 사실 대림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신자들의 인사말은 “마라나타”였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우리는 매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이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이 고백이 진짜인가요? 여러분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eagerly wait for‘하고 계시나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대림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마르 13:33, “그 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

마르 13:35, “집 주인이 돌아올 시간이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혹은 이른 아침일지 알 수 없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마르 13:37, “늘 깨어 있어라.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대림 1주일에 하느님께서는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각 구절마다 사용된 단어들을 살펴보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33절, 항상 깨어있으라. 영어로 Be on guard! Be alert!이라고 합니다. 개역성경에는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주의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블레포'란 말입니다. ‘눈을 띠지 않고 지켜보는 것입니다. 맹수들이 사냥할 때 먹이감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다가 기회가 오면 먹이를 덮치는 것처럼 ’지켜보는 것‘을 말합니다. 


눈을 띠지 않고 지켜본다는 것은 준비가 완료된 상태를 말합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때를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35절, 37절, 깨어 있으라. 영어로 keep watch, watch입니다. 개역성경도 깨어 있으라보 번역되어 있습니다.


헬라어로 ‘아그립프네오’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졸음을 쫓아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에서도 영적으로 졸고 있는 때가 있습니다. 때로 영적인 깊은 잠을 잘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큰일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깨어 있는 삶을 알아듣도록 비유로 ‘문지기’를 말씀하십니다. 문지기는 졸지 않고 경계를 늦추지 않습니다. 도둑으로부터 주인의 재산을 지켜내며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립니다. 문지기가 경계 태세를 갖추지 않고 졸거나 잠이 들면 큰일 나는 겁니다. 


문지기의 사명은 깨어 주인의 재산을 지키고 있다가 돌아오는 주인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이렇게 ‘깨어있는 삶’이란, 바로 “기도하는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제 복음 말씀입니다. 루가 21:36, “너희는 앞으로 닥쳐올 이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매일 복음에 묵상 글을 올려주는 소피아자매님이 어제는 이렇게 댓글을 달았더군요. “말씀이 아직도 펄떡거리며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그저 살지 않기! 깨어서 기도하기! 


어떤 사람이 수도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왜 매일 깨어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한다고 해가 뜨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수도자는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뜨는 해를 볼 수 없다.”


자연의 이치를 아는 사람은 무화과나무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압니다. 깨어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차립니다.  


여러 차원의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소원의 성취를 위해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간구기도’가라고 합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대신 기도합니다.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다 소중한 기도입니다.


하느님은 자녀인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십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님의 때에, 하느님의 방법으로, 응답하십니다. 기도하면 일하시는 하느님을 은총을 경험하게 됩니다. 간구하십시오. 중보하십시오. 


그런데 또 다른 차원의 기도가 있습니다. ‘친교의 기도’입니다. 오늘 서신 고전 1장 9절입니다.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해주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는 삶이 기도하는 삶입니다. 


묵상 가운데 주님께 묻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주님의 마음과 뜻을 알아가는 기도입니다.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사귐의 기도’입니다. 친교의 기도, 사귐의 기도가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부합하는 기도입니다.


‘사귐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그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인격에 하느님의 마음과 뜻이 담겨지기 때문입니다. 변화되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레오 톨스토이는 “세 가지 질문”이라는 단편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톨스토이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라고 합니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불확실한 시간일 뿐이지만, 지금 경험하는 이 시간은 내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과거에 만난 사람은 이미 지나갔고, 미래의 만날 사람은 불확실할 뿐입니다. 오로지 지금 얼굴을 마주한 사람이 가장 필요하고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곁에 있는 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톨스토이는 이것이 인간이 세상에 온 유일한 이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깨어 있음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만남’‘하는 일’에 자신이 바친 사랑의 깊이로 가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림절기는 오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믿음으로 깨어 기도하기를 연습하고 훈련하라고 게으른 우리를 초대하는 시간입니다. 


분주한 연말이지만 ‘예배와 기도’에 열심하여, 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은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멈추어 주님을 바라볼수록, 우리를 “지금 여기 내 곁의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면서, 마침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끝까지 지켜주시는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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