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설교

2009년 8월 23일 (연중 21주일) 강론초 (요한 6:56-69)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8. 18.


2009년 8월 23일 (연중 21주일) 성서말씀

열왕상 8:1,6, 10-11, 22-30, 41-43

1 그리고 나서 솔로몬은 야훼의 계약궤를 시온의 다윗성에서 모셔 오려고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이스라엘 백성 각 가문의 대표들인 지파의 어른들을 예루살렘으로 소집하였다. 6 그리고 나서 사제들이 야훼의 계약궤를 성전의 밀실, 지성소 거룹의 날개 아래 마련된 자리에 안치해 놓았다. 10 사제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 구름이 야훼의 전에 차 있었다. 11 사제들은 그 구름이 너무 짙었으므로 서서 일을 볼 수가 없었다. 야훼의 영광이 야훼의 전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22 ○그리고 나서 솔로몬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보는 가운데 야훼의 제단 앞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들어 올리고 23 기도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여, 위로 하늘이나 아래로 땅 그 어디에도 당신과 같은 신은 없읍니다. 주님 앞에서 한 마음으로 살아 가는 종들에게 신실하시며 맺은 계약을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24 당신의 종인 저의 아버지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지켜 주셨읍니다. 친히 말씀하신 것을 오늘 이렇게 손수 이루어 주셨읍니다. 25 그러니 이제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여, 당신의 종인 저의 아버지 다윗에게 내리신 약속, '네가 내 앞에서 산 것처럼 네 자손들도 길을 벗어나지 않고 내 앞에서 살아 가기만 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후손이 끊기지 아니하리라' 고 하신 말씀을 지켜 주십시오. 26 그러니 이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여, 당신의 종인 저의 아버지 다윗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어 주십시오.

27 그러나 하느님, 하느님께서 이 땅에 사람과 같이 자리잡으시기를 어찌 바라겠읍니까? 저 하늘, 저 꼭대기 하늘도 주를 모시지 못할 터인데 소인이 지은 이 전이야말로 말해 무엇하겠읍니까? 28 그러나 나의 하느님 야훼여, 소인의 기도와 간청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이 날 당신 앞에서 울부짖으며 드리는 이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29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곳입니다. 밤낮으로 이 전을 보살펴 주십시오. 소인이 이 곳을 바라보며 올리는 기도를 부디 들어 주십시오. 30 소인과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할 때 부디 들어 주십시오. 당신께서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어 주십시오.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41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아닌 외국인이라도 그가 당신의 명성을 듣고 멀리서 찾아 오거든, 42 당신께서 손을 펼치사 위력을 드러내시어 널리 알려진 당신의 명성을 듣고 와서 당신께서 사시는 전을 바라보며 기도드리거든 43 당신께서는 자리잡으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 외국인의 청을 들어 그대로 이루어 주십시오. 그리하시면 이 지상의 모든 백성들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당신의 이름을 알게 되고 당신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소인이 지은 이 전이 당신의 성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에페 6:10-20

10 내가 끝으로 여러분에게 권고할 말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에게서 강한 힘을 받아 굳세게 되십시오. 11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12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 13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그래야 악한 무리가 공격해 올 때에 그들을 대항하여 원수를 완전히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14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15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16 손에는 언제나 믿음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방패로 여러분은 악마가 쏘는 불화살을 막아 꺼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17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18 여러분은 또한 언제나 기도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 모든 경우에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하십시오. 늘 깨어서 꾸준히 기도하며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십시오. 19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내가 말을 할 때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고 복음의 심오한 진리를 전할 때에 담대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20 나는 지금 갇혀 있기는 하지만 이 복음을 전할 사명을 띤 사람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해야 할 말은 대담하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

요한 6:56-69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58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것은 예수께서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하신 말씀이다.
60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며 수군거렸다. 61 예수께서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못마땅해 하는 것을 알아채시고 "내 말이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며 자기를 배반할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예수께서는 또 이어서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사람이 아니면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66 이 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시고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69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살아계신 하느님, 주님은 성령으로 온 교회를 다스리시고 거룩하게 하시나이다. 비옵나니, 교회를 위해 드리는 신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 각자의 소명에 따라 진실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고백으로 이루는 교회 (요한6:56-69)

