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지혜로운 이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3월 2일 연중 8주일 설교 말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에 ‘유로지비’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성스러운 바보, 또는 광신도를 뜻하기도 하는 이 말은 죽은 나무에 여러 해 동안 물을 주어 싹이 나게 했다는 수도사에게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어리석은 바보이지만 신에게는 성스러운 사람을 말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주로 세상에서는 똑똑하다는 사람들에 대비되는 인물로서 ‘유로지비’를 등장시켰습니다. 때로는 ‘백치’로, 조시마 장로처럼 세상 많은 사람들이 성자로서 존경하는 인물로서(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리고 쏘냐(죄와 벌)와 같은 인물로서 나타냈습니다.
쏘냐는 주정뱅이 아버지와 병든 계모, 그리고 동생들을 위해서 몸을 파는 창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늘 성경을 읽고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초인의식에 가득 차 있는 라스꼴레니꼬프는 쏘냐에 의해서 자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형 생활을 하는 중에 유형수들이 소냐를 사랑하는 것을 보고 참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소냐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도 아니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해주는 것도 없는데 유형수들이 쏘냐를 기다라는 것이 참 신기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쏘냐가 라스꼴레니꼬프를 찾아 방문하다가 길에서 만나면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합니다. “소피아 세묘노브나, 당신은 우리의 어머니예요.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우리의 어머니요!” 난폭하기로 유명한 유형수들이 작고 빼빼마른 존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쏘냐가 미소를 지어 주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급기야 라스꼴리니꼬프는 절대 죄를 회개하지 않는 그 완고한 마음이 결국 허물어져서 소냐의 발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쏘냐가 가진 것은 없었습니다. 내세울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쏘냐는 완악한 마음을 변화시키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신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빈 마음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지혜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이고,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고린 3:18-19) 세상에서는 바보라고 여기지만 하늘에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바로 유로지비와 같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약속만 믿고 길을 떠난 아브라함도, 파라오의 권세에 맞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소명을 받은 모세도 어찌 보면 세상에서는 바보와 같으나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 지혜로운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서와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와 같은 순수한 신앙인의 삶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걱정하지도 염려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무겁게 느끼는 고통스런 삶의 무게는 아마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걱정과 염려의 무게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위한 것보다는 소유와 집착으로 인한 걱정과 염려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워 허덕이고 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더 많이 갖지 못해서, 또는 그것을 잃을까봐 걱정합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못 가져서 속상하고 남보다 못하다고 여겨져서 불행합니다. 오히려 더욱 물질에 집착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을 욕하고 손가락질한다고 해도 물질에 예속된 삶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다가 위치와 상황이 바뀌면 더 많은 부패와 부정이 저질러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다보니 한 번 주어진 이 소중한 삶을 물질의 노예가 되어 낭비하게 됩니다.
신앙인이 정작 추구해야 할 것을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다보면 먹고 자고 입을 것은 다 따라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활이 어느 정도 풍족하게 되었을 때 하느님 일을 하겠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간은 오지 않습니다. 봉사와 헌신의 기회를 다 떠나보내고 역량과 기력이 다 소진되었을 때는 이미 늦습니다.
하느님이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목표이자 최선의 가치입니다. 믿음으로 그 길을 갈 때 걱정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힘이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기용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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