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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8월 9일 (연중 19주일) 강론초 (요한 6:35, 41-51)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8. 5.


2009년 8월 9일 (연중 19주일) 성서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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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하 18:5-9, 31-19:1

5 요압과 아비새와 이때에게, 압살롬은 아직 철이 없으니 자기를 보아서라도 너무 심하게 다루지는 말라고 당부하였다. 왕이 전 지휘관에게 압살롬을 두고 부탁하는 말을 전군이 들었다. 6 전군은 이스라엘을 맞아 싸우기 위하여 들판으로 나갔다. 싸움은 에브라임 숲에서 벌어졌다. 7 거기에서 이스라엘군은 다윗의 부하들에게 패하여 그 날로 이만 명이나 되는 전사자를 냈다. 8 싸움은 그 일대에 번져 그 날, 칼에 죽은 사람보다는 숲에 막혀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9 그런데 압살롬이 그만 다윗의 부하들에게 발견되었다.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울창한 상수리나무 밑으로 빠져 나가다가 머리가 나뭇가지에 걸리고 말았다. 타고 가던 노새는 그대로 달아나 버리고 압살롬은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31 구스 사람이 와서 아뢰었다. "임금님, 좋은 소식입니다. 오늘 야훼께서는 역적들을 벌하시고 임금님을 그들의 손에서 건져 내셨읍니다." 32 왕이 그에게도 "철부지 압살롬은 무사하냐?"고 묻자, 구스 사람이 대답했다. "임금님을 대적하여 반역이나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가 당한 일을 같이 당하게 되기 바랍니다."  1 이 말을 듣고 왕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성문 위에 있는 골방으로 올라 가 "내 자식 압살롬아, 내 자식아, 내 자식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이게 웬일이냐? 내 자식 압살롬아, 내 자식아" 하며 목놓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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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 4:25-5:2

25 그러므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26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 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27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 28 도둑질하던 사람은 이제부터 그런 짓을 그만두고 제 손으로 일하여 떳떳하게 살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29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 30 마지막 날에 여러분을 해방하여 하느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을 보증해 주신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여드리지 마십시오. 31 모든 독설과 격정과 분노와 고함 소리와 욕설 따위는 온갖 악의와 더불어 내어버리십시오. 32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고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1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 2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셔서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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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6:35, 41-51

35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41 이 때 유다인들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못마땅해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42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니 말이 되는가?"
43 그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하냐?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내게 오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내가 살릴 것이다. 45 예언서에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나에게로 온다. 46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본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온 이밖에는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다. 47 정말 잘 들어두어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50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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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주 하느님, 오직 주님만이 우리를 만족케 하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세상의 헛된 만족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살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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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빵 - 성체성사의 신비 (요한 6:35, 41-51)

사람은 이슬만 먹고 살지 못합니다. 밥을 먹어야 삽니다. 밥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생명을 담고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힘을 담고 있는 동시에 다른 생명의 희생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답게 사는 일의 최소 조건을 밥값을 해야 한다^^고 표현합니다.
물론 고대 이래로 이 밥을 먹고 사는 일이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저주이기 보다는 축복입니다. 힘들여 밥 한 공기를 만들어 낸 사람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연과 다른 이들의 협력에 감사할 줄 알며 생명 계승이라는 소중한 일에 협력자가 된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남의 피를 흘려 낟알을 빼어먹으려는 자가 생긴 것인데 이런 자들, 곧 “돌을 들어 빵을 빼앗으려는” 자들이 늘어난 세상에서 빵은 불행하게도 “죽음의 빵”이 되고 맙니다.
빵을 독점하거나 빼앗는 자가 있으면 당연히 반대로 굶주리거나 빼앗기는 자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빵의 문제는 자연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빵의 문제를 정치경제적인 것으로 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분명히 영적인 차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빵>에 대한 요한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물론 요한복음의 관심은 단순히 육신의 배고픔을 충족시키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복음서가 좀 더 관심을 기울인 “배고픈 이들을 먹이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나누어 먹는 가운데 누리는 나눔의 기적과 신비”에 대한 강조점을 요한복음은 넘어섭니다. 요한복음은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를 성체성사의 의미를 전하는 표적 이야기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강조되고 강조되어 마침내 베드로의 신앙고백에까지 이어집니다. 요한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하여 깊이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은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바로 그 생명의 빵을 먹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생명의 빵이 우리 육신의 건강과 축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생명의 빵은 개인의 성공과 축복을 위한 마법적인 수단이 아닙니다.

