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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9월 20일 (연중25주일) 강론초 (마르 9:30-37)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9. 14.


2009년 9월 20일 연중 25주일 성서말씀

잠언 31:10-31

10 누가 어진 아내를 얻을까?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다.
11 남편은 넉넉히 벌어 들이는 아내를 믿고 마음이 든든하다.
12 백 년을 한결같이 속 썩이지 않고 잘해 준다.
13 양털과 모시를 구해다가 손을 놀리니 즐겁기만 하구나.
14 마치 상선과도 같아 멀리서 양식을 구해 온다.
15 아직 어두울 때 일어나 식구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여종들에게 일을 맡긴다.
16 밭을 사도 잘 생각해서 사고 제 손으로 벌어 포도원을 장만한다.
17 허리를 동인 모습은 힘차고 일하는 두 팔은 억세기만 하다.
18 머리가 잘 돌아 하는 일마다 잘 되고 밤에 등불이 꺼지는 일도 없다.
19 손수 물레질을 해서 손가락으로 실을 탄다.
20 불쌍한 사람에게 팔을 벌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뻗친다.
21 온 식구를 두둑히 입혀서 눈이 와도 걱정이 없다.
22 손수 이부자리를 만들고 모시와 붉은 털로 옷을 짜 입는다.
23 남편은 지방 어른들과 함께 성문에 앉아 존경을 받는다.
24 모시로 옷을 지어 팔고 띠를 만들어 상인에게 넘긴다.
25 몸매무새에는 힘과 위엄이 나타나고 앞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26 입을 열면 지혜로운 말이 나오고 혀를 놀리면 친절한 가르침이 나온다.
27 항상 집안 일을 보살피고 놀고 먹는 일 없다.
28 그래서 아들들이 일어나 찬양하고 남편도 칭찬하기를,
29 "살림 잘하는 여자가 많아도 당신 같은 사람은 없소" 한다.
30 아름다운 용모는 잠깐 있다 스러지지만 야훼를 경외하는 여인은 칭찬을 듣는다.
31 그 손이 일한 보답을 안겨 주고 그 공을 성문에서 포상해 주어라.

시편 1

1.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따라 가지 않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않으며 ∥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

2. 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3.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으니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
4.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5.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6.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주께서 /보살/피신/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야고 3:13-4:3, 7-8

13 여러분 가운데 지혜롭고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14 여러분은 마음속에 고약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을 품고 있으니 공연히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15 이런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며 동물적이며 악마적인 것입니다. 16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이 있는 곳에는 분란과 온갖 더러운 행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17 그러나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는 첫째 순결하고 다음은 평화롭고 점잖고 고분고분하고 자비와 착한 행실로 가득 차 있으며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8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심어서 정의의 열매를 거두어들입니다. 3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7 그러므로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는 여러분을 떠나 달아날 것입니다. 8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은 손을 깨끗이 씻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은 순결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마르 9:30-37

30 예수의 일행이 그 곳을 떠나 갈릴래아 지방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31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따로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일러주셨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가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께서는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에게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제자들은 길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35 예수께서는 자리에 앉아 열두 제자를 곁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고 말씀하신 다음 36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앞에 세우시고 그를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곧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주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도 겸손과 순종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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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김의 그리스도
(마르9:30-37)

“예수”라는 분이 왜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되는 것일까요? 그 내용을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건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니야? 그냥 받아들이면 되지, 왜 내용을 알아야 해? 이렇게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이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무수한 교주들이 나타나서 스스로를 그리스도라고 주장했고 또 예나 지금이나 많은 목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고 “나머지는 내 말대로 해라” 하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사도들의 교훈을 계승하려고 애쓰며 복음서와 서신을 쓰고 모으고 정경으로 확립한 것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입니다.

왜 예수가 그리스도이신가를 알고 고백하려고 우리는 성경을 통해 나자렛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을 배우고 구원과 구세주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기대와 체험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전하는 바, 예수가 그리스도인 까닭은 대개의 사람들의 통념과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충성심에 대한 보답으로 전능한 능력으로 어려운 난관을 해결해주는 구원자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 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과 사람들에게 대한 철저한 섬김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고 열 두 제자들조차 이러한 가르침에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지금 우리도 여전히 이 점에서 혼란스럽지 않은가요?
우리는 어떤 믿음과 마음으로 하느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도 여전히 전지전능한 해결사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통념이 남아있지 않을까요?
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권장할만한 신앙생활이 아닐까요?
섬김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은 단지 무력하고 고난 받는 그리스도라야 진짜라는 의미일까요?

