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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2월 8일 (연중 5주일) 강론초 (마르 1:29-39 예수님의 전도여행)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2. 7.

 


2009년 2월 8일 연중 5주일 성서말씀 


이사 40:21-31

21 너희는 모르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한 처음부터 너희 인간에게 알려진 것이 아니냐? 땅의 터가 잡힐 때부터 잘 알고 있던 일이 아니냐?
22 지구의 대기권 위에 앉아 계시는 이, 그의 앞에서 세상 주민은 메뚜기 같지 않느냐? 그는 이 하늘을 엷은 포목인 양 펴시고 사람 사는 천막인 양 쳐놓으셨다.
23 고위층 인사들을 없애버리시고 위정자들을 그 자취도 남겨두지 아니하신다.
24 나무를 심기가 무섭게, 씨를 뿌리기가 무섭게, 그루가 땅에 뿌리를 박기가 무섭게, 하느님께서 입김을 부시니 그것들은 말라버리고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검불처럼 날려가고 만다.
25 "내가 누구의 모습이라도 닮았다는 말이냐? 내가 누구와 같다는 말이냐?" 거룩하신 이께서 말씀하신다.
26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아라.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그 군대를 불러내시어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점호하시는 이는 그분이시다. 힘이 세고 기력이 장사이신 그분의 부르심에 누가 빠질 수 있으랴?
27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런 주장을 펴느냐? "야훼께서는 나의 고생길 같은 것은 관심도 두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내 권리 따위, 알은 체도 않으신다."
28 너희는 모르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야훼께서는 영원하신 하느님, 땅의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힘이 솟구쳐 피곤을 모르시고, 슬기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29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30 청년들도 힘이 빠져 허덕이겠고 장정들도 비틀거리겠지만
31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날개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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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7:1-11

1 알렐루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 노래 얼마나 |좋으|냐. ∥ 우리 하느님, 그 찬미 얼마나 |부드|러우|냐.
2 주님은 예루살렘을 세|우신|분, ∥ 흩어졌던 이스라엘을 모아|들이|시는|분,
3 상처 입은 마음을 |고치|시고 ∥ 터진 상처를 싸매 |주시|는-|분,
4 별들의 수효를 헤아|리시|고 ∥ 낱낱이 이름을 붙여 |주시|는-|분,
5 전능하신 우리의 주님 얼마나 |크시|냐. ○그의 슬기 형용|할 길|없어|라.
6 주, 낮은 자는 들어 올|리시|고 ∥ 악인들은 땅에까지 |낮추|신-|다.
7 주님께 감사노래 |불러|라. ∥ 수금 타며 우리 하느님 |찬미|하여|라.
8 구름으로 하늘 덮어 땅에 비를 내|리시|고, ○이 산에도 풀, 저 산에도 풀, 사람 먹을 곡식 |나게|하시|며,
9 짐승들과 울어대는 까마귀 |새끼|에게 ∥ 먹이를 마련|하시|는-|분,
10 힘센 말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 힘 좋은 장정의 다리도 반기지 |않으|신-|다.
11 당신 두려운 줄 |아는|사람, ∥ 당신 사랑 믿는 사람, 그들만을 |반기|신-|다.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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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린 9:16-23

16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17 만일 내가 내 자유로 이 일을 택해서 하고 있다면 응당 보수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 자유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일을 내 직무로 맡겨주신 것입니다. 18 그러니 나에게 무슨 보수가 있겠습니까? 보수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응당 받을 수 있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19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는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0 내가 유다인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처럼 되었고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나 자신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얻으려고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21 나는 그리스도의 법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실상은 하느님의 율법을 떠난 사람이 아니지만 율법이 없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율법이 없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22 그리고 내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들처럼 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중에서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한 것입니다. 23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다 같이 복음의 축복을 나누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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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1:29-39

29 얼마 뒤에 예수께서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 들어가셨다. 30 때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사정을 예수께 알렸다.  31 예수께서 그 부인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이 내리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해가 지고 날이 저물었을 때에 사람들이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들을 모두 예수께 데려왔으며 33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께서는 온갖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시며 자기 일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마귀들은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날 새벽 예수께서는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고 계셨다. 36 그 때 시몬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다니다가  37 만나서 "모두들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근방 다음 동네에도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39 이렇게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찾아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며 마귀를 쫓아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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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구원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병든 이들을 고치시어 몸과 마음을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상한 몸과 영혼을 치유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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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눈길, 손길, 발길을 전하는 전도 (마르 1:29-39)


오늘 복음서는 예수님의 전도여행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회당에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며 곳곳마다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한 곳에 머물지 않으시고 계속 여행을 하시면서도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시는 모습은 인상적입니다.

