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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8월 16일 (연중 20주일) 강론초 (요한 6:51-58)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8. 10.


2009년 8월 16일 (연중 20주일) 성서말씀

열왕상 2:10-12, 3:3-14

10 다윗은 선조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성에 안장되었다. 11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햇수는 사십 년이다. 헤브론에서 칠 년,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 년을 다스렸다.

12 솔로몬이 선왕 다윗의 왕좌에 앉았다. 그는 왕위를 든든히 굳혔다. 3 솔로몬은 야훼를 사랑하였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따라 살았다. 다만 한 가지, 그는 산당에서 제사하고 향을 피웠다. 4 기브온에는 큰 산당이 하나 있었는데 솔로몬은 늘 그리로 가서 제사를 드렸다. 솔로몬은 그 제단에 번제물을 천 마리나 바친 적이 있다. 5 야훼께서 그 날 밤 기브온에 와 있던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셨다. 하느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느냐?" 고 물으셨다. 6 솔로몬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는 저의 아버지인 당신의 종 다윗에게 한결같은 은혜를 베푸셨읍니다. 제 아버지가 당신의 면전에서 성실하고 올바르게, 또 당신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살았다고 하여 당신께서는 그에게 한결같은 은혜를 베푸셨고 또 오늘 그에게 주신 이 아들로 하여금 그의 왕좌에 앉게 하셨읍니다. 7 나의 하느님 야훼여, 당신께서는 소인을 제 아버지 다윗을 이어 왕으로 삼으셨읍니다만 저는 어린 아이에 지나지 않으므로 어떻게 처신 하여야 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8 그런데 소인은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당신의 백성 가운데서 살고 있는 몸입니다. 9 그러하오니 소인에게 명석한 머리를 주시어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수 있고 흑백을 잘 가려 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감히 그 누가 당신의 이 큰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겠읍니까?"
10 이러한 솔로몬의 청이 야훼의 마음에 들었다. 11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가 장수나 부귀나 원수 갚는 것을 청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옳은 것을 가려 내는 머리를 달라고 하니 12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리라. 이제 너는 슬기롭고 명석하게 되었다. 너 같은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 13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지 않은 것, 부귀와 명예도 주리라. 네 평생에 너와 비교될 만한 왕을 보지 못할 것이다. 1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이 내 길을 따라 살았듯이 내 길을 따라 살아 내 법도와 내 계명을 지킨다면 네 수명도 길게 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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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 5:15-20

15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서 미련한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사십시오. 16 이 시대는 악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 17 여러분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18 술 취하지 마십시오. 방탕한 생활이 거기에서 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19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20 또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 드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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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6:51-58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2 유다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서로 따졌다.

53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58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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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살아있는 빵으로 우리에게 주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로 하여금 성체를 받을 때마다 주께서 함께 하심을 알게 하시며 부활의 생명을 얻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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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공동체의 성찬례 (요한5:51-5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교우 여러분, 제 설교가 대체로 마음에 드세요?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며^^)
감사합니다. 저는 행복한 설교자입니다. 이 전례 중에 성경말씀의 선포에 이어 설교를 맡는 일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기쁨과 보람의 사명입니다.

그만큼 준비에 힘이 들고, 때로는 피하고 싶을 정도로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내가 과연 복음의 정수를 올바로 드러내고 전달하였는가, 그래서 교우들이 말씀의 능력에 힘입어 기쁨 가운데 새 힘을 얻도록 하였는가 하는 반성입니다. “지루하고 어려웠어요” 또는 “들으나마나 뻔한 이야기였어요” 하는 것처럼(물론 아무도 말씀은 안 하시지요. 표정으로 느끼는 것이지만요.) 느껴지면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참 좋았습니다” 하는 교우들의 인사를 들으면 그만 마음이 기뻐지는 게 사실입니다. 잘났다고 인정 받는 느낌은 물론 아니고 그저 제가 최소한의 소임을 다했구나 하는 안도감 때문입니다. 

