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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7월 19일 (연중 16주일) 강론초 (마르 6:30-34, 53-56)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7. 12.



2009년 7월 19일 연중 16주일 성서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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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 23:1-6
1 "이 저주받을 것들아, 양떼를 죽이고 흩뜨려버리는 목자라는 것들아, 야훼의 말을 들어라.
2 내 백성을 칠 목자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말한다. 내 양떼를 돌보아야 할 너희가 도리어 흩뜨려서 헤매게 하니, 너희의 그 괘씸한 소행을 어찌 벌하지 않고 두겠느냐! 똑똑히 들어라. 3 나 비록 나의 양떼를 이 나라 저 나라로 헤매게 하였지만, 그 중에서 살아 남은 것을 모든 나라에서 본래의 목장으로 다시 모아들여 크게 불어나게 할 것이며, 4 그들을 위하여 참 목자들을 세워주리라. 그러면 내 양떼는 겁이 나서 무서워 떠는 일 없이 살 것이며,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5 내가 다윗의 정통 왕손을 일으킬 그 날은 오고야 만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그는 현명한 왕으로서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펴리라. 6 그를 왕으로 모시고 유다와 이스라엘은 살 길이 열려 마음놓고 살게 되리라. '야훼 우리를 되살려주시는 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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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 2:11-22
11 이방인으로 태어난 여러분, 지난 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단지 몸에다 사람의 손으로 행하는 할례를 받은 소위 할례자들로부터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12 그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고 이스라엘 시민권도 없는 외국인으로서 약속의 계약에서 제외된 채 이 세상에서 희망도 하느님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13 이렇게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15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에게나 가까이 있던 유다인들에게나 다 같이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18 그래서 이방인 여러분과 우리 유다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잇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21 온 건물은 이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22 여러분도 이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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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6:30-34, 53-56
30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예수께 낱낱이 보고하였다. 3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 하고 말씀하셨다.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예수의 일행은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났다. 33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일행이 떠나는 것을 보고 그들이 예수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고는 여러 동네에서 모두 달려나와 육로로 해서 그들을 앞질러 그 곳에 갔다. 3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군중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1)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주셨다.민수 27:17(1열왕 22:17; 에제 34:5 참조).
53 그들은 바다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를 알아보고 55 그 근처 온 지방을 뛰어다니면서 병자들을 요에 눕혀가지고 예수가 계시다는 곳을 찾아 그리로 데려왔다. 56 마을이나 도시나 농촌이나 어디든지 예수께서 가시기만 하면 사람들은 병자들을 장터에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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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영원하신 하느님, 주님은 우리 생명의 시작이며 끝이 되시나이다. 비옵나니, 이 세상의 모든 유혹과 고통 중에서 우리를 인도하시어 영원한 평화를 주시는 주님께 이르도록 지켜주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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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로 예배를, 예배로 선교를 ! (마르6:30-34, 53-56 )

우리는 오늘도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흔히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주일성수 主日聖守)고 강조하지만 그것은 주일 자체가 특별한 날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일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축하하고 사랑과 헌신을 다짐하기에 주일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주일인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쉬신 것을 기념하는, 곧 창조의 신앙을 돌아보는 날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의 노예살이를 벗어나서 자유민으로 탈출한 일을 기념하며 자신들의 공동체안에서 노동의 타락과 착취와 억압을 없이하려는 의도로 진중히 받아들인  계명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사항이 아니라 지키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었는데 이는 이 안식일 준수가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과도 같았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일하신 때문에 죽임의 위협을 받으시고 또 마침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안식일 규정 자체를 무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의 행복을 위한 안식일의 의미를 분명히 되살리려 하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안식일 자체가 거룩한 날이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경건하게 지내야 하는 것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실은 엿새의 노동이 또한 거룩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안식일은 그 엿새의 노동을 참되고 행복하고 의미있게 하기 위해 의미있는 하루인 것입니다.


귀환한 사도들의 보고, 예수님과의 쉼, 사람들을 위한 치유와 나눔 이야기를 전하는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의 선교와 예배가 어떤 내용과 의미와 관계로 이루어지는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지난 한 주간 우리는 파송예식의 “나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합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응답한 대로 세상에서 주님께로부터 세상에 파견된 자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돌아와 함께 모여 주님께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온 경험과 고백을 낱낱이 다시 보고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더불어 “한적한 곳에서 따로 함께 좀 쉬자”는 복음말씀처럼 예수님의 현존 안에 교제와 안식을 누립니다. 이러한 일이  오늘 우리 예배의 내용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드리는 예배는 주일 오전이 특별히 신성하고  우리 교회 성전공간이 특별히 거룩하다는 의미가 초점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세상에서 교회로, 교회에서 세상으로” 역동적인 움직임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늘 달랑달랑 맨몸으로 빈손으로 교회에 들린 것이 아닙니다. 약간의 댓가를 지불하고 사제와 사역자들이 제공해주는 종교적 서비스를 받으려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이 시간 우리는 우리 각자가 세상에서 우리의 삶으로 경험한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통의 경험과 고백을 가지고 모였습니다.
 세상을 복음의 가치를 따라 사는 일, 세상의 자녀들과 어울리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일, 세속을 주님의 사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살아있는 제물”로 하느님께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 요 우리의 선교입니다.
그리고  이 시간 우리는 한 주간 세상에서 “산 제물”로서 살아온 우리의 삶을 봉헌물로 가지고 와서 그리스도의 몸인 제대에 바쳐 드립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 바쳐집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이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해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와 이 세상은  하느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이 본래 하느님의 것으로 다시 드려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구원하신 이 세상이 다시 그 구원을 재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쳐드리는 우리 삶의 봉헌을 기쁘게 받으시고 하느님께서는 성령의 임재로써 그것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거룩해진 주님의 그 몸과 피를 다시 받아 먹고 마시며 우리는 진정 거룩해집니다. 다시 세상에 파송되어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나갈 진리와 사랑과 힘과 용기와 지혜를 얻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거룩해집니다. 그 거룩해지는 세상을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의 신비입니다.
“목자 없는 양떼” 같은 백성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주님의 이야기가 바로 오늘 우리가 바치는 이 감사성찬례의 원형입니다.


