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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10월 25일 (연중 30주일) 강론초 (마르10:46-52)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0. 23.


2009년 10월 25일 연중 30주일 성서말씀

욥기 42:1-6, 10-17

1 욥이 야훼께 대답하였다. 2 알았읍니다. 당신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이루십니다. 3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운 자, 그것은 바로 저였읍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읍니다. 4 당신께서는 말씀하셨읍니다.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5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읍니다. 6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10 욥이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니, 야훼께서 욥의 소유를 회복시켜 주셨다. 야훼께서 욥의 소유를 전보다 두 배나 돌려 주셨다. 11 그의 동생들과 누이들, 또 그의 옛 친지들이 찾아 와서 그의 집에서 함께 먹고 마셨다. 그 동안 야훼께서 욥에게 내린 재난이 얼마나 괴로왔느냐고 동정어린 말로 그를 위로하면서 저마다 돈을 주고 금반지를 끼워 주었다. 12 야훼께서 욥의 여생에 전날보다 더한 복을 내려 주셨다. 양 만 사천 마리, 낙타 육천 마리, 겨릿소 천 쌍, 암나귀 천 마리에다 13 또 일곱 아들과 세 딸도 주셨다. 14 첫딸의 이름은 예미마라 하고, 둘째 딸의 이름은 케지야라 하고, 세째 딸의 이름은 케렌 하뿌아라 지어 주었다. 15 전 세계에서 욥의 딸들만큼 아리따운 여자를 찾을 수 없었다. 욥은 딸들에게도 그들의 오빠에게 준 것과 같은 유산을 나누어 주었다. 16 그 후 욥은 백 사십 년을 살면서 사대손을 보았다. 17 욥은 이렇게 수를 다 누리고 늙어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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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 7:23-28

23 다른 사제들은 누구나 다 죽게 마련이어서 한 사람이 사제직을 계속해서 맡아볼 수가 없으니 결국 사제의 수효가 많아졌습니다. 24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원히 사시는 분이므로 그분의 사제직은 영구한 것입니다. 25 이렇게 예수께서는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재자의 일을 하시니 당신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26 우리에게는 이렇게 거룩하고 순결하고 흠도 죄도 없고 하늘보다 더 높으신 대사제가 필요합니다. 27 다른 대사제들은 날마다 먼저 자기들의 죄를 용서받으려고 희생제물을 드리고 그 다음으로 백성들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날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속죄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이 일을 한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28 율법을 따라 대사제가 된 사람들은 연약한 인간이지만 율법이 생긴 이후에 하느님의 맹세의 말씀을 따라 대사제가 되신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영원히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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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10:46-52

46 예수와 제자들이 예리고에 들렀다가 다시 길을 떠날 때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그 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앞 못 보는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예수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8 여러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49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그들이 소경을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서라. 그분이 너를 부르신다." 하고 일러주자 50 소경은 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 다가왔다. 51 예수께서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52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예수의 말씀이 떨어지자 곧 소경은 눈을 뜨고 예수를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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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주 하느님, 눈 먼 이들을 보게 하시고 연약한 이들에게 힘을 주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진리에 눈 뜨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라 가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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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마르 10:46-52)

지지난주 복음서에서는 한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달려나와 무릎을 꿇고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하시며 결정적인 권면을 하십니다. “너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그 청년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는 또 한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앞못보는 거지 바르티매오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소리치는 그를 두고 예수님은 발길을 멈추고 그를 불러오게 하십니다. 제자들이 전합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서라. 그 분이 너를 부르신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그는 곧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라나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두 인물을 비교하며 나는 누구에게 가까운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저는 곧 잘 머리로 “영원한 생명”을 추론하곤 합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사목자인 저는 교우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권면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신비와 역설은 참 재미있고 놀랍습니다.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도리어 필요한 것은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가난해지고 고독해지고 비참해지는 일입니다.

모자람 없이 풍족하고 안온한 삶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진정으로 경험했다는 분을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게 여유가 있을 때는 우리의 관심사가 절로 “내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는가?” 하는 나 중심의 사고를 하게 됩니다. 이 때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을 받게 되면 우리는 “글쎄요...” 하고 머뭇거리게 됩니다. 야훼가 나의 목자가 아니시더라도 실은 별로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소중한 것을 상실하고 자신의 힘을 더 이상 의지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온 존재로 구하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한 인식에 도달합니다. 이 때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을 받게 되면 우리는 망설임없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 저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그 신실했던 욥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병고와 탄식 속에 자신의 고난의 의미를 찾습니다. 친구들은 찾아와 말합니다. “네가 무언가 잘못했기에 징벌을 받은게야.” 하지만 욥은 자기의 고난을 그런 단순한 설명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욥은 침묵r하시는 하느님께 대하여 한없이 호소하고 탄원합니다. 그 욥의 마지막 고백을 오늘 1독서로 듣습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인간들이 상정하듯 “우리가 이러이러한 조건을 채우면 반드시 저러저러 반응하신다”는 논리적 인과의 결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실상 우리는 신의 현존을 경험하기 위해 아무런 조건도 내걸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의지했던 것들을 상실하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찾고 바라고 탄원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거든, 그 고통스런 처지를 영혼으로 진정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반드시 자비를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소리쳐 부르십시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반드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서야 합니다.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시거든 선뜻 대답할 일입니다.
어떻게요? 아니,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만의 대답이어야 합니다. 그 답을 할 수 없다면 아직 우리는 절박하지도 않은 것이고 자비를 구하지 않아도 되는 한가한 형편일지 모릅니다.

