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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10월 11일 (연중 28주일) 강론초 (마르 10:17-31 부자청년, 백배의 상)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0. 6.



2009년 10월 11일 연중 28주일 성서말씀
 
욥기 23: 1-9, 16-17

1 욥이 말을 받는다. 2 오늘 또 이 억울한 마음 털어 놓지 않을 수 없고 그의 육중한 손에 눌려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겠구나. 3 그가 어디 계신지 알기만 하면, 당장에 찾아 가서 4 나의 정당함을 진술하겠네. 반증할 말도 궁하지는 않으련만. 5 그가 무슨 말로 답변하실 지를 꼭 알아야겠기에 그 하시는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어야겠네. 6 그가 온 힘을 기울여 나를 논박하실까? 아니, 나의 말을 듣기만 하시겠지. 7 그러면 나의 옳았음을 아시게 될 것이고 나는 나대로 승소할 수 있을 것일세. 8 그런데, 앞으로 가 보아도 계시지 않고 뒤를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는구나.

9 왼쪽으로 가서 찾아도 눈에 뜨이지 아니하고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도 보이지 않는구나. 16 하느님 앞에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전능하신 분 앞에서는 간담이 서늘해지는구나. 17 차라리 온통 어둠에 싸여, 나의 얼굴이여, 흑암 속에 묻혀라.

히브 4:12-16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 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 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피조물치고 하느님 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앞에는 모든 것이 다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그분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늘로 올라 가신 위대한 대사제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에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킵시다. 우리의 사제는 연약한 우리의 사정을 몰라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은총의 옥좌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받아서 필요한 때에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르 10:17-31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 와서 그 앞에 무릎을꿇고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진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고 한 계명들을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선생님,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그러나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놀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똑바로 보시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지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자비하신 하느님,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참 길을 가르쳐 주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죽음에 이르는 죄의 길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참 길로 가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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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마르 10:17-31)

오늘 복음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하신 주님의 유명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들으며 마음이 계속 편안하셨다면 아마도 정말 부자는 아니시거나 참된 신자가 아니실 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셨어요?

혹시 주님의 말씀은 그 유별난 부자청년에게 하신 말씀이지 내게 직접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하고 생각하시는가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의 부자들은 오늘의 부자청년 처럼 유별나게 주님 앞에 나와서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묻지 않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주신 재물의 축복을 감사하며 적절히 자선을 베푸는 부자들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결정적으로 세상살이에 중요한 것은 역시 재물의 소유, 재물의 능력이라고 확신합니다. 재물이 넉넉하면 교회도 짓고 성직자도 좌지우지하고 심하면 교단을 자기 입장이나 취향에 맞게 선교방향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전혀 쓸데없는 일이기는 하지만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진정한 관심을 갖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구태여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고 재물의 힘만으로도 세상살이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공연히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복음적인 가치관을 철저히 받아들였다가는 부자인 상태를 유지하는 일 자체가 어려워질 지도 모릅니다. 부자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이런 점들을 느끼고 처신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스스로 그다지 부자는 아니시라고 생각하셔서 이 복음을 남 의 이야기 듣듯 해도 되는 것처럼 겸손해^^하셔도 실은 오늘 복음이 추궁하는 바를 피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곧 이어 베드로가 나서서 “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무엇을 버렸습니까? 적어도 모든 것을 버리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세상적인 가치기준이라도 버린 것일까요? 이런 물음 앞에 서면 우리는 또 교활하게도 “저희는 베드로처럼 완전한 제자가 못됩니다. 어찌 우리를 열 두 사도에 비기시나요?” 하고 슬쩍 피해가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따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처지를 몰라서 홀로 딴 세상 말씀을 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으로서 은밀한 것이라도 모르시는 바 없으신 주님입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은 우리는 이미 재물의 힘을 잘 알고 있고 그만큼 재물의 유혹에 한없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재물을 얻기 위해 하느님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재물을 잃는 일은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고백하는 현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에 주님은 영원한 생명과 백배의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의 일부는 우리 인생의 참다운 기쁨과 행복을 교회공동체를 통해서 맛볼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재물을 버리고 신앙을 택하라”고 기대하거나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실상 할 수 없는 일을 명분을 내세워 남에게 하라고 하는 것은 위선적인 일이고 쓸데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서 주님을 따르는 삶”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때로는 어쩌면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도 ‘여전히!’ 주님을 따르는 삶”일지도 모릅니다.
나 자신이 아직 그런 삶이 아니라면 당분간 침묵할 일입니다. 공연히 나서서 “영원한 생명”을 혼자 얻은 듯 행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은밀히 골방에서 이렇게 눈물로 기도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으십니다. 저는 약하고 겁많은 인간이오니 참으로 제게 알맞는 구원의 길을 허락하시고 성령으로 동행하여 이끌어 주십시오.”

