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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9월 27일 (연중 26주일/성소주일) 강론초 (마르 9:38-50)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9. 24.



2009년 9월 27일 연중 26주일 감사성찬례 성서말씀

에스 7:1-6,9-10,9:20-22

1 그리하여 하만은 왕과 함께 에스델 왕후가 베푼 잔치에 참석하게 되었다. 2 이 두 번째 날에도 왕은 술을 마시면서 에스델에게 물었다. "에스델, 어서 소청을 말해 보오. 무엇이든지 들어 주겠소. 진정 소원이라면, 나라 절반이라도 떼어 주리다."

3 왕후 에스델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만일 임금님께서 소첩을 귀엽게 보아 주신다면, 또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이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제 소원은 이것입니다. 제 겨레도 살려 주십시오. 제발 부탁합니다. 4 지금 저와 저의 겨레는 다 죽어 멸종될 처지에 이르렀읍니다. 종으로 팔려 간다고만 해도 아무 말씀 안 드리겠읍니다. 그러나, 그 일로 임금님께서 입으실 손해는 무엇으로 메우시겠읍니까?" 5 "도대체 그 놈이 누구요? 그런 음모를 꾸민 놈이 지금 어디 있소?" 하고 아하스에로스왕이 캐어 묻자,
6 왕후 에스델은 그제야 사실을 털어 놓았다. "우리를 박해하는 우리의 원수, 그 사람은 바로 이 교활한 하만입니다." 에스델의 입에서 이 말이 떨어지자, 하만은 왕과 왕후 앞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9 왕을 모시던 내시 가운데 하르보나가 나서서 말하였다. "마침 하만의 집에 높이가 쉰 자나 되는 기둥이 하나 서 있읍니다. 임금님을 살려 드린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하만이 세워 둔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그 기둥에 이 놈을 달아라." 어명을 따라, 10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세웠던 기둥에 자기가 매달려 죽게 되었다. 그제야 왕의 노여움이 풀렸다.
20 모르드개는 이 일을 기록하여 두었다. 그리고 아하스에로스 왕국 각 지방에 사는 유다인들에게 원근을 가리지 않고 전갈을 보내어 21 해마다 아달월 십 사일과 십 오일을 축일로 지키라고 지시하였다. 22 이 달은 쓰라림이 기쁨으로 바뀌고 초상날이 축제일로 바뀐 달이요, 이 날은 유다인들이 원수에게서 풀려 난 날이라, 이 날을 기쁜 잔칫날로 지내며 선물을 주고 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뻗는 날로 삼으라고 하였다.


야고 5:13-20

13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마음이 기쁜 사람은 찬양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14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15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모두 온전해질 것입니다. 올바른 사람의 간구는 큰 효과를 나타냅니다. 17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게 간절히 기도하자 삼 년 육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18 그가 다시 기도하자 하늘은 비를 내렸고 땅에서는 곡식이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19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갈 때에 누가 그를 바른 길로 돌아서게 한다고 합시다. 20 그러면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한 그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용서받게 해줄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마르 9:38-50

38 요한이 예수께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9 예수께서는 "말리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41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
42 "또 나를 믿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43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45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발을 찍어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절름발이가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47 또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애꾸눈이 되더라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9 누구나 다 불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그 소금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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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주 하느님, 성자께서는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베푼 자선도 주님께 행한 것이라 말씀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로 하여금 이웃의 어려움을 늘 살피게 하시고, 주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늘의 상을 얻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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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의 관계성, 구원의 연대성 (마르9:38-50)

