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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2월 15일 (연중6주일) 강론초 (마르 1:40-45 나병환자를 고치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2. 9.



2009년 2월 15일 연중 6주일 성서말씀


열왕하 5:1-14

1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으로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왕이 매우 아끼는 큰 인물이었다. 야훼께서 나아만을 들어 쓰시어 시리아에 승리를 안겨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병환자였다. 2 시리아 군이 이스라엘을 쳐들어갔다가, 한번은 거기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아 왔는데, 나아만 장군은 그 소녀를 아내의 하녀로 삼았다. 3 그 어린 하녀가 자기의 주인에게 일렀다. "주인 어른께서 사마리아에 계시는 예언자를 만나시기만 해도 좋겠습니다. 그가 나병쯤은 쉽게 고쳐주실 텐데요."
4 이 말을 듣고 나아만은 입궐하여 왕에게, 이스라엘에서 온 소녀가 이러이러한 말을 하더라고 아뢰었다. 5 이 말을 들은 시리아 왕이 말하였다.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친서를 써줄 터이니, 장군은 가보시오." 이리하여 나아만은 은 십 달란트, 금 육천 세겔, 옷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왕의 친서를 이스라엘 왕에게 전하였다. 그 친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본인은 이제 이 편지를 들려 본인의 신하 나아만을 귀하에게 보냅니다. 부디 그의 나병을 고쳐주십시오."
7 이스라엘 왕은 이 서신을 읽고 옷을 찢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신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달라고 하니, 이것은 그가 나에게 싸움을 걸려고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 분명하다. 그대들은 이 점을 분명히 살피시오."
8 이스라엘 왕이 옷을 찢었다는 소리를 듣고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을 전하였다.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나에게 보내주십시오.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그에게 알려주겠습니다."
9 그리하여 나아만은 마차를 몰고 엘리사의 집에 이르러 대문 앞에 멈추었다. 10 엘리사는 사람을 내보내어 말을 전하였다. "요르단 강에 가서 그 강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시오. 그리하면 새살이 나서 깨끗하게 될 것이오." 11 나아만은 화가 치밀어 발길을 돌리면서 말하였다. "내 생각에는 적어도 그가 나에게 나와서 자기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부분을 손으로 만져 이 나병을 고쳐주려니 했다. 이럴 수가 있느냐? 12 다마스쿠스에는 이스라엘의 어떤 강물보다도 더 좋은 아바나 강과 발바르 강이 있다. 여기에서 된다면, 거기에 가서 씻어도 깨끗해지지 않겠느냐?" 나아만은 크게 노하여 발길을 옮겼다. 13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그를 막아 서며 말하였다. "만일 이 예언자가 더 어려운 일을 장군께 시켰더라면 장군께서는 그 일을 분명히 하셨을 것입니다. 그는 장군께 몸이나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14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준 대로 요르단 강으로 내려가서 일곱 번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그러자 새살이 돋아 그의 몸은 마치 어린아이 몸처럼 깨끗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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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0

1 주여, 나를 건져 주셨으니 높이 받들어 기리|나이|다. ∥ 원수들이 나를 보고 비웃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2 나의 주 하느님, 살려 달라 외치는 내 소리를 들|으시|고 ∥ 병들었던 이 몸을 고쳐 |주셨|습니|다.
3 주여, 내 목숨 지하에서 건져 |주시|고 ∥ 깊은 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려 |주셨|습니|다.
4 주님을 믿는 자들아, 찬양노래 |불러|라. ∥ 그의 거룩하신 이름에 감사|기도|바쳐|라.
5 그의 진노는 잠시뿐이요 그 어지심은 영원|하시|니, ∥ 저녁에 눈물 흘려도 아침이면 |기쁘|리-|라.
6 마음 편히 지낼 때에는 스스로 말|하기|를 ∥ 이제는 절대로 안심이다 |하였|는-|데
7 나를 어여삐 여겨, 산 위에 든든히 세워 |주시|던 ∥ 주께서 외면하셨을 때는 두려워 어쩔 줄 |몰랐|습니|다.
8 주여, 이 몸은 당신께 부르|짖으|며, ∥ 당신께 자비만을 구|하였|습니|다.
9 이 몸이 피를 흘리고 땅 속에 묻힌다 |해-|서 ∥ 당신께 좋을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 티끌들이 당신을 찬미할 수 있으|리이|까? ∥ 당신의 미쁘심을 알릴 수 |있으|리이|까?
10 주여, 이 애원을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 |주소|서. ∥ 주여, 부디 |도와|주소|서.
11 당신은 나의 통곡하는 슬픔을 춤으로 바꿔 |주시|고 ∥ 베옷을 벗기시고 잔치옷으로 갈아 입|히셨|습니|다.
12 이는 내 영혼이 끊임없이 주님을 찬미하라 하|심이|니 ∥ 주, 나의 하느님, 그 은총 노래에 담아 영원히 찬|양 하|리이|다.
○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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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린 9:24-27