바른 이해는 성경이 전하는 구원의 다른 표현인 “하느님의 다스림” 또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 담겨있습니다.
단순히 전능함에 바탕을 둔 하느님 이해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사랑의 통치가 아닌 심판과 저주의 통치로 오해하게 합니다.
보상을 전제로 한 우리의 충성심은 실은 하느님 그 분 자신보다도 그 분의 보상에 더 관심을 두게 합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보상과의 잘못된 관계 속에 살게 되는 것이지요. 

섬김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단순히 섬김이 좋은 미덕이라는 윤리적 차원의 교훈이 아닙니다. 주님의 섬김에 대한 가르침을 다른 사람을 잘 섬기면 더 좋은 보상을 받으리라는 약속으로만 이해하지 마십시오.

진정한 섬김을 실천하면 보잘 것 없는 어린이가 예수님처럼 여겨질 수 있고 그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다는 신앙의 신비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2009.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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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과 부활을 거듭 예고(豫告)하시는 까닭
(마르9:30-37)

복음서는 오직 한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독자로 하여금 나자렛 출신 그 “예수”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려는 것이지요. 구원의 기쁨도, 삶의 지혜도, 전도의 열정도, 순교의 용기도 모두 이 예수님에 의한, 그리고 예수님에 관한 기쁜 소식에서 나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먼저 관심하시고 주도하시며 전적으로 주관하신다는 뜻이 있고, 또한 예수님이 철저히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시며 모든 순간, 모든 때를 하느님과 일치되어 사셨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 성삼위의 성자(聖子)로까지 높여지고 흠숭을 받으시게 되지요.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우리를 위해 하느님이 기름 부어 보내주신 자, 곧 구세주(救世主)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는 선입견을 갖기 쉽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막강한 권능을 예수님께 주시어 우리를 현실의 고통스런 상황에서 건져내 주시길 기대하는 것이지요. 제자들의 마음 속에도 이 능력의 인물을 추종하여 높은 한 자리를 얻어 보자는 마음, 가능하면 더 높은 자리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또한 솔직히 그와 비슷한 기대, 그저 우리가 바라는 것을 모두 얻었으면 하고 주님 앞에 나오지 않나요? 연약한 우리로서 큰 잘못은 아닐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과 부활예고를 전하며 복음서는 이렇게 넌지시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따로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따로 가르치신” 그 내용이 바로 주님의 수난예고입니다. 누가 높은가로 길 위에서 다투던 열두제자를 곁으로 불러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 깨우쳐주십니다.

오늘날 어떤 교회의 모습은 우리를 마음 아프게 합니다. 못된 지도자들이 복음을 변질시켜, 세상을 향해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그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회 안으로 세상의 논리, 세속의 가치를 들여오는 일에 열심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복음을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세상적인 성공을 보장하는 수단이 아닐까 여겨서 서로 전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지요. 간절한 통성기도, 열심한 교회봉사, 긍정적 신념, 신앙을 통한 자아성취, 심지어 제자훈련 마저도 모두 “너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것이 성공이다”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신앙은 구원의 정보를 독점하여 행세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를 비워 예수를 따르며 보답의 기대 없이 사랑함 자체로 기쁨을 누리는 일입니다. (2006.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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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난과 부활을 거듭 예고(豫告)하시는 까닭

오늘 복음서는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과 부활예고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고를 단순한 사실정보의 예보로 알아들으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그저 우연한 상황 전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백한 판단과 결단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수난과 부활이 있으리라는 예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수난을 이미 감당하시기로 각오하시고 피하지 않으셨다는 예수님의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삶이 십자가에서 끝날지라도 결코 성부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신뢰를 포기하지 않겠노라는 그 다짐이 더욱 고귀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예고는 장차 기적적인 부활이 있을 터이니 기대하고 있으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그런 메시지를 못 믿을 정도로 예수님을 불신했다면 말이 안되는 일입니다. 수난예고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과연 어떤 분인지, 곧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가르치시려는 데에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되는 그 예수님께서  권력으로 내리 누르는 다스림이 아니라, <자기희생을 통한 섬김>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몸소 보여주신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데에 수난예고의 본뜻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이 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수난예고 후에도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가를 두고 다툽니다. 자신들의 욕망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의 수난의 참뜻, 곧 우리에게 필요한 구원의 도리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섬기는 사람>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보잘 것 없고 보답할 능력도 없는 이들을 섬길 수 있는 삶이야말로 참된 구원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2003. 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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