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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10월 4일 (연중27주일) 강론초 (마르 10:2-16)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9. 30.



2009년 10월 4일 연중 27주일 성서말씀 
 
욥기 2:1- 10

1 또다시 하늘의 영들이 야훼 앞에 모이는 날이 왔다. 사탄이 그들 가운데 끼어 있는 것을 보시고 2 야훼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디 갔다 오느냐?" 사탄이 대답하였다. "땅 위를 이리저리 돌아 다니다가 왔읍니다." 3 야훼께서 사탄에게, "너는 내 종 욥을 눈여겨 보았느냐?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그는 여전하지 않느냐? 네가 나를 충동하여 그를 없애려고 했지만 다 헛일이었다."

4 그러자 사탄이 대답하여 아뢰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꿉니다. 사람이란 제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내놓지 못할 것이 없는 법입니다. 5 이제 손을 들어 그의 뼈와 살을 쳐 보십시오. 제가 보장합니다. 그는 반드시 당신께 면전에서 욕을 할 것입니다."
6 야훼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이제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인다. 그러나 그의 목숨만은 건드리지 말아라." 7 사탄은 야훼 앞에서 물러나오는 길로 곧 욥을 쳐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심한 부스럼이 나게 하였다. 8 욥은 잿더미에 앉아서 토기조각으로 몸을 긁었다. 9 그의 아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도 요지부동이군요? 하느님을 욕하고 죽으시오."
10 그러나 욥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조차 미련한 여인처럼 말하다니!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여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


히브 1:1-4, 2:5-12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아들에게 만물을 물려주시기로 하셨습니다. 3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4 그리고 천사의 칭호보다 더 높은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으심으로써 천사들보다 더 높은 분이 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시지는 않습니다.
6 성서에 어떤 이가 이렇게 증언한 대목이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잊지 않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돌보십니까? 7 주님은 그를 잠시 천사들보다 못하게 하셨으나 영광과 영예의 관을 씌우셨으며 8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시키셨습니다." 이렇게 만물을 그에게 복종시키셨다는 것은 그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아직도 만물이 다 그에게 복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9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는 죽음의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못하게 되셨다가 마침내 영광과 영예의 관을 받아 쓰셨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겪으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소치입니다. 10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물은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많은 자녀들이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로 하여금 고난을 겪게 해서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1 사람을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리낌 없이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당신을 찬미하겠습니다."


마르 10:2-16

2 그 때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께서는 "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일렀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4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은 허락했습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5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이 법을 제정해 준 것이다. 6 그런데 천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사람은 그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돌아 와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물으니 11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 12 또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청하자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랐다. 14 그러나 예수께서는 화를 내시며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6 그리고 어린이들을 안으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본기도>

주 하느님, 예수께서는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순결한 믿음으로 주님을 섬겨, 마침내 주께서 약속하신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니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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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믿음
(마르 10:2-16)

예수님 당시 어린아이는 한 인격으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어린아이를 덜 된 어른, 불완전한 인간으로 여기는 경향이 남아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어린아이에 대한 평가는 이중적입니다. 어린아이의 순진한 마음은 오늘 복음서와 같이 매우 높이 평가됩니다. 하지만 바울로 사도는 생각하는 일에 있어서는 어린아이와 같지 말고 성숙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아이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그 마음의 순진함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어린이와 같은 쓸모없는 존재를 데리고 와서 축복을 요청하여 예수님의 귀한 시간과 사역을 방해하는 데에 제자들은 신경이 날카롭습니다. 제자들은 당시의 통념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복음서에서 드물게 보이는 예수님이 분노하시는 이유가 됩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가까이 오게 하시고 이런 어린아이들과 같이 순진한 마음이라야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어린아이를 축복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마음을 욥의 믿음을 통해 보여줍니다.
욥은 사탄의 계교에 의해 시험받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느님의 주권 하에서 그 시험이 진행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욥이 소유하고 있던 것을 다 잃은 후에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변하지 않자 사탄은 욥 자신의 몸을 질병으로 내리칩니다. 잿더미에 앉아 옹기조각으로 부스럼을 긁고 있는 욥을 보며 그의 부인은 “차라리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리세요”하고 울부짖습니다.