요즘엔 전도라는 말이 “자기 교회에 새 신자를 데려오는 일”로 의미가 좁아졌지만 실상 전도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에 알리고 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로 전도인 것이지요.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은 일종의 여가생활, 취미생활 같은 느낌마저 들지만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은 나라 전체가 철저하게 율법에 의해서 통제되는 사회였습니다. 율법은 단순히 종교적인 전례법규(루브릭)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가치를 형성하는 세계관의 근거이기도 하고 생활관계를 통제하는 실정법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복음, 예수님이 행하신 전도를 이해하고 오늘 우리 시대에 복음을 전하려면 율법의 이런 성격을 잘 살펴야 합니다. 바울로 사도께서 자신의 이방인 선교의 과정에서 밝히신 대로 예수님의 복음은 바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는 일이고 곧 율법을 폐기하고 대안을 세우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갈등이 깊습니다. 이념, 세대간, 계층간, 지역간, 각종 이해관계의 갈등 들이 서로 얽혀있습니다. 이 갈등에 대한 최선의 답이 바로 “법”을 만들고 법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입법부는 법을 만들고 행정부는 법을 따라 일하고 사법부는 법에 의거해 심판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안정된 법치국가임은 참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여전히 혼란스럽습니까? 왜 이렇게 억울하다는 사람이 많습니까? 법을 내세우기 이전에 이미 우리의 가치관이 어지러워졌기 때문입니다. 법이 아니고는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인심이 각박하고 흉흉해졌기 때문입니다. 길게 말하지는 않습니다만, 용산 철거민 참사사건이나 군포 연쇄살인사건이 법이 없어서 생긴 일이 아닙니다. 법을 더 엄격히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어떤 의미인가를 진정 깨닫지 못하는 한 계속 반복될 수 밖에 없는 불행입니다.  

예수님의 전도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웬 법 이야기로 흘러가는가 의아하시지요?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그리스도교를 세우고 그 신자를 얻기 위해서 전도하시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단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쫒는 기적적인 능력을 가진 영험한 무당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하는 것, 따라야 하는 것이 단순히 “예수 믿고 병고치자, 예수 믿고 부자되자, 예수 믿어 천당가자”는 내용이 아님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병의 치유는 자기 몸에 대한 사랑과 의술의 도움으로 이루어집니다. 부자가 되는 일은 자신의 노력과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가능해집니다. 천당에 가는 일은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에 의지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니어도 건강한 이, 부자, 마음이 평안한 이들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건강한 몸으로 부족함 없는 경제생활을 하며 평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기도하고 경험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목적의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 “모든 것은 곁들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십니다.
당시에 병자들은 율법의 눈길로 보면 무언가 하느님께 죄를 지어 벌을 받는 이들입니다. 육신의 병도 고통스러운데 죄인이라는 정죄까지 따라붙는 것입니다.
율법의 손길은 병자들을 방치하거나 격리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충분히 벌을 받아야 하고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율법의 발길은 병자들을 피해갑니다. 종교적인 거룩함을 핑계로 삼고 말입니다. 병자들은 악령에 사로잡혀 시달리는 사람들로 간주됩니다.
율법은 그들을 불편해하지만 돕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의 묵인 하에 악령이 행세한다고 여기는 한 악령을 쫓아내는 일에 하느님의 권위를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시며 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신 것은 일관된 언행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병으로 사람을 벌하시지 않는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고치시고 살리시는 분이시지 병들고 망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마귀의 일들을 묵인하고 방치하시지 않고 쫓아내어 사람들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십니다.

율법을 주장하는 이들의 권위 없는 가르침, 마치 철사줄 같은 통제에 옥죄이며 살던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은 생생한 복음,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권위, 새로운 가르침, 마침내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문자적인 차원이 아니라 그 정신을 구현하는 차원에서 하느님나라, 하느님 사랑의 이름으로 완성하신 것입니다.  

전도란 세상을 향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느님의 눈길, 손길, 발길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의 통치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과 권력이 우리를 통제하여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되지 않습니다. 윤리, 도덕, 법을 잘 지키라는 것이 복음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우리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라는 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시선이 주님의 눈길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의 실천이 주님의 손길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의 입장이 주님의 발길을 닮아야 합니다.  