우리는 목자 없는 양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참 목자로 모신 양떼가 되었습니다.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옮겨졌고,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느님께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확인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성찬예배입니다 .


우리의 이 거룩한 성찬례는 “목자 없는 양떼” 같은 이들이 있는 모든 곳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드려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오늘도 이 곳에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성찬례는 다시 선교로 이어집니다.

 “나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합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2009.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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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하신 일, 우리가 해야 할 일 (마르6:30-34, 53-56)

우리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시는 구원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어떤 이들은 구원이란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공로를 인하여 죽은 후에 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른바 ‘영혼구원’이 가장 중요하다는 입장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사후의 영혼구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을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도록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른바 ‘사회구원’을 강조하는 입장이지요. 약간 도식적인 이해이기는 하지만 그동안 이런 양자의 입장이 때로 경쟁하고 갈등하면서 교회 안에 존재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 성공회는 양자를 모두 중시합니다. 저는 구원을 우리의 살아가는 삶 전체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일로 이해하고, 한마다로  ‘삶의 구원’이 참된 구원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른바 사후영혼의 천국입성은 삶의 목표라기보다는 당연한 귀결일 것입니다. 그것이 은총인가 보상인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관심하는 것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 자체입니다.
이른바 사회구원도 그 자체가 우리의 목표일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꿈꾸는 유토피아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다만 제도화되고 구조화된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회과학적인 지식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제 상식입니다.
또한 여전히 인간문제의 해결에는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와 신앙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제는 당연한 일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몰려오는 백성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측은하게 여기셨습니다.
가난과 병과 수탈과 멸시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곤고한 삶을 가련하게 보신 것입니다. 

당시의 성전제사도 율법준수도 백성들에게는 도리어 무거운 짐이 되고 하느님과의 거리를 멀게 할 뿐, 하느님이 우리의 삶에 함께 해주신다는 구원의 본래적 의미를 백성들에게 보장해주지 못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들의 간절한 필요가 만나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과 인간들의 욕망이 교차하는 곳에는 우상(偶像)의 속임수가 성행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파견을 받고 세상에 나가 경험한 일들  즉 자기들이 가르치고 행한 일을 예수님께 돌아와 낱낱이 보고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예배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일이 바로 오늘 복음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2006.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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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사람이 귀하고 귀하다
(마르6:30-34, 53-56)

보통 우리는 다른 사람을 나를 위한 수단쯤으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슬프고 외롭습니다. 우리의 인간관계는 고작해야 이해관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해관계를 넘어서 서로 사귀며 깊은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인간관계가 세상의 이해관계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아마도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느님이 결국 나에게 얼마나 유용한가를 묻는 신앙은 비록 뜨겁다 할지라도 이미 오염된 신앙입니다. 하느님을 나의 요구를 채워주는 이해관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거룩하고 지존하신 하느님을 저급한 우상의 차원으로 떨어뜨리고 모독하는 일이 됩니다.

우리가 서로를 세속의 가치에 집착하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서로의 깊은 곳에서 하느님나라를 갈망하는 한 영혼의 모습으로 통찰하고, 그래서 서로 마음을 열고 신앙의 언어로 대화하고 사귈 수 있다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럴 수 있어야만 우리는 하느님과도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움에 처한 영혼들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붙들려는 마음으로 달려온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 서로 어울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귀하게 여깁니까?
서로를 대하면서 여전히 저 사람이 내게 무슨 소용일까를 생각합니까?
우리 교회에 저 사람이 무슨 기여를 할까하고 판단합니까?
우리는 아무런 조건 없이 한 사람 한 사람 서로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우리가 정말 아무런 쓸모도 없는 존재이지만 그런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부를 스스로 십자가에 던지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받아주시고 돌보아주시듯이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돌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만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오직 사람이 귀하고 귀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 가운데 사셨습니다.
수많은 군중들과 병자들에 둘러싸여 쉬실 틈도 없이 그들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 교회 안과 교회 밖의 세상에는 여전히 ‘목자 없는 양’같이 측은한 무리들이 무수히 있습니다.
우리가 오직 사람과 사람의 일을 그 무슨 명분이나 재물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복음 전파의 시작일 것입니다. (2003.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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