사람과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에는 크게 다른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것을 실체의 존재로 보는 방식입니다. 이른바 원자 또는 단자 같은 실체들로 우주와 세상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도 우리 스스로가 한 실존, 이른바 신 앞의 단독자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관계의 얽힘으로 보는 방식입니다. 이른바 <화엄(華嚴)의 그물망>이라는 생각이지요. 망으로 얽힌 수없이 많은 보석들이 서로에게 서로의 빛을 비추어 그 하나하나 안에 전체가 들어있다는 그런 그림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통상 우주와 인간의 실상을 존재 또는 실체로 보는 것은 서양적인 인식의 전통이고 이와 달리 관계 또는 과정으로 보는 것은 동양적인 인식의 전통이라고 구분합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곰곰이 묵상해보면 그 인식이 서양적이기보다는 동양적으로 느껴지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별로 성경적으로, 복음적으로 들리지 않으시는가요? ^^
중요하지 않은 말씀을 이 귀한 시간에 구태여 드릴 까닭이 없습니다.
하나마나 들으나마나 그런 말씀이 아니라 들으시고 이해하여 두시면 매우 유익한 내용일 수 있음을 믿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면서도 예수님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참으로 황당한 일이 되겠습니다.
저도 요즘에 우리 성공회를 보면서 비슷한 기분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분명히 성공회 신자, 성직자, 교회라고 하는데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전도 하며 다른 초점의 가르침과 주장을 주고 받는 이들이 많이 생겨난 것이지요. 그 분들은 성공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열심을 다하는 중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자면 구태여 말리지 말아야 할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몸된 교회, 성공회를 사랑하는 이들이 성공회에 해로운 일들을 하지는 않겠지요. 한 가지 염려는 그 분들이 세상의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좋은데 세상의 지배질서를 마귀로 아는 대신에 자신들과 신앙적인 경험과 신학적인 견해가 다른 교회공동체 안의 사람들을 마귀의 무리라고 몰면 그 때는 어쩌나 하는 걱정입니다. 뭐, 그 분들도 오늘의 복음서를 잘 알고 있고 오늘도 읽고 있을 터이니 공연한 기우일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들이 서로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존중하는 것은 마땅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저는 제 신학적인 주장이나 가르침이 경험과 이해의 수준이 다른 어떤 분들에게 오해와 상처를 줄까봐 늘 조심스럽습니다. 아마도 실제로 많은 성직자들이 그런 조심스런 마음 때문에 어떤 사건이나 주제에 대해서도 일체 아무런 신학적 견해를 밝히지 않고 침묵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것 같습니다.
감히 고백하건대 저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 목에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 속에 던져질 저주의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기로 각오하며 이런저런 말씀들을 드리고 있습니다.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지 않고 제가 느끼지 않은 교훈이나 감동을 인위적으로 지어내어 유도하지 않으려 합니다. 제 설교가 이른바 은혜롭게 들리지 않는다는 평가는 별로 마음에 걸리지 않습니다. 다만 제 설교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데에 아무런 유익도 없다면 어찌하나 그것은 정말 제일 걱정입니다. 성령님께서 저를 통해 말씀하시도록 설교자인 저를 위해 그리고 청중인 여러분 자신을 위해 정말 많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서는 이어서 죄에 대한 엄격한 경계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죄의 문제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추상적인 죄의 본질을 가르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죄짓게 하지 말라, 실족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죄짓지 말라는 말씀은 쉽지만, 죄짓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좀 어렵습니다.
죄짓지 말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완전한 존재가 되라는 말씀처럼 들린다면
죄짓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완전한 관계를 살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실상 인간의 죄는 관계의 문제입니다.
신앙적으로 죄의 문제는 어떤 구체적인 잘못을 행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나 자신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해서 여전히 이기적인 존재, 자기중심적인 존재로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차원의 문제입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기에 구원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죄를 단순히 형사적인 범죄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세상에서 우리의 이기적인 존재 자체가 죄의 뿌리입니다. 우리는 욕망하고 어리석으며 시기하고 미워하며 줄곧 분노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내가 홀로 개인적인 차원의 죄를 짓느냐 안짓느냐를 씨름하는 일이 중요한 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식의 접근은 자칫 우리를 해결책 없는 문제를 씨름하며 위선에 빠져들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차원에서 하느님과 다른 이들과 얼마나 올바른 관계를 살아가고 있느냐가 참으로 중요한 죄의 문제입니다.

죄는 곧 우리 모두가 어떻게 올바른 관계를 살아가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죄악과 고통에 빠져 있는 현실은 곧 나 자신의 죄성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죄의 관계성을 깨달아야 구원의 연대성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는 한 사람은 동시에 남을 죄짓게 하는 그 사람입니다.
죄의 구체성은 우리가 처한 생존의 조건과 현실에서 비롯합니다. 우리 한 사람이 룰을 어기면 다른 모든 사람이 또한 룰을 어기고자 하는 충동과 함께 룰에 대한 불신으로 고통스러워 합니다. 적어도 열 사람의 의인이 있어야 한 사회가 멸망하지 않는다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한 사람의 죄인은 또 다른 죄인을 낳고 서로를 불신하고 진실된 존중과 협력이 불가능하도록 사회를 마비시키기 때문입니다. 

지옥과 영생을 대비하시며 손과 발과 눈을 찍고 빼어서라도 죄를 피하라고 경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하느님의 형벌의 잔인함을 강조하시려는 말씀이 아닙니다.