물론 많은 선배 설교자들은 그런 칭찬을 즐기거나 기대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런 인사는 대개 실은 별로 은혜롭지 않았기에 도리어 앞으로 잘하시라고 건네는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그저 귀에 거슬리지 않는 무난한 말씀이었어요 하는 의미라고 합니다. 진짜 좋은 설교는 그런 인사말씀이 아니라 그 설교를 들은 교우가 정말 깊은 울림으로 영향을 받고 깨달아서 점차로 삶이 변화되고 그를 통해서 교회 공동체가 건강하게 성숙해가는 것으로 그 가치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교우들이 어렵고 복잡한 걸 싫어하신다는 것이 통념이지만, 설교는 때때로 어렵고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인생을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고 노래했습니다. 세상살이가 복잡하고 얽혀있으니 신앙생활이 단순하고 간단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쉽지 않은데 당연히 설교가 쉬울 수만은 없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나는 복잡한 이야기 필요 없어요, 그저 쉽고 편한 이야기로 내 마음을 위로해주고 즐겁게 해주고 힘을 주는 말씀을 해 주세요. 부담스런 이야기는 싫어요” 하고 요청하곤 합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칭찬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복음은 말재주로 전해지지 않는다고 바울로 사도는 말씀합니다.(1고린 2장 참조) 바울로 사도는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씀을 신앙생활에 신학적인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말씀으로 생각하시면 큰 오해입니다.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교회공동체에 참된 신학이 없으면 도리어 엉뚱한 말재주가 판을 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실제로 달변가가 아니었습니다. 바울로는 실제 만나보면 어눌하고 별 볼 일 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로 사도는 자기의 생생한 그리스도 체험과 자기가 이미 체득한 유대교의 이해를 결합시키며 신학적인 사색과 설교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교회에 보낸 그의 편지 곳곳에 녹아있는 그 신학적인 내용들은 결국 그리스도교를 세계적인 위대한 종교로 부족함 없도록 발전시키는 일에 크게 이바지 했습니다.

설교는 설교자가 청중을 만족시키려는 목적으로 하는 개인적인 입담일 수 없습니다. 설교는 성공회 공동체가 지금 이곳에서 필요로 하는 교훈과 깨우침을 함께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신앙적으로 표현하자면,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공동체에 성경말씀을 들려주시고 그 말씀을 해석해주시는 일입니다. 그 해석에는 우리 공동체가 처한 상황과 우리 교우들의 세상에서의 삶이 반영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공회의 설교는 신자들의 삶의 경험을 담아내야 합니다. 교우님들 각자가 성찬례에 오시기 전에 성서정과 말씀을 충분히 묵상하시고 그 묵상 안에 한 주간의 삶의 경험을 담아오셔야 합니다. 성공회의 설교는 그 묵상을 확인하고 드러내는 일입니다. 성경말씀과 공동체 교우들의 삶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성공회 설교자는 개인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대표인 것입니다.

성공회의 설교는 살아계신 하느님께 함께 귀를 기울이는 공동체적인 전례의 일부로서 교회력을 따라 이루어집니다. 설교자의 개인적인 관심과 신학과 언변에 의존하는 개신교적인 설교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공회의 모든 설교는 성공회 공동체의 신학과 전통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주제는 물론 “설교”가 아니라 “성찬례”, 성체성사입니다.
오병이어 이야기를 표징으로 삼아 요한복음은 성체성사의 신비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빵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성찬례를 통하여 깊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생존과 생활을 위하여 구하는 육신의 빵의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영적인 양식입니다. 생명의 빵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그 무슨 물질적 축복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져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그 자체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신앙생활의 알파요 오메가 곧 우리가 추구하는 전부입니다. 성체성사는 그 일치를 경험하게 해주는 놀라운 은총의 선물이고, 귀하고 귀한 기회입니다. 그런데 이 일치의 내용에 대해서 좀 더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현대인인 우리는 신앙생활을 개인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나라는 개인의 삶이 있고 그 개인으로서 선택한 신앙이 있고 그 신앙을 가지고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니다. 오늘도 이렇게 우리가 모였지만 이 모임을 개인들의 모임으로 여기기 쉽다는 것이지요. 성체성사도 내가 받는 성체와 보혈을 통해서 나라는 개인에게 나의 내면이나 나의 생활에 은총이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그런 개인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내가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도리어 하느님의 선택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고백하게 되고 또 그리 고백해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교회의 일원이 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성공회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여러분이 성공회를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지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실은 여러분이 성공회를 택한 것이 아니라 성공회가 여러분을 선택하였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께서 성공회를 통하여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성공회는 여러분이 선택하여 다니기로 한 교회의 이름이 아닙니다. 성공회는 여러분이 이루기로 결심한 교회공동체의 이름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십니까?

