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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8월 30일 (연중22주일) 강론초 (마르 7:1-8, 14-15, 21-23 조상의 전통)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8. 25.




2009년 8월 30일 연중 22주일 성서말씀
 
아가 2:8-13
8-9 사랑하는 이의 소리, 산 너머 언덕 너머 노루같이, 날랜 사슴같이 껑충껑충 뛰어 오는 소리. 담 밖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며 살창 틈으로 훔쳐 보며 10 나의 임이 속삭이는 소리. "나의 귀여운 이여, 어서 일어나오. 나의 어여쁜 이여, 이리 나와요. 11 자, 겨울은 지나가고 장마는 활짝 걷혔소. 12 산과 들엔 꽃이 피고 나무는 접붙이는 때 비둘기 꾸르륵 우는 우리 세상이 되었소. 13 파란 무화과 열리고 포도 꽃 향기가 풍기는 철이오. 나의 귀여운 이여, 어서 나와요. 나의 어여쁜 이여, 이리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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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 1:17-27

17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늘의 빛들을 만드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변함도 없으시고 우리를 외면하심으로써 그늘 속에 버려두시는 일도 없으십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된 것입니다. 19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알아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십시오. 또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마십시오. 20 화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의 정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온갖 악한 행실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심으신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22 그러니 그저 듣기만 하여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23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제 얼굴의 생김새를 거울에다 비추어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그 사람은 제 얼굴을 비추어보고도 물러나서는 곧 제 모습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25 그러나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완전한 법을 잘 살피고 꾸준히 지켜 나가는 사람은 그것을 듣고 곧 잊어버리는 일이 없으며 들은 것을 실천에 옮깁니다. 이렇게 실천함으로써 그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26 누구든지 자기가 신앙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혀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셈이니 그의 신앙 생활은 결국 헛것이 됩니다. 27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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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7:1-8, 14-15, 21-23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께 모여왔다가 2 제자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원래 바리사이파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들은 조상의 전통에 따라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었고 4 또 시장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반드시 몸을 씻고 나서야 음식을 먹는 관습이 있었다. 그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았는데 가령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 같은 것을 씻는 일들이 그것이었다.
5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하고 따졌다.

6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사야가 무어라고 예언했느냐? '1)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1>칠십인역 이사 29:13.)
7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 했는데 이것은 바로 너희와 같은 위선자를 두고 한 말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14 예수께서 다시 사람들을 불러모으시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는 내 말을 새겨들어라.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21 안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음행,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 23 이런 악한 것들은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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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주 하느님, 우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시고 양심을 바로 잡아주시나이다. 비옵나니, 성령의 감화로 주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심을 깨닫고, 큰 영광으로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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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내면에 이루는 구원 (마르 7:1-8,14-15,21-23)

신종플루 때문에 온 세상이 크게 걱정하고 있습니다. 예방을 위해 역시 손을 잘 씻는 일이 중요하답니다. 지금 우리에겐 손을 씻는 일이 위생을 위해 세균을 씻어내는 상식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세균의 존재에 대한 상식이 생긴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고대인들은 병의 원인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이 없는 관계로 주로 신앙적인 해석에 의지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대략 경험적인 인과관계에 바탕을 둔 옛사람들의 위생지침은 종교적인 성격을 띠게 됩니다.
레위기에는 정결법이 자세히 규정되어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다루는 문제는 이른바 “조상의 전통”이라는 관습입니다. 이것은 모세오경(토라) 자체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구전율법에 대한 해석 곧 오늘날 이른바 탈무드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좌우간 종교는 규율에 더욱 더 당위성을 보장하고 그 규율의 체계에 의해 종교는 더욱 더 권위를 강화하게 됩니다. 

