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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10월 18일 (연중29주일) 강론초 (마르 10:35-45)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0. 15.



2009년 10월 18일 연중 29주일 성서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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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8:1-6

1 야훼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대답하셨다.
2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3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해 보아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렇게 세상물정을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5 누가 이 땅을 설계했느냐? 그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6 어디에 땅을 받치는 기둥이 박혀 있느냐? 그 누가 세상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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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 5:1-10

1 대사제는 누구나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서 사람들을 대표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사제는 속죄를 위해서 예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2 대사제는 자기도 연약한 인간이므로 무지하거나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동정할 수 있습니다. 3 그는 또 이렇게 연약하기 때문에 백성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의 제물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4 이 영예로운 직무는 자기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얻는 것입니다. 5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는,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6 또 성서의 다른 곳을 보면, "너는 멜기세덱의 사제 직분을 잇는 영원한 사제이다."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7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8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10 하느님께로부터 멜기세덱의 사제 직분을 잇는 대사제로 임명받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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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10:35-45

35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선생님, 소원이 있습니다. 꼭 들어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37 그들은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38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으셨다. 39 그들이 "예,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도 내가 마실 잔을 마시고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기는 할 것이다. 40 그러나 내 오른편이나 왼편 자리에 앉는 특권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앉을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

41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을 보고 화를 냈다. 42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놓고 "너희도 알다시피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44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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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전능하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목숨을 바쳐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웃을 섬기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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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난의 잔, 고난의 세례  (마르 10:35-45)

신앙생활에 대하여 반성할 때 첫 번째 살필 일은 내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물론 가장 중요하지만 그것은 훨씬 후에 다룰 수 있는 차원의 물음입니다.
모든 교우들은 이렇게 물어보셔야 됩니다. “나의 신앙이 먼저인가, 교회의 신앙이 먼저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체로 우리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절대자에 대한 갈망을 느끼고 그 절대자의 존재나 섭리를 경험하게 해주는 종교나 교회를 선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앙이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느냐의 문제라는 점에서 이런 이해도 일리는 있습니다. 삶과 분리된 신앙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진실이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실제 경험하는 삶은 ‘나’라는 개체가 주관적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체험하는 것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훨신 더 높고 깊고 풍요로운 현실입니다. 신앙은 나의 입장에서 절대자를 경험하고 선택하고 규정하고 섬기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은 절대자의 은총과 섭리 안에서 우리 삶의 깊은 차원을 깨닫고 수용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에서 출발하지만 두 가지 성사(聖事)의 문을 거쳐야 합니다.
하나는 세례성사이고요 하나는 성체성사입니다.
성사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자면 몇 권 분량의 이야기로도 모자랍니다. 가장 쉬운 이해는 성사(聖事)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혼자 하느님을 경험하고 혼자 하느님을 따르면서 살아간다면 ‘말씀’은 물론 필요하지만 ‘성사’의 필요성은 느끼지 못합니다. 성사는 개인적인 말씀체험을 공동체적인 말씀체험으로 인식을 깊고 높게 해줍니다. 개인적인 신앙을 공동체적인 신앙으로 자라나도록 해줍니다.
지금 우리 성공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신앙은 결코 각 사람의 개인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이고 거룩하고 열려있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성공회의 신앙입니다. 우리의 교리는 각자 생각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말씀과 성사를 통해서 계시되신 성교회의 하느님에 관하여 알려줍니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말씀을 드리느냐구요?
무엇보다도 교회는 각 신자가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모인 회집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힘에 의해 교회공동체의 지체가 됩니다. 이 기본적인 사실을 인지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의 많은 내용이 달라지게 됩니다.

신앙을 통해서 우리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일은 극히 적은 성취입니다. 신앙을 통해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일이 가장 중요한 성취입니다. 그 일은 동시에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고 나의 고통과 기쁨, 다른 이의 슬픔과 행복을 깊이 이해하는 일입니다. 죄와 악에 물든 세상과 그 위에 도래하는 하느님의 나라를 깨닫고 참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해서 교회의 그러한 차원의 믿음을 과거로부터 가져오고 미래로부터 앞당기며 오늘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높은 한 자리를 청탁하는 야고보와 요한은 우리 모두의 개인적인 욕망을 대표하여 발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예수님은 실상 우리 모두에게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의 의미를 기억하는가를 간곡히 되물으시는 것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이미 세상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이전의 자아를 포기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단지 한 순간의 이벤트가 아니라 우리의 일생을 뒤바꾸는 사건입니다. 잠깐의 경험이 아니라 지속되는 신분의 변화입니다. 세례와 십자가와 부활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세상의 인정과 존경을 받으며 온갖 행복을 누리는 일이 약속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 안에서 죽으며 하느님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신비가 약속됩니다. 우리의 세례는 실상 고난의 세례인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신앙의 가치를 지키고 신앙의 원리를 따라 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우리의 그 고통스런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봉헌물로 드려집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고난을 통해서 완전해지신 분,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대사제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봉헌물을 완전하고 거룩하게 해주십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 살아계심으로 변화시켜 주신 성체와 보혈을 우리가 먹고 마심으로 우리는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에 일치하게 됩니다. 성찬의 잔은 수난의 잔이며 동시에 생명의 잔입니다.