손과 발과 눈 등의 구체적인 것을 가지고 전체를 나타내는 것은 히브리 사람들의 표현법입니다. 손이 취하는 것, 발이 처하는 입장, 눈이 보는 시각 이런 것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죄를 피하는 일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공동체는 잘나고 성한 사람이 아니라 못나고 상한 사람, 불구자, 장애인들로 채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죄를 피하기 위해서 스스로 장애인이 되기를 자청한 이들 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 그리스도교의 신자들을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들은 낮은 처지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모든 것을 버리면서 스스로 낮아지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착하고 가난하고 무능한 사람을 보며 우리가 세상의 손가락질을 여전히 겨누고 있다면 우리는 신자가 아니라 그를 죄짓게 하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신자는 그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심과 물욕과 능력을 포기하였음을 알아보고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교우들 서로의 모습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보게 된다면, 그리고 그 모습을 멸시하지 않고 진심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기쁨이고 친교이며 주님께 우리의 사랑을 봉헌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죄성은 저주의 위험인 동시에 은총의 기회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돌이키며 우리는 우리의 죄된 본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기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늘 남에게 죄짓게 할 위험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나 욕망이나 입장이 진리를 좌우하는 것처럼 내세우고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우리 인생을 통하여 깨우쳐야 할 “사랑”과 “은총” “자비와 나눔”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자신을 낮추어 보잘 것 없는 이들이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왜 주님께서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셨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 안에 부패하지 않을 사랑의 소금을 지니고 서로 화목하며 사는 일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2009.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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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짓게 하지 말라! (마르9:38-50)

복음서(福音書)라면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의 말씀인데 종종 우리는 복음서를 읽으며 당혹스럽습니다. 우리의 기대와 상상을 넘어서는 오늘의 말씀도 마치 무슨 “호러영화”, “조폭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습니까?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진다”느니, “손과 발을 찍어버리고 눈을 뽑으라”느니, “불소금에 절여질 것이라”느니, 도무지 인자하신 예수님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말씀이 거침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서를 읽으며 두려움과 민망함에 휩싸이기 전에 귀를 쫑긋 세우고 예수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죄”를 다루는 말씀을 전하고 계신데, 사랑으로 불타는 그 눈을 똑바로 보면서 그 분의 자비하심을 느끼지 못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인 죄”의 차원이 아닙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도둑질 했다고 손을 자르고 거짓말 했다고 혀를 자르는 식의 화끈하지만 야만적인 어느 종교의 수준은 아니시겠지요.
예수님과 성경이 말씀하는 죄는 인간적으로 시시비비를 따지며 왈가불가하는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죄의 본질은 우리의 존재가, 우리의 삶이 살아계신 하느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즉 하느님을 향하여 서서 자기 자신을 살피며 순종하지 아니하고 하느님을 등지고 서서 아무 생각 없이 제멋대로 사는 상태를 “죄(罪)”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죄의 상태로 인하여 우리네 인간들은 온갖 구체적인 범죄들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깨어진 관계, 하느님께 등돌린 상태라는 “죄”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이지요. 여기까지는 잘못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 때 “율법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율법의 조문”에만 집착하게 될 때 일어납니다.  율법의 명령과 금령 613가지를 들이대며 사람들을 정죄하고 징계하는데 골몰하다보면, 그만 본래 하느님의 뜻, 즉 사람들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그 자비하심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를 두고  “계명이 들어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로마7:9)”고 바울로 사도는 표현합니다.
실상 죄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본래 율법의 목적인데 지나치게 율법조문에 매이다보니 그만 죄 자체가 더 중요한 것이 되고 나는 도리어 그 죄 때문에 멸망해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린다는 것이지요.

계명을 지키기도 어렵거니와 설사 계명을 철저히 지킨다 해도 그 수준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즉 “하느님의 의(義)”를 통하여 누리는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사실 별게 아닙니다. 말하자면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이나 계명의 노예가 되는 것이나 노예인 것은 마찬가지라 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나를 믿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죄짓게 하지 말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단지 잘 믿는 이들을 꼬셔서 타락시키지 말라는 뜻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꼬셔서 유혹에 넘어간 죄는 생각보다 그리 심각하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내심 못마땅하게 여기는 우리 잘난 사람들의 못된 성품입니다. “믿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며 방해하는 것이 정말 심각한 죄인 것입니다. (2006.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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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무엇에 너그럽고 무엇에 엄격합니까?

제자 요한이 예수님께 일러바칩니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 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읍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뜻밖에도 “말리지 말아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하고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즉 교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끼리’에만 관심을 두고 우리와 친하지 않은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대한다면 우리 공동체는 한낮 “패거리”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 이름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고, 주님께서 맡기신 “하느님나라의 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실천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늘 열린 모임이 되어야 하고 또 실천하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교우들의 모임이든, 성직자들의 모임이든 패거리가 되지 않고 참된 공동체가 되려면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무엇을 위해 모여 어떤 일을 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늘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다니는지”의 여부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 자체입니다. 우리와 인간적인 명분이나 이해관계가 얽힌 일은 되도록 너그럽게 처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맡겨진 하느님나라의 일은 작은 일이라도 엄격하게 존중하고 협력하고 수행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는 우리 모두에게 풍성히 주어집니다.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언행판단이 다른 교우를 그 주님의 사랑과 진리로부터 멀어지고 벗어나도록 하는 나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고 주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소금’은 우리가 무엇을 너그럽게 여기고 무엇을 엄격하게 여길지를 참으로 분별하는 지혜가 아닐까요? (2003.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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