생명의 빵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현존, 그 분의 사랑과 은총과 지혜와 의지 자체입니다. 우리의 이해가 넘어서야 할 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와 보혈은 단지 나라고 하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체성사는 본질적으로 교회공동체와 관련이 있고 우리 구원이 본질과 관계가 있습니다. 

어떤 개인이 혼자서 성경을 읽으며 명상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깨달았다면 그에게는 실상 성체성사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개인이 그렇게 홀로 얻는 깨달음은 성서와 교회가 증언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넘어서서 새로운 존재가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관념적인 결단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에서 이루어져 합니다. 우리가 교회공동체에 속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임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자신을 죽이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게 하는 일, 육적인 사람에서 영적인 사람으로 새로 나는 일, 옛자아를 죽이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일, 그 일은 우리가 고립된 개인이기를 더 이상 고집하지 않고 교회공동체의 지체를 이루는 신비를 받아들이는 일과 같습니다.

공동체의 신비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일은 교회를 다니는 일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교회를 이루는 일입니다. 

교회가 은총의 수단과 보증으로 강조하는 성사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구원이 바로 우리가 교회공동체에 속하게 됨을 통해서 가능함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들은 지나친 교회중심주의, 성사중심주의 생각이라고 비판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교회나 성사를 그 자체로 내세우거나 강조하려는 말씀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루고 있는 교회 공동체야 말로 단순히 인간의 모임이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공동체로서만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사는 바로 이 의미를 확연히 나타내고 가르치기 위해 강조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 말씀을 읽고 듣는 것으로 충분한데 구태여 형식적인 성사가 필요하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말씀에 속지 마십시오. 이 분들의 오해는 무의식적으로 구원의 문제를 개개인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더 유용한 종교적인 서비스를 구매하는 차원으로 생각하는 좋지 못한 경향과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성공회를 선택해서 종교생활을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나의 인생을 하느님께서 세상에 내신 것으로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 부름받아 사는 일이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임을 깨닫고 고백하고 증언하는 일입니다.
이른바 예정론에 대한 강조는 이런 고백의 한 가지로서 하느님의 사랑의 주권에 대한 찬양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성사는 하면 좋고 안 해도 괜찮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교회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일을 세례성사라 하고 교회공동체의 지체로서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는 일이 성체성사입니다. 성사는 우리의 구원에 반드시 필수적이고 본질적인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평범한 인간, 요셉의l 아들로 알려져 있는 예수님이 너무나 급진적이고 심오한 주장을 하신 셈이지요.
영적인 것은 육적인 것을 부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육적인 것으로 영적인 것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으로 육적인 것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영적인 차원은 육적인 차원을 포함하지만 그것을 넘어섭니다.
중요한 것은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바로 그 올바른 관계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성체성사의 신비를 두고 천주교의 화체설, 개신교의 기념설, 성공회의 임재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래서 뭐가 어떻게 문제가 된다는 것일까요?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제로 변하는 것이냐 아니냐를 심각하게 따지는 일은 알고 보면 영적인 일과 육적인 일을 전혀 별개의 일로 분리하는 태도에서 생긴 일종의 엉뚱한 접근방식입니다. 본래 화체설이라는 설명은 중세기의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성체와 보혈에 물리적인 변화가 일어난다고 미신적으로 믿기 쉬운데 대하여 철학적인 설명을 붙여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나주에 있는 천주교의 율리아나 집단이라는 곳에서는 성체를 영했더니 입 안에서 피가 흐르는 살점으로 변했다고, 그것이 천주교의 교리인 화체설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참으로 넌센스이고 중세기적인 현상인 것입니다. 본래 말하고자 한 것은 빵과 포도주가 물리적으로는 그대로이나 그 본질적인 실체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했음을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설명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과학적인 설명이 아니라 신비에 대한 신앙에 의지하는 것이고 따라서 논의를 깊이 할수록 결국은 하느님의 현존, 성령의 임재 사건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신학자들의 복잡한 설명들이 결국엔 실상 거기서 거기입니다. 신학적으로는 거의 모든 교파가 주님의 실제적 임재(Real presence)로 이해의 일치를 보고 더 이상의 논의를 그치고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성체성사를 존중하는 모두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교회의 지체인 우리가 교회의 머리이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진실로 하나가 되고 있다는 경험을 하고 그것을 고백한다는 점입니다. 