현실을 신앙에 의지하여 살아가며 겪게 되는 고통과 위로, 슬픔과 기쁨, 상실과 희망을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전제로 하여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땅에 하느님의 다스림이 확인되기 위해 드러나는 고통과 그 고통을 통과함으로써 진실로 경험하게 되는 하느님의 주권과 사랑을 우리는 고백하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받는 우리 신자들의 성사적인 삶은 곧  “수난의 잔”을 마시고 “고난의 세례”를 받는 삶이 됩니다.

실패하여 헛수고가 되버린 듯한 사역, 가장 가까운 이에게 당하는 배신, 육체적 고통, 죽음의 두려움, 모욕과 비웃음, 하느님께 버림받는 듯한 허망한 죽음...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을 겪으시고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수난의 잔을 마시고 고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우리가 살아계신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인자무한하심을 깨닫는 일이 가능해졌다는 이해가 우리가 우리의 식별력으로 해 낼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결코 인간적인 지혜일 수 없습니다.
섬김을 통하여 왕이 되시고 죽으심을 통하여 부활의 그리스도가 되신 그 신비를 깨닫는 일을 우리는 부활체험, 부활신앙이라고 이름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뢰 자체가 참으로 하느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신비인 것입니다.

그 신비를 우리가 어떻게 경험하게 되는가?
그 경험을 “말씀과 성사”의 교회공동체를 통해서 하게 된다는 것이 성공회에 속한 우리의 찬양어린 고백인 것입니다. (2009.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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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를 섬겨 주시는 하느님  (마르 10:35-45)

“선생님, 소원이 있습니다. 꼭 들어주십시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드린 이 말씀은 너무나 인간적으로 와 닿습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 편에 하나는 왼 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아! 이천년의 세월을 뛰어넘고 종교와 세속의 구분을 뛰어넘어 우리는 “청탁(請託)”이야말로 모든 인간관계의 꽃(?)이요 기대하는 열매(?)임을 복음서에서도 보게 됩니다. ^^


청탁을 거절하는 통상의 방법은 “그럴만한 힘이 내게 없다”는 것인데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신 듯...  “이 무슨 하찮은 수작이냐”고 호되게 나무라시지 않고 “그것은 오직 아버지의 권한이다” 고 피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는 의롭고 능력 있으신 그 분의 것으로는 좀  뜻밖입니다.

미루어 짐작컨대 실제 제자들의 추종과 희생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임을 이미 아셨기에...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나?” 고 물으시는 주님의 마음은 몹시 안쓰러웠을 듯 합니다.


두 제자의 배신스러운 청탁에 다른 제자들이 화를 내자 예수께서는“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고 타이르십니다.

이 진리의 말씀은 그러나 세상에서 잘 통하는 무슨 현명하고 유용한 처세술의 차원이 아닙니다. 

주님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 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 대목에서 단순한 처세술이 아닌 위대한 신비를 향하여 도약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성육신(化肉, Incarnation)의 신앙고백은 “신이 인간의 탈을 쓰고 잠시 쇼를 벌였다”거나  “인간이 놀라운 능력을 보이며 신처럼 행세했다”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참 뜻은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섬기러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까닭은 바로 그 “섬김”을 완전히 실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섬김은 인간에 대한 아부가 아닙니다. 인간의 거짓과 위선을 진리로 다그치고 꾸짖으시는 준엄함입니다.
그러나 무자비한 정죄와 심판은 아닙니다. 인간의 추함과 약함을 사랑으로 안아주시고 붙잡아주시는 자비와 은총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섬기신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섬김을 받는 존귀한 사랑의 존재다” 라는 깨달음과 그에 걸맞는 실천이 바로 우리들 믿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2006.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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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이 하느님을 의지하듯

우리는 무엇을 바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지난 주에 이어 오늘도 다시 묻는 질문입니다. 어쩌면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우리 신앙인이 늘 진심으로 대답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물음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뒤따르는 것일까요?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주님의 물음에 야고보와 요한은 간절히 대답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오른 편과 왼 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이에 대해 주님은 <영광>을 누리려면 <고난>을 참아 받아야 하고, 또한 <으뜸이 되는 일>은 곧 <섬기는 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일러주십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우리 마음에도 여전히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웬 일일까요? 신앙생활은 본래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일 텐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도리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가을빛 물드는 자연으로 나와서 맑은 공기와 나무와 풀과 시냇물을  바라보며 예배를 드리고 애찬을 나눕니다.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자연은 아무런 욕심을 지어내지 않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자연은 지음 받은 그대로의 모습을 말없이 지키고, 주어진 생명을 마음껏 누리다가, 때에 맞춰 변화를 받아들이고, 마침내 조용히 사라져갑니다. 그리고 또 기회가 허락되면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오지요. 이런 자연의 모습은 그 자체가 정말로 위대하고 장엄한 신앙고백입니다. 우리 믿음이 저 자연을 닮을 수 있을까요?

일찍이 이천 년 전  예수님도 바로 이런 자연 속에서 제자들에게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늘에 나는 새를 보아라, 들에 피는 저 꽃들을 보아라, 모두 하느님을 의지하여 걱정 근심 없이 아름다운 삶을 누린다. 그런데 너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도 무슨 근심, 걱정, 욕심과 미움이 그리도 많으냐?”

욕심 없이 그저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우리는 구름 같고 바람 같고 물같이 유유하고 평화롭고 자유자재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쓸데없이 헛된 영화를 탐내지 말고 지금 여기 내가 있는 이 곳이야말로 하느님께 내게 주신 세상에서  제일 귀한 자리인 줄 받아들인다면 더없이 복된 일일 것입니다. (2003.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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