저나 교우 여러분이나 이 사회에 적응해 살기 위해 지식과 지혜를 많이 갖춘 편에 속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판단을 가지고 이 땅의 불행한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 허약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못 배운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마치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 때”까지 아직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충분히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잘 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어쩌면 우리들도 하느님께 인정받지 못하여 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쓸데없는 콤플렉스를 가지지 않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 애틋한 마음을 깊이 느끼지 못한다면 아직 우리는 하느님을 충분히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하느님의 마음에 감동하고 하느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에서부터 가장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이에게까지 하느님의 그 마음과 능력은 차별과 제한이 없으심을 전하는 일입니다. 차가운 율법의 벽 뒤에서 자기들끼리 누리는 고상한 거룩함이 구원일 수 없습니다. 뜨거운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마주잡는 손길이 구원입니다. 전도는 그래서 자격있는 회원을 모으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은총과 진리를 조건없이 나누는 일입니다. 전도는 무슨 목표를 달성하고 실적을 올려야 하는 부담스런 사역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경험한 만큼 기쁘게 전할 수 있는 기회의 연속입니다.

올 한 해 우리 분당교회에 주님의 눈길, 주님의 손길, 주님의 발길을 기쁘게 세상에 전하는 전도의 기운이 새로워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009.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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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 (마르 1:29-39)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말의 줄임말입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우리는 “예수”라는 말과 “그리스도”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정확히 이해해야 하는데 성경에 바로 그 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통스런 역사 속에서 어떤 그리스도(=메시야)를 기대했고, 하느님은 그들에게 예수님을 어떤 그리스도로 보내주셨고, 사람들은 그 분을 어떻게 대했는가 하는 것이 복음서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과연 어떻게 사셨고, 무엇을 외치셨고 가르치셨으며, 어떤 일을 행하시고, 어떻게 돌아가시고 어떻게 다시 살아나셨는가 하는 것이 복음서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시고,” 날이 저물었을 때는 “온갖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시고 다음 날 새벽에는 외딴 곳에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갈릴래아 다른 동네로 향해 전도하러 길을 떠나십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신 일 안에서 기적을 찾으며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그 일”들을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아듣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시고, 병든 것을 고치시고, 생명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영원히 조건 없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위대한 장인(丈人)이 자신의 작품을 챙기듯이, 농부가 심겨진 과일나무를 기르듯이,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부모가 자식의 일생을 보살피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뜻이 당신의 창조물인 이 세상을 향해 펼쳐지는 것을 성경은 “하느님 나라”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요, 하느님나라의 인정받는 백성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느님나라를 마음껏 누리라는 “잔치초대”를 해주시고 그 하느님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참여하는 “특권”이 인생이 참 행복이요 보람임을 알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바라는 청구목록을 나열하는 일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누리는 일이고, 하느님의 품안에서 쉬면서, 하느님나라를 위하여 일할 새 힘을 공급받는 일입니다. 기도하면서 우리는 인생살이의 참뜻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수퍼맨”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일 수 없고, 우리 안에 부여된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예수님을 닮은 사랑의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예배와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위로와 새 힘을 얻고 그 사랑에 의지하며 일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 성숙한 인간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을 때까지 주님은 우리를 늘 돌보십니다.(2006. 2. 5)==================================================================================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며 전하는 일, 전도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말의 줄임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가 그리스도시다"는 말이 의외로 그렇게 자명한 내용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거나 믿으라고 전하려면 우리는 먼저 "예수"라는 말이 가리키는 의미와 "그리스도"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의미들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상상이나 추론을 통해서? 각자의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정답은 바로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더 정확히는 "성경의 해석"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그토록 "하느님의 말씀"으로 중요시 여깁니다. 또 성경을 해석하는 교회의 권위를 존중하고, 또 성경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떻게 사셨고 무엇을 외치셨고 가르치셨으며 어떤 일을 행하시고 어떻게 돌아가시고 어떻게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가에 대한 관심이 복음서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스런 역사 속에서 어떤 메시야를 기대했고 이제 하느님은 그들에게 예수님을 어떤 그리스도로 보내주셨고 사람들은 그 분을 어떻게 대했는가 하는 것이 또한 복음서에 나타나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회당에 들렸던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시고, "해가 지고 날이 저물었을 때"는 "온갖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래아 다른 동네로 향해 전도하러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신 일 안에서 기적을 발견하고 신기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들을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듣는 사람입니다. 또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통해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데려온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 들린 사람들의 마귀를 쫓으셨습니다. 가시는 곳곳마다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시면서도 또한 틈을 내어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런 일들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보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런 일들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삶을 회복시키시고 병든 것을 고치시고 생명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그 일에 참여하는 특권을 소명으로 받았고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위로와 새 힘을 얻고 하느님의 그 사랑에 의지하며 일생을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며 하느님의 다스림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 그 귀한 전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2003.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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