성공회 교우가 되기로 한 순간부터 여러분은 성공회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성공회는 여러분 밖에 있는 어떤 조직이나 집단이 아닙니다. 성공회는 열린 교회로서 여러분을 그 본질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을 제외하고는 성공회는 더 이상 성공회가 아닙니다. 그것이 공동체입니다. 여러분은 너무나 귀하고 귀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성공회가 저기에 따로 있고 여러분이 거기에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을 포함한 새로운 성공회 공동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하신 일 같습니까? 여러분을 성공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한 일은 단순히 여러분의 결심이 아니라 성공회가 공동체적으로 결정한 일입니다. 더 정확히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정하시고 이끄시고 도우시는 일입니다. 단순히 인간적 결심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확인하시고 보증하신 신앙적인 결단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사는 바로 이 차원의 신비를 경험하게 해줍니다.
오늘 복음 말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는 신비를 개인적으로 것으로만 이해하시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성체성사를 하기 전날 밤부터 음식을 드시지 않았습니다. 성체성사가 예수님의 몸과 피를 실제로 내 육신, 몸 안에 모시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지금 믿음이 소홀해져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찬례의 중요한 가치는 개인적인 것보다 공동체적인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말하자면 성체와 보혈을 받음으로 나 라는 개인이 몸과 마음과 영혼에 홀로 은총을 입은 것으로 이해하시는 것은 60점짜리라는 말씀입니다. 성체와 보혈을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공동체의 일원인 것을 깊이 깨닫고 우리가 우리 서로를 감사하고 기뻐하는 차원까지 이르셔야 만점짜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하신 말씀 가운데 “내 안”과 “그 안”이라는 표현은 막연한 관념적 신비체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 교회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일치는 우리 각 개인이 관념적으로 황홀경 속에서 체험하는 신비체험이 전부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일치는 바로 교회공동체를 통한 일치입니다. 성찬례를 통해서 우리는 교회공동체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살과 피의 실제적인 차원, 관계적인 차원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일은 우리가 공동체로 하나되는 신비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일이 중요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일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하느님 체험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생생히 체험했다고 하면서 개인적인 판단과 독단적인 주장으로 교회공동체에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교회가 성사의 공동체인 것을 깊이 깨닫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성찬례를 통해 우리를 공동체가 되도록 하시는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들 개인의 하느님 체험은 교회 공동체의 말씀과 성사를 통해서 공동체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그렇게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가 받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은총은 흐르고 넘쳐 교회의 경계를 넘어 세상을 향해 퍼져 나갑니다. 그것이 우리의 선교입니다.

오늘 우리의 성찬례 가운데 함께 하시는 성 삼위일체 하느님의 현존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이 교회공동체를 통하여 그 하느님과의 일치를 누릴 수 있음을 고백하고 감사합니다. 
성찬례를 마치신 후에 세상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함께 이 성찬례에 참여한 모든 교우들을 서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더 이상 고립된 개인이 아님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찬례 곧 홀리 콤뮤니언을 통해서 우리가 공동체 곧 콤뮤니언임을 확인한 것입니다. 