욥은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 욥의 이 믿음이 바로 순진한 믿음입니다.
욥은 자기의 믿음을 조건으로 하느님의 축복을 요구하거나 장담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과 종교적인 거래를 하는 태도는 대체로 신실한 종교인들에게 더 많습니다.
욥을 찾아왔던 친구들이나  예수님 당시의 바리사이나 신앙을 하느님과의 종교적인 거래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네가 이런 불행을 당한 것은 사람은 몰라도 뭔가 하느님만이 아시는 잘못을 저질러서 받는 징벌이니 잘 살피고 회개해야 해!” 얼핏 신앙적인 이런 태도를 하느님은 위선이요 잘못된 이해라고 평가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에 중요한 것은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순진한 믿음은 그 살아계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의심하지 않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떠보려고 질문을 던지는 바리사이들이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율법을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뜻” 을 내세워 상대화시키십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바라시는 그 뜻과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철저한 율법준수도 고작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놀라운 통찰입니다.

순진한 믿음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깊이 신뢰하고 마음껏 누리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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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이 짝지어 주시었나? (마르 10:2-16)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명절을 치르고 나면 이혼이 증가한다는데 오늘 복음서는 이혼에 관한 말씀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이혼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사람에게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달리 표현하면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는가” 에 관한 교훈의 말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오랜 동안 교회는 오늘 본문에 근거를 두고 이혼이 불가하다는 교회법을 강조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의 적지 않은 신자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혼을 경험하게 되지만, 교회 안에서 그 아픔과 상처를 위로받고 치유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정죄 받고 움츠리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역사교과서의 단편, 지엽적인 표현을 따라 “성공회는 헨리 8세가 이혼하려고 만든 교회”라고 단순무식하게 이해하며 부정적인 선입견을 보이는 것도 유감스럽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

오늘의 복음을 찬찬히 읽어보면 최초의 질문은 예수님을 떠보려고 “(율법에 나와 있는 대로 이혼장을 써주기만 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물은 것입니다. 이것은 자유로운 합의이혼, 또는 사유 있는 불가피한 이혼이 신앙적으로 죄가 된다는 수준의 논의가 아닙니다.

이혼장이 거론된 신명기 24:1절의 본래 취지는 아내를 남편의 소유물처럼 여겨서 함부로 소박하고 학대하지 말고 이혼장을 써주어 새 출발의 기회를 주도록 한 일종의 여성 보호 장치입니다. 그런데 진실로 여성을 존중할 마음이 없는 가부장적 남성들에게는 여성(아내)을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는 남성(남편)의 특권을 보장하는 법처럼 오해되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혼인의 정신을 창세기 2장을 들어 설명하십니다.
 “천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혼은 불가하다. 신앙적으로 죄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매우 기계적인 해석입니다.

정말 새겨들을 중요한 내용은 결혼은 절대로 무슨 거래가 아니라는 것, 즉 집안이나 국가 사이의 정략결혼일 수 없고, 무슨 조건을 얻기 위한 약삭빠른 처신일 수 없다는 것, 오로지 당사자가 자유로운 사랑과 결정을 통하여 완전하고 성숙한 인간을 지향하며 함께 걷기를 다짐하는 구도의 길, 생활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결혼, 즉 혼배성사는 하느님 앞에서 자유로운 두 사람의 영원한 약속입니다.

우리는 장담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혼배는 정말로 “하느님이 짝 지어주신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서로를 귀한 영혼, 존경하고 아끼고 서로 도울 배필로 여기십니까? 그렇게 혼배하시고 그렇게 생활하십니까?

정직하게 성찰하면 신앙인에게는 이혼이 불가한 게 아니라, 애초에 하느님이 짝지어주시지 않은 결혼이 불가한 것입니다..!