의심없이 단호하게 대답하십시오. 그리고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말씀을 기쁘게 들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길은 그러한 경험과 간증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2009.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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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마르 10:46-52)

오늘 복음은 소경 바르티매오가 예수님께 자비를 탄원하여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는 구걸로 연명하던 소경이었으나,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그 분이 자비를 간절히 구하여 마침내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말씀을 통해 눈을 뜨고 그 분을 따라나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경청하며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합니다.
자신의 처지를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여 큰 소리로 부르짖었던 바르티매오의 그 “간절함”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 간절함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이루어주시는 변화를 두고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표현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됩니다.

신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고작 인간이 지어낸 관념일 뿐인가를 두고 인류는 오랫동안 논란을 벌여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논의는 철학적인 추론이나, 과학적인 실험으로 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 논의는 대뇌에 의존하는 지적인 능력보다도 온 몸으로 살아가며 경험한 삶과 세상과 역사에 대한 통찰이 필요합니다.

사실 유신론, 무신론의 논란의 본질적인 내용은 “신이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시공간에 실체로 존재한다” 든지 아니면 “신도 결국 인간의 두뇌작용, 심리작용에 불과하다”든지 하는 그런 주장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에게 의미 있는 신에 관한 논의는 “인간은 신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가”, “인간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하는 그런 내용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인간이 신의 자비를 필요로 한다는 인식은 지식적인 것이 아니고 고백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폭력적인 권위나 조작적인 기술을 써서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올바른 전도가 아닙니다. 참된 선교는 우리가 경험한 그 은총의 체험에 관하여 이론적으로 전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하느님의 자비를 오늘 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그 자비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지성이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십자가 사건”이 바로 우리를 위한 신의 “구원사건”이라는 주장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며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내용을 어떤 지적확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저주를 받는다고 위협적으로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 그리고 오늘날은 말씀과 성사와 삶 속에서 현존하시는 그 분을 통해서 경험한 그 사랑과 자비를 증언하고 우리 삶과 실천을 통해서 주님의 그 사랑과 자비가 세상에 전달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의 자비를 필요로 한다는 인식은 추론을 통한 지식일 수 없고 경험을 통한 고백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또 다른 바르티매오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학, 철학, 과학의 박사학위가 신의 존재를 논증할 수 있는 자격이 아닙니다. 간절히 신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낮고 서러운 삶이야말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필요로 하고 하느님을 신뢰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지적인 주장이나 확신이 아닙니다. 어떤 강고한 입장이나 신념이 아닙니다.
믿음을 우리 인간 편에서 하느님을 규정하고 붙잡는 수단으로 여기며 그 강도를 자랑하는 것은 실은  어리석고 위험한 일입니다.

 “긍정적인 신념을 가지면 그렇게 믿는 대로 된다” 는 주장, 좀 더 신앙적으로 “하느님께 간절히 구하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 들어주신다”는 믿음은 미묘하지만 관점을 달리해서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긍정적인 신뢰와 태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나 하느님께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어쩌면 결국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분명한 차이는 강조점을 우리의 요구 자체가 아닌 하느님의 자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간구가 주님의 자비로 구원받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그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주 예수님, 자비를 베푸소서!”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고, 그 자비를 누리며, 그 자비를 타인과 세상을 향해 베푸는 사람들이라는 진실입니다. (2006.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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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구합니까? 우리는 무엇을 바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오늘도 우리는 다시 묻습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주님의 물음에 야고보와 요한이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오른 편과 왼 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라고 야심찬 청탁을 드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에 비하면 예리고의 거지소경 바르티매오가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막무가내 큰 소리로 간청하던 끝에 그저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하고 간청한 것은 참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얼핏 불가능해 보이는 간청이기도 하지만, 생각하면 이미 눈을 뜨고 있는 이들로서는 별 것 아닌 청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눈을 뜬다 한들 세상살이가 뭐 대단하게 달라진다는 것입니까? 바르티매오는 물론 눈이 멀어서 거지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세상에는 눈 뜬 거지도 수두룩 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약삭빠르게 바르티매오가 “어차피 눈 뜨기는 틀린 몸, 그 대신 앞일을 내다보는 신통력을 제게 허락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것으로 점쟁이 노릇을 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했다면 더 현실적이었을까요?

그러나 믿음은 우리의 욕망을 실현하는, 소원을 성취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우리의 현실을 정직하게 내어 맡기는 일입니다.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르티매오의 믿음이 바로 그런 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눈을 떠서 주님을 따라 나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과연 예수님을 만났을 때 무엇을 청하려합니까?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면서 큰 소리로 외칠 간구가 마음에 있습니까?
지금 정말 어찌할 수 없어 보이는 심각한 곤경에 처했을지라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여전히 자비를 베푸시리라는 것을 믿습니까?
불필요한 허황된 것들을 구하지 않고 진짜 내게 필요한 것, 내 삶의 가장 절박한 문제꺼리를 정직하게 주님께 아뢰고 주님의 자비를 구할 수 있습니까?

생각하면 우리 육신의 나약함, 생활의 어려움은 차라리 일종의 은총이라 해야 할 것들입니다. 하느님 없이 교만하게 살지 않도록, 우리를 하느님 앞에서 정직한 인생으로 자비를 구하며 살아가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구하는 것입니까?  “주님께 정직하게 우리의 연약함을 맡겨드리고 주님의 자비를 구한다”는 것이 하나의 훌륭한 답일 것입니다. (2003.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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