최근 성공회공동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교회인가에 대한 물음이 몇몇 교우들에 의해 제기 되었습니다. 아마도 직접적인 동기는 세상사람들이 성공회를 “빨갱이집단”이라고 하는 데 대한 참담함과 불편함인 듯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분들은 우리 공동체 안에 “빨갱이”로 의심받을 수 있는 사람과 생각을 찾아내어 그것을 없애버리면 우리 교회공동체가 그런 오해를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의 답답한 마음이 이해는 가지만 그 분들의 판단에는 두 가지 깊은 잘못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성공회가 어떤 교회인가에 대한 기준을 성서, 전통, 이성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세상의 손가락질에 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셨을 때에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며 수군거리고 결국 물러가 예수님을 떠나버립니다. 예수님은 남은 제자들에게 비감하게 물으십니다. “자,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 가겠느냐?” 이 때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 하고 아름다운 고백을 드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떠나는 자와 남는 자가 가려집니다. 우리 교회는 남은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정체성을 떠난 자들의 불평, 바깥에서 시비거는 이들의 소리에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남은 자들의 고백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 생생이 들려지고 성찬례를 통해 그 주님의 생명을 먹고 마시며 세상에 그 생명을 전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반성이라면 얼마나 귀한 것이겠습니까?
그에 비하면 우리 안에 이른바 “빨갱이”가 있느냐 없느냐는 기준으로 교회를 살펴보려는 이들의 믿음은 얼마나 무참하고 당황스러운 일입니까?

다른 하나의 잘못은 우리 공동체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공동체와 나 자신을 분리시키는 태도입니다. 공동체는 곧 나입니다.

세례성사는 우리 각 사람을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로 이루어주는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다시 먹고 마심으로 하나로 일치되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다른 이를 남처럼 여기고 공격하는 것을 옳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에도 모든 일을 나 자신의 일로 여기고 함께 기도하고 해결하려 애써야 합니다.

오늘 성찬례를 통하여 이러한 고백으로 이루는 교회공동체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깊이 누리시길 빕니다. (2009. 8. 23)

==============================================================================================

                        살아야 할 고백
(요한6:56-69)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며 수근거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거니와 말씀은 두 가지로 어렵게 느껴집니다. 하나는 쉽게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내용은 이해가 가지만 그 말씀대로 따르기가 어려운 경우입니다. 아마도 오늘 복음서에서 제자들의 반응은 이 두 가지 어려움이 복합되어 있는 듯합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같이 예수님이 은총으로 베풀어주시는 현세의 빵을 배불리 먹고 더 많은 이들에게 더 많은 빵을 주십사고 기대하는 것은 신앙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그 기적을 통해서 제자들이 그저 배부른 만족을 기대하는 군중으로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자신의 몸을 바치고 나누어 모든 사람을 먹이시고 살리시는 예수님 자신의 사랑과 운명을 “성사(聖事)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거룩한 사랑, 즉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깨닫고 모든 사람들과 그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사셨고, 하느님의 그 사랑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몸 바쳐 일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신 것은 그들이 예수님처럼 영원한 삶의 차원을 깨닫고 살아가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찬례를 통하여 당신을 기억하라 하심은 우리들이 주님의 성체와 보혈을 먹고 마시면서 주님의 관계와 생명 속에 하나로 일치하여 주님처럼 모든 사람들을 대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깨닫기 어렵고, 따르기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가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예수님의 비감한 물음에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 하고 참으로 감동적인 고백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고백도 같은 맥락에서 요청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백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삶으로 주님을 따르며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찬예배 중에도 우리의 고백이 살아있기를 원합니다. 그 고백 위에 주님께서 교회를 세워 가시기 때문입니다. (2006. 8. 27)
===========================================================

                                     영적인 삶으로 이끄는 성찬

복음사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태어나는 신앙 공동체들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성찬(성체성사)를 봅니다. 그는 성찬이 신앙인의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성찬(성체성사)는 육의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육(肉)은 자기 자신만 확대해서 보는 현세적 삶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육은 잘 먹고, 편하고, 출세해야 하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해야 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런 삶을 위해서 성찬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영(靈)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열리는 넓은 삶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에서 자기 주변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하느님 자녀 된 삶입니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는 말씀은 자기 자신만 확대해서 보는 육의 삶이 아니라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영의 삶이 하느님의 생명을 준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생명을 아끼고 고치고 살리시는 분입니다. 영을 따라 사는 삶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기에 자기 스스로를 주고 쏟아서 주변에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게 합니다. 우리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며 사는 일이 아닙니다.

성찬은 세속적인 기적을 만들지 않습니다. 성찬은 육의 삶에서 영의 삶으로 나가라는 초대입니다. 자기 자신만 보는 삶에서 하느님을 보는 삶으로 옮아가라는 초대입니다.

그것은 성찬으로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성찬에서 힘을 얻어 영이 주는 새로운 삶, 곧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노력을 하는 사람입니다.(2003. 8. 24/ 서공석 신부님 말씀 참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