24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여러분도 힘껏 달려서 상을 받도록 하십시오.  25 경기에 나서는 사람들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쓰지만 우리는 불멸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을 하되 목표 없이 달리지 않고 권투를 하되 허공을 치지 않습니다.  27 나는 내 몸을 사정없이 단련하여 언제나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은 내가 남들에게는 이기자고 외쳐놓고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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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1:40-45

40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씀 드렸다.
41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자  42 그는 곧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43 예수께서 곧 그를 보내시면서 44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네가 깨끗해진 것을 그들에게 증명하여라." 하고 엄하게 이르셨다.
45 그러나 그는 물러가서 이 일을 널리 선전하며 퍼뜨렸기 때문에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께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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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어 병든 이들을 고치시고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나눔과 섬김을 통해 어려움 속에 있는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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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믿음, 위대한 간증
(마르 1:40-45)


나병은 예로부터 ‘천형(天刑)’으로 불립니다. 감기 몸살만 걸려도 고통스럽지만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병처럼 원인도 모르는 채 끔찍한 병고를 겪게 되는 불치의 병은 누구나 하늘을 원망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불치병, 난치병을 하느님의 저주나 징벌로 여깁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께 버림 받아 나쁜 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병도 주시고 하느님이 약도 주시는 걸까요?

현대의학은 과학기술과 결합되며 놀랍게 발전했습니다. 악령 때문에 병고를 앓는다는 주장은 더 이상 보편적인 설득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경험하거니와 병에 걸린 이들은 여전히 이중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하나는 육신의 불편함과 아픔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병자가 겪어내야 하는 상황의 어려움입니다. 전자, 곧 병의 증상 자체는 발전된 의학기술을 통해 “치료”가 쉬워졌지만 후자, 곧 병자가 겪는 심리적인 혼란,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은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교회는 넓은 의미로 "치유"라고 표현하는 후자의 문제를 더 잘 다룹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치신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현대의학이 포기한 불치병도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나을 수 있다는 메시지일까요? 예수님께서 그처럼 놀라운 기적을 보이시는 분이니 그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추호도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일까요?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하느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이를 고백하고 경험하는 것은 아름다운 믿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영원한 생명, 참다운 건강은 진시황이 얻고자 했던 불로초의 차원이 아닐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건강과 생명은 마술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눈길과 손길 가운데 살아가는 일이라는 깨우침입니다.

어떤 이들은 병에 걸렸을 때에 의사의 치료를 일정한 돈을 내고 구매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때로 의술이 한계에 부딪히면 무당이나 기도원을 통해서라도 치료를 얻어내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치유의 능력으로 돈을 벌거나 세력을 얻으려는 마음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일은 그 이의 처지와 기도를 가엾게 여기시고 응답하시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신 것에 초점이 있을 뿐입니다.

위대한 믿음은 어쩌면 기적을 부르는 강력한 신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저 소박하게 일생을 살아가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일이 아닐까요?