왜 단순한 기념이 아니고 실제 주님의 임재를 강조하는가 하면 비유하자면 요리법과 메뉴판이 아니라 실제의 음식을 먹어야만 배가 부른 이치와 같습니다. 우리 개개인은 육신과 정신과 영의 통일체입니다. 교회도 비유하자면 몸과 정신과 영의 통일체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하지요. 성체성사는 교회의 몸을 위한 자양분 넘치는 양식입니다. 교회는 개개인의 집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공동체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몸을 이룬 지체로서 함께 참여하는 영적인 식탁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신 주님의 살과 피가 곧 우리의 살이 되고 피가 됩니다. 교회가 쇠약하거나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성체성사의 힘입니다. 

례와 성사는 우리끼리의 퍼모먼스가 아닙니다. 전례의 본질은 하느님 앞에서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아 모인 우리가 우리 삶의 봉헌을 통하여 세상을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되돌리는 일입니다. 그 봉헌을 기쁘게 받으시고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하나가 되도록 그 차원을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 그것을 다시 먹고 마심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 자신을 확인하게 됩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것이요 우리는 구원받은 이들로서 부름 받고 세상을 위하여 보냄을 받습니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우리는 아멘으로 응답하며 고백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룹니다.” 

세상에는 왕의 빵이 있고 농부의 빵이 있습니다. 귀족의 빵이 있고 서민의 빵이 따로 있습니다. 부자의 빵과 거지의 빵이 별개로 있습니다. 우파의 빵도 있고 좌파의 빵도 있습니다. 이렇게 나누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빵의 문제는 미움과 갈등과 서로의 영적인 죽음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에게 귀하고 참된 것은 오직 주님의 “생명의 빵”입니다. “왕의 빵”과 “농부의 빵”은 각자 나뉘어진 채로가 아니라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왕과 농부의 빵”으로 하나가 됩니다. 귀족과 서민의 빵, 부자와 거지의 빵, 우파와 좌파의 빵, 이 세상의 모든 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의 빵이 됩니다. 이는 빵의 문제는 서로가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안에서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해결되는 영적인 문제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의 식탁은 서로 각자 빵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움켜쥐고 등을 돌려 홀로 먹는 외로운 원숭이들의 식사가 아닙니다. 나의 빵 안에 다른 이의 눈물과 땀과 피가 배어있고 다른 이들의 빵 안에도 우리의 사랑과 수고와 희생이 담겨있음을 깨달으며 실상 그 모든 일이 하느님의 은총이며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한 백성임을 감격하며 감사하고 기뻐하는 식탁, 그것이 참된 인간의 식탁입니다. 

그 식탁의 원형이 바로 교회의 제대입니다. <생명의 빵>을 나누어 먹는 우리의 전례는 나와 이웃, 세상과 하느님이 하나되는 사랑의 잔치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는 생명의 빵인 주님의 몸과 피를 함께 먹고 마시며 우리 일상의 평범한 식탁 역시 참으로 거룩한 제단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물론이요, 우리가 속해 사는 이 세상이 이 살아있는 생명의 빵,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말미암아 새로운 차원의 삶,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성체성사의 신비와 은총으로 저와 여러분과 이 세상을 축복합니다. (2009.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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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의 빵, 예수 (요한 6:35, 41-51)

우리는 3주째 <생명의 빵>에 대한 요한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은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바로 그 생명의 빵을 먹습니다.

식사 때마다 음식을 대하며 우리는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음식은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 우주 자연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밥상의 음식들을 조용히 바라보십시오. 우주 만물이 나 하나를 먹이기 위해 하나가 되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늘의 태양과 바람과 비, 대지의 자양과 농부의 수고와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기에 내가 먹는 밥 한술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슬만 먹는 존재가 아니요, 홀로 내 먹을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도 없습니다. 자연과 사회를 통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는 깊이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 먹는 <생명의 빵>은 우리의 참된 생명이 바로 하느님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의 성체는 하느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 바로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떠나서 무엇이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살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생명의 빵으로 받아먹은 우리도 육신의 배부른 즐거움으로 잠깐의 일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받아 하느님의 일을 해나가는 영적인 보람으로 영원한 삶을 살아갑니다.

육신의 빵은 소중하지만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빵은 우리를 죽음에서 구합니다. 영원한 삶에 대한 우리의 소망은 불로초를 구하는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이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함으로써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그런 믿음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육신을 위해서 빵이 필요하다면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 우리는 생명의 빵, 주님의 성체를 필요로 합니다.
일류 요리집의 명품요리가 귀합니까? 오늘도 우리는 하늘의 양식, 생명의 빵을 값없이 먹고 마십니다.
오늘의 미사는 하느님이 은혜로 베푸시는 풍성한 생명의 잔치입니다. (2003.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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