종교는 인류사를 통해 인간사회를 통합하고 통제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고대의 왕과 황제들은 스스로를 신이라 자칭했고 자기들의 명령을 신의 명령인 것처럼 꾸며왔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되어오신 하느님, 성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로 자칭하시고,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시는 것으로 당신의 신성을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신앙생활이 어떤 종교적 지침을 외면적으로 따르는 일이 아님을 알려주십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나 중심의 생각을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참나를 발견하고 나의 존재와 삶을 하느님의 뜻과 사랑에 일치하려고 하는 일입니다. 삶으로 하느님의 그 뜻과 사랑을 누리고 보이고 전하는 일입니다. 어떠한 역경과 유혹에도 마음을 지키는 일이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지키는 일이 바깥으로 주어지는 어떤 보상을 위한 것일 수 없습니다. 현세의 축복이든, 내세의 천국이든 그것은 우리에게 외적으로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우리 내면에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다스림, 우리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구원의 본질입니다. 우리 마음의 변화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동양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라는 유명한 표현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표현으로 하면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그것이 바로 복된 삶의 샘이다(잠언4:23)”와 통합니다.
신약성경의 표현으로는 “성령충만(聖靈充滿)”의 의미일 것입니다.
바울로 사도의 표현으로 하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안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공관복음서는 이를 두고 “이 세상과 우리 마음이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하는 데 이를 “하느님나라가 다가왔다”고 표현합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말씀과 영으로 충만해지는 일, 요한복음서는 그것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표현합니다. 

신앙생활의 실제는 여러 가지 규율과 관습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의 요체는 우리 마음이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깨우침은 우리 삶으로 누려지고 세상에 나타내지고 이웃에 전해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규율과 관습은 바로 우리 마음의 깨우침이 생각에 머물지 않고 삶으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방편일 것입니다. (2009.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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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깨끗이 비워진 마음으로 (마르 7:1-8,14-15,21-23)

신앙생활이란? 한마디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머리 속에 하느님에 대한 이런저런 관념을 잔뜩 가지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고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 함께 해주시는 하느님의 현존, 그 살아계심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불안함도 사라집니다. 슬픔이 기쁨이 되고 미움이 자비가 되고 우리는 조건을 넘어서는 완전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때로는 우리가 주님의 현존, 우리와 함께 해주심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어두운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우리의 더러움이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워 버린 때입니다. 기쁨은 사라지고 불안과 짜증이 일어나고, 조급해지고 성을 잘 내고 두렵고 암담한 기분에 휩싸입니다.

유다인들이 ‘정결법’에 관심하는 것은 자기들과 함께 해주시는 하느님 앞에 온전하게 살고 싶어서입니다.
오늘 신명기는 이렇게 자랑합니다.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는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주시는 분이시다. 그처럼 가까이 계셔주시는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어디 또 있겠느냐?” 거룩하신 하느님을 모시는 백성으로서 정결하게 살려는 노력은 사실 나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그것은 정결례 아니라 보다 더한 그 어떤 종교의식과 규율이라도 우리들 인간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보장하거나 독점하는 것처럼 여기고 주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전통이 하느님의 뜻을 좌우할 수는 없다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손과 그릇을 씻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차원의 정결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깨끗함입니다. 마음의 가난함, 겸손함입니다.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셨던 복된 사람이 되는 비결들입니다.

때로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우리 자신의 신념을 의지하곤 합니다.
때로 우리는 하느님의 판단과 자비를 믿지 않고 내가 정죄한 이들이 천벌을 받기를 원합니다. 때로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뜻을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결론을 낸 우리의 입장에 하느님이 동의하시기를 원합니다.

비록 신앙의 외형을 갖추고 있다 해도 그것은 사실 자기중심적인 추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서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는 자기 행업(行業)을 자랑하지 말고, 겸손한 믿음으로 자기 마음이 주님이 기쁘게 거하실 만큼 깨끗이 비워져있는 지를 살필 일입니다.(2006.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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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사랑으로 내 마음을 변화시켜

지난 다섯주일동안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성찬>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 내용인즉,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 분의 일을 그 분의 힘으로 해나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임재, 하느님의 현존 가운데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통상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먹고 사는 일, 곧 경제적 문제보다도 더 긴요하고 본질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가는 가운데 “너희도 떠나가려느냐?” 물으시는 주님께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만이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결국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심, 곧 하느님의 임재를 늘 깨달으며, 의식하며 살아가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그 하느님은 두려운 감시자로서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이시기에 우리가 하느님을 진심으로 따를수록 우리의 삶은 올바르고 풍성해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의 노력으로 하느님을 움직여서 우리의 바램을 채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를 변화시켜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것입니다.

아가서는 하느님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갈망하는 우리의 애절한 심정을 에로틱한 연가에 담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저 듣기만 해서 스스로를 속이지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대로 실천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은 우리의 믿음이란 단순한 외면적 종교행위가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만큼 우리 마음은 변화되어지고 우리 마음의 변화가 있을 때에야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2003.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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