이혼한 이들을 흰자위 드러낸 눈으로 쳐다볼 일이 아니라, 우리는 과연 배우자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사랑하는가를 반성할 일입니다.
결혼생활을 빙자하여  폭군처럼 행세하는 자는 사라져야 합니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이용하여 장사꾼처럼 거래하는 자들도 사라져야 합니다.
장난처럼 결혼했다 이혼했다를 반복하며 주위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이들도 사라져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진실로 존중하고 존대하는가를 반성할 일입니다.

가정과 교회를 하느님이 세우신 두 가지 신적인 기관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아마도 이 가정과 교회는 다른 많은 기관과 제도와 달리 인간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게 하는 유일한 인간의 조직이라는 점입니다.

가정에서 한 어린아이가 태어났을 때 우리는 생명에 대한 찬미와 감사로 기뻐합니다. 특별히 곤란한 사정, 이상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무능력한 짐덩어리가 생겨났다고 저주하는 법은 없습니다.
가족 가운데 불행스럽게 병이나 사고로 몸을 다친 이가 생겼을 때에도 모두가 사랑으로 나서서 간호하고 치유하려 애를 씁니다. 특별한 사정이나 가치관이 아닌 다음에야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 저 인간이 하루빨리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존재 그 자체를 긍정하는 곳입니다.
인간의 조건으로 인간을 판단하지 않는, 가정을 제외하고는 지구상의 유일한 기관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것은,,우리가 하느님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생각, 하느님의 눈길, 하느님의 손길을 빌어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바라보고 그렇게 실천하며 살기를 다짐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린아이가 오는 것을 막지 않으시고 안으셔서 축복해주신 예수님은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 하십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맑은 사람들을 보며 그에게서 하느님의 차별없는 눈길을 느낄 수 있으면 그는 맑은 영혼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힘없는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연민의 마음을 느낄 수 있으면 그는 사랑으로 충만한 영혼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의지하고 신뢰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들을 항한 하느님의 아버지 되심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겸손하고 지혜로운 영혼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구원을 받은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06.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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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과 이혼

수도자가 아닌 재속의 사람들에게는 결혼이 곧 중요한 성소(聖召)입니다. 수도자도 사실은 예수님과 결혼을 한 것이지요.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결혼이 단순한 제도가 아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결혼은 신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고 둘은 혼인으로 한 몸이 됩니다. 결혼은 하느님께서 짝 지워주신 것, 그러므로 사람이 나눌 수는 없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어느 덧 우리사회에도 이혼이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세 쌍이 결혼하면 그 중 한 쌍은 이혼을 하는 세상입니다. 너무 쉽게 결혼을 하고 너무 쉽게 헤어집니다. 혼인이 거룩한 것이 되지 않고 단순히 인간적인 결합, 세속적인 거래로 격하되었습니다.

이혼이 나쁘다, 이혼은 안된다 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참된 결혼으로 이혼을 피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말씀도 단순히 이혼을 정죄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혼장 하나를 써주고 마음대로 아내를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런 처사는 결혼의 참된 의미를 훼손하는 일방적인 횡포라고 나무라시는 말씀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힘 있는 쪽이 그렇지 못한 배우자를 <버리는>일이 간음죄의 본질이 됩니다.

결혼 마저도 자기의 욕심을 차리는 계기로 삼으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혼이 세속적으로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만나 신분상승과 안락한 삶을 누리자는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결혼은 우리 삶을 거룩하게 하는 하느님의 성소(聖召)입니다. 
우리의 배우자를 내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고 그 인연에 대하여 충실히 살아가는 삶은 진실로 위대한 것입니다.
세상살이에 시달리고 부대낀다해도, 부유하거나 궁핍하거나, 건강하거나 병약하거나 부부가 변함없이 사랑과 가정을 지켜나가는 것은 참으로 하느님께 칭찬받을 일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드리는 혼인의 서약은 단순히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으로 환원될 수 없는 거룩한 경지로 이미 나아간 것입니다.

거룩함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짝 지워주신 배필에게 내 모든 것을 다해 진실하고 성실하면 그것이 거룩합니다.
그래서 바울로 사도는 남편과 아내 의 관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처럼 되어야 한다고 권고하는 것이겠지요.^^ (2003.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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