위대한 간증은 내게 일어난 기적을 외치는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평범하게 내 삶에 충실하며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은 아닐까요?(2009.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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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고를 하느님의 사랑에 맡기면
(마르 1:40-45)


병이란 무릇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병중에서도 끔찍한 병이 ‘나병’입니다.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나병환자였던 우리나라의 시인 한하운의 싯귀입니다. 나병은 그래서 예로부터 ‘천형(天刑)’으로 불립니다. 나병은 전염병인 만큼, 병 자체도 고통스럽거니와,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소외되는 아픔이 큽니다.

병고(病苦)는 우리 삶에서 늘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몸을 지닌 인생이 병고에서 전적으로 벗어나기란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병고에 대해서 바른 인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고, 병든 이를 바로 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불치병, 난치병을 우리는 하느님의 징벌이나 저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눈길로 병자에게서 치유가 필요한 한 인간을 보실 뿐입니다. 나병환자를 보시고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치유하셨다고 복음서는 전합니다.

예수님의 ‘치유이적’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 쉽듯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놀라운 기적의 능력이 있는 분으로 믿게 하려는 쇼킹한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이적은 바로 하느님의 눈길은 병자를 자비의 눈길로 보신다는 것, 하느님의 뜻은 병자를 벌하고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치유하고 살리시는 일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현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권능, 사랑, 영광이 예수를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병자를 멸시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를 대도(代禱)합니다.

치유의 은총을 입은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것은 그저 자기의 믿음과 행운을 내세우고 자랑하는 식의 간증거리가 아닙니다.
나병이 나은 이에게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증명하라”고 말씀합니다. 중요한 것은 다시 가족과 마을로 돌아가 회복된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남은 삶을 통하여 어떻게 살아가는가는 여전히 그에게 남은 인생의 과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헨리 나웬의 표현대로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우리는 병고를 통해서, 병고를 아는 자로서, 치유의 은총을 입은 자로서 이제 다른 이의 병고를 이해하고 그의 치유를 믿고 도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병은 하느님께서 치유하십니다. 이것은 모든 병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의 병고를 통하여 치유의 하느님께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행복을 원하십니다. 병고를 통하여, 그리고 치유의 은총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참 의미를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병고를 맡기면 그것이 참된 행복과 반대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2006.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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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이 몸을 지키듯 양심이 영혼을 지킵니다


  Ⅰ)  아픔을 느끼는 감각은 인간에게 고통스런 것입니다. 하지만 아픔의 감각이 없다면 우리는 훨씬 쉽게 육신을 다치게 되고 마침내는 생명을 지키기가 어렵게 됩니다. 나병환자의 고통은 아픔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데서 시작합니다. 손가락 마디가 떨어져 나가도 아픔을 못 느낍니다. 그렇기에 나병환자의 몸은 회복할 수 없이 더욱 비참하게 망가져 갑니다.

  양심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고통스런 일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못 본 척 피하고 싶은 일, 잊어버리고 싶은 많은 일들을 경험합니다. 그 때 우리 양심은 그 때 비록 내게 고통과 불이익이 있을지라도 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이끌어줍니다. 만일 우리가 괴롭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양심의 소리를 무시한다면 그래서 양심의 기능이 마비가 된다면 나중에 결국 우리는 마치 감각을 잃은 나병환자의 몸처럼 엉망진창이 된 우리의 영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Ⅱ)  나병과 같은 불행 앞에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세상에 있는지 묻습니다.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우리는 그것을 천형, 곧 하늘이 준 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의 원인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와 마귀 들렸다는, 불행한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으며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하고 자비로운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믿으셨습니다. 천벌의 하느님이 아니라 구원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셨을 때 그 원천은 언제나 당신의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하느님 안에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고통을 모르신다고 우리는 흔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할 때 고통과 기쁨은 동시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 가운데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견디며 살아 계십니다. 고통 가운데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고통 속에서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인간의 죄와 고통과 죽음으로 얼룩진 그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붉게 피 흘리는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천형과도 같은 알 수 없는 불행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런 불행 가운데서 사랑으로 함께 해주시는 주님의 현존을 우리는 어떻게 깨닫고 있습니까? (2003.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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