여전히 다른 교우들이 나와 무관한 남으로 느껴지신다면 우리는 예배를 충분히 잘 드린 것이 아닙니다. 전례를 통해서 나만의 행복과 성공을 기원했다면 우리는 아직 더 자라야 할 신앙입니다. 괜찮습니다. 매일매일 주일 주일 우리 공동체는 성찬례를 계속드릴 것입니다. 이르고 늦은 차이는 있을 지 몰라도 우리는 마침내 우리의 성찬례를 통하여 우리 각자를 넘어서서 공동체로 하나 된 우리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드린 이 말씀들을 기억하시며 성찬례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찬례를 마친 후에 여러분은 우리 공동체의 교우들 각 사람 위에 빛나는 광휘를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들 일 수 있습니다. 말쑥하고 멋지고 고급스런 분위기의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상대방의 겉모양을 초월하여 예수님께서 부르시어 공동체로 이루어주신 서로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우리는 성체성사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룹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 고백의 진실성입니다. 진실로 이 차원을 경험하고 고백하는 신자는 이 세상 어느 곳에 있던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빛과 향기를 드러내게 됩니다. 자기를 멸시하여 좌절하지도 않고 자기 의를 내세워서 교만하지도 않으며 자기를 초월하여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세상에 드러낼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자기를 죽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교회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일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일과 우리의 교회를 사랑하는 일은 본질상 다르지 않고, 또 실제로도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육신을 벗어나 하느님 곁으로 옮겨갈 때, 함께 슬픔과 기쁨으로 함께 할 이들이 바로 우리 교회공동체의 교우들입니다. 여러분의 묘비명에 새겨질 “성공회교우” 라는 말에는 우리 모두의 사랑과 하나됨이 담겨지게 됩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습니다. 내 편 네 편을 가르지 않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사랑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습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께서 부활의 주님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의 신비로 우리와 일치하시고 우리를 일치시키시는 성삼위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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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빵 (요한5:51-58)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설명해주시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듣습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삶에 있어서 육신의 요구를 충족하는 것은 꼭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더 충분히 중요한 것은 도리어 하느님의 요구에 우리 자신을 바쳐드려 충족시키는 일입니다. 이 일을 ‘소명(召命)’이라 하는데 ‘신앙(信仰)’이란 바로 이 ‘소명’에서 ‘생명(生命)’을 얻는 일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우리는 예수님 - 우리 곁에 오시어 몸소 가르쳐주시고 그 몸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그 분을 통해서 완전히 깨닫고 누리게 됩니다. 이 일을 두고 주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 표현하십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바로 그 생명의 빵을 먹는 것입니다.

식사 때마다 우리는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음식은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 우주 자연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밥상의 음식들을 조용히 바라보면 하늘의 태양과 바람과 비, 대지의 자양과 농부의 수고와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나 하나를 먹이기 위해 하나가 되었음이 신비롭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 먹는 <생명의 빵>은 우리의 참된 생명이 바로 하느님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떠나서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있게 하고 살게 합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의 성체는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을 전해줍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육신의 배부른 즐거움으로 잠깐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봉헌하여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의 일을 이루어나가는 영적인 보람으로 살아갑니다. 

육신의 빵도 물론 중요하지만, 생명의 빵은 우리를 한번 죽는 육신의 존재 이상이 되게 합니다.  육신을 위해서 빵이 필요하다면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 우리는 생명의 빵, 주님의 성체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삶에 대한 우리의 소망은 불로초를 구하는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의지하여 우리는 덧없이 소멸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합일되어 지극한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누린다는 믿음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늘의 양식, 생명의 빵을 값없이 먹고 마십니다. 오늘의 성찬례는 주님이 무한히 값진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조건없는 사랑으로 내어주시는 풍성한 생명의 잔치입니다. (2006.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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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사랑과 생명을 이어받는 성찬 (요한 6:51-58)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기 전날 밤 마지막 저녁식사의 자리에서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이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요 흘리는 피니 ,나를 기념하여 이 예를 행하라” 하신 말씀을 따라 우리는 성찬례를 거행합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중요한 이 최후의 만찬 이야기가 요한복음에는 나오질 않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이제 너희는 이것을 알았으니 그대로 실천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서 기자가 이미 성찬례가 예배 중에서 널리 드려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성찬례가 의례적이거나 미신적인 관습이 되지 않도록 그 의미를 깊이 살피자는 의도로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요한기자는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후의 말씀을 통해서 이미 성체성사의 참된 의미에 대하여 가르치신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유대인들은 ‘살’이라는 단어를 인간관계를 말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그들이 ‘내 살'이라고 말할 때는 ‘내 형제'를 의미합니다. 나와 관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이 “내 살을 먹는다"고 말할 때는 예수님이 가지셨던 사랑의 인간관계를 나의 것으로 하고 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피’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내 피를 마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생명을 산다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뜻은 예수님이 사람들과 가지셨던 관계를 자기 것으로 하고 예수님이 사셨던 생명을 나의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미신적이고 마술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신비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하느님께서 펼치신 사랑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께서 공급하시는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단순한 예식으로 끝나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서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2003.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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