재물을 통해서 받는 모든 인정과 존경은 실은 재물 자체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재물을 모두 잃고서도 내게 무엇이 남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참으로 비참한 존재로 전락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도리어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가난한 영혼을 되찾을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가능한 한 인간적인 자신감에 있어서는 꼴찌가 되어 주님의 자비와 은총을 사모해야 지혜로운 일일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첫째가 꼴지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9.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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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마르 10:17-31)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부(富)”에 대한 성경의 입장입니다. 얼핏 가난한 사람들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처럼 보이고 부자는 손가락질이나 저주의 대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상대적으로 더 심각한 세상살이의 고통과 비참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그런 삶 속에서 주님만을 바라보는 희망과 서로서로를 아끼는 사랑으로 더불어 살 줄 안다는 점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은 도무지 차별 없이 극진하시기에 도리어 가난한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주님은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물질을 경멸하시거나, 재물의 소유 여부에 따라서 심판하시는 것은 결코 아닐 터입니다.

정직하게 생각해보면 가난 그 자체는 결코 좋은 게 아닙니다. 가난의 원인이 개인의 게으름이든, 어쩔 수 없는 불운이든, 사회 구조악(社會 構造惡)이든 어쨌든 가난은 나쁜 것이고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러나 가난을 통해서 세상살이를 깊이 알게 되고, 삶에 꼭 필요한 것들이 주어진 것을 만족하고 감사하며, 그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랑을 배운다면 그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생각할 때 부(富)는 그 자체로 좋은 것입니다. 부자가 된 까닭이 부지런한 덕분이든, 물려받은 재산이든, 유능함의 댓가이든 부(富)는 충분히 우리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富)로 인해서 인생의 불가피한 문제들을 그저 피해가기만 한다면, 정확히는 다른 이에게 떠넘기만 한다면, 그리고 부귀영화가 주는 자기만족에 취해 끝없이 소유에 매달린다면, 그래서 부를 차지하고 지키는 일에 모든 인생의 가치를 두고 산다면 그것은 크나큰 불행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는 너무도 잘 알려진 구절을 포함합니다.
“하느님나라를 위하여,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는 주님의 메시지를 전할 자신이 제게 없습니다.  설교자의 본분을 지키느라 꾹 참고 그대로 그렇게 전한다하더라도 과연 우리가 그 훌륭한 부자청년보다 더 나은 사람일까요? 내심 그것은 너무나 분명한 말씀이지만,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주님의 첫 제자들조차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수군거립니다.
주님의 답은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처지와  욕망과  결단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정직해야합니다. 우리의 진지한 구도도, 종교적 성실도, 용기 있는 장담도 모두 살아계신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신뢰하며 주님께 향해지고 맡겨져야 합니다.
나머지는 모두 주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 신뢰가 바로 믿음입니다. (2006.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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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배의 축복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우리는 무엇을 바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현실의 삶을 뒤로 버려 두고 나선 제자들의 대표로서 나선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현세에서 백배의 축복을 약속하시고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주십니다. 보상, 즉 대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약속은 어쩌면 평범하고 상투적인 것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이 팽팽한 긴장감을 갖는 것은 바로 제자들의 현실 때문입니다. 우리의 세상 포기는 대부분 “만일” 의 가정이지만, 제자들의 세상 포기는 베드로의 말 그대로 “보시다시피”라고 할 수 있는 실제였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과 초대교회의 교우들과 복음서의 처음 독자들은 모두 자기들의 신앙을 통해서 부귀영화를 누리기는 커녕 도리어 박해와 모욕과 멸시를 받았을 뿐입니다.
유대인 교우들은 자기들의 공동체에서 쫓겨나 모든 것을 잃는 처지였고 이방인 교우들은 로마의 탄압으로 가족과 재산과 목숨을 잃은 이들이 이루 셀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은 어찌 된 일입니까?  헛된 장담일 뿐입니까?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그저 희망을 주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자기 소유와 아집을 다 버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약속은 확실한 소망인 동시에 분명한 현실입니다. 우리의 모든 축복의 근거는 주님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한 지경에 처하더라도 주님의 사랑은 변치 않으시고, 우리가 절망하고 슬픔에 있을 때라도 주님의 위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사랑이고, 주님의 위로는 고독과 배반과 채찍과 못 박힘의 고통의 길을 걸으신 그 주님의 위로이며, 주님의 능력은 바로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체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생각하면 우리는 참으로 마땅히 받을 것보다도 백배 천배의 과분한 은총을 이미 풍성히 무상으로 받은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나의 영혼부터가 하느님의 무상의 선물입니다. 무슨 보상을 더 구할 여지도 없이 우리는 값을 매길 수 없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 가운데 이미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진실로 “저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 하고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겠지요. (2003.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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