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8일 (성탄 1주일) 성서말씀
제1독서: 이사 61:10-62:3
10 야훼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 그는 구원의 빛나는 옷을 나에게 입혀 주셨고 정의가 펄럭이는 겉옷을 둘러 주셨다. 신랑처럼 빛나는 관을 씌워 주셨고 신부처럼 패물을 달아 주셨다. 11 땅에서 새싹이 돋아 나듯 동산에 뿌린 씨가 움트듯 주 야훼께서는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정의가 서고 찬양이 넘쳐 흐르게 하신다.
1 시온을 생각할 때, 나는 잠잠할 수가 없다. 예루살렘을 생각할 때,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의 정의가 동터 오고 그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르기까지 어찌 잠잠할 수 있으랴?
2 마침내 뭇 민족이 너의 정의를 보고 모든 제왕이 너의 영광을 보리라. 야훼께서 몸소 지어 주실 새 이름, 사람들이 그 이름으로 너를 부르리라.
3 너는 야훼의 손에 들려 있는 화려한 관처럼 빛나고 너의 하느님 손바닥에 놓인 왕관처럼 어여쁘리라.
제2독서: 갈라 4:4-7
4 그러나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5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읍니다. 6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 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 주셨읍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읍니다. 7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인 것입니다.
복음: 루가 2:15-21
15 천사들이 목자들을 떠나 하늘로 돌아 간 뒤에 목자들은 서로 "어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사실을 보자" 하면서 16 곧 달려 가 보았더니 마리아와 요셉이 있었고 과연 그 아기는 구유에 누워 있었다. 17 아기를 본 목자들이 사람들에게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이야기하였더니 18 목자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 일을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19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 20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보고 한 것이 천사들에게 들은 바와 같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 갔다.
21 여드레째 되는 날은 아기에게 할례를 베푸는 날이었다. 그 날이 되자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대로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본기도: 구원의 주님, 성자께서는 참 빛으로 오시어 이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로 하여금 그 빛을 따라 이 세상에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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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율법의 지배를 넘어서는 구원 이야기
어느덧 2008년 마지막 주일을 맞았습니다. 올 한해 우리의 삶에는 성취도 있고 실패도 있었습니다. 사별과 탄생, 슬픔과 기쁨도 있었습니다. 때로 사고와 병고도 있고 갈등과 긴장도 있었습니다. 다만 교만이나 좌절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으로 새로이 새해를 맞이 할 수 있는 것이 은총의 힘입니다.
우리 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 모두 전망이 몹시 어둡고 어지럽습니다. 정치인을 탓하고 경제 상황을 원망할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의 어려움은 우리의 선택과 책임이기도 하고 우리가 견디고 이겨내야 할 현실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떤 빛으로 보는가, 곧 어디에 근거를 두고 희망을 찾는가를 물을 일입니다.
어떤 이들은 요즘의 혼돈을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기 위한 과정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답을 찾을 수 있다면 실은 우리의 역사 전부가 “잃어버린 2000년”인지도 모릅니다. 과연 지금 우리의 지혜가 이천년 전보다 밝아졌고 지금 인류의 희망이 이천년 전보다 더 뚜렷해졌습니까? 백배 양보해서 지금 우리가 소망하는 십년 전보다 더 낳은 희망이란 도대체 어떤 내용입니까? 부질없는 해석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사회가 어떤 빛을 받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새벽에 어둠을 뚫고 솟는 태양 빛과 같은 주님의 빛을 받고 있다면 우리의 고통과 시련은 말 그대로 우리를 정련하여 새롭게 하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깨어나 더욱 더 건강하고 건전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치 양계장에 24시간 밝혀놓은 전등과 같이 욕심과 무지로 조작된 빛을 구분하지 못하고 빛인 양 추종한다면 우리는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천사들이 기쁘게 소식을 전한 성탄은 하느님의 빛이 어두운 세상을 새롭게 비추었음을 뜻합니다. 그 빛은 황금이나 서적과 창검의 날빛에서 오지 않고 구유에 누운 한 아기의 맑은 눈빛에서 시작됩니다.
바울로는 이 일을 표현하기를 “때가 차서 하느님의 아들이 여자의 몸에 나게 하시어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고, 마침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내시고 또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다”고 합니다.
구원은 “율법의 지배”를 벗어나는 일입니다. 더 정확히는 “율법의 정신”을 구현하고 완성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인 것을 사랑하고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으로 혹독히 길들여야 할 수준의 인간에서 스스로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살아가는 인간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성탄의 빛, 구유에 아기로 누운 그리스도,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육화의 신비,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인간성, 우리들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이요 긍정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성령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진정한 회개는 우리가 못 지킨 율법조항에 따라 받게 될 징벌을 두려워하여 후회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도리어 외면적인 율법준수를 내세워 짐짓 떳떳한 인간인 양 위선을 떨며 다른 이를 정죄하며 스스로가 자기 구원을 확보해내는 것처럼 교만하게 구는 일을 깊이 반성하고,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하여 겸손히 마음을 비우고 돌아오라는 것이 예수님이 요청하시는 회개의 내용에 가깝습니다.
율법은 본래 하느님의 백성으로 계약을 맺은 표로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하느님의 백성을 선택하여 노예살이에서 이끌어내고 하느님을 모신 백성으로서 율법을 지키며 살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하느님의 자비를 넘어서서 구원을 좌우하는 것처럼 기능하면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율법의 문제를 이천년전의 일이라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돈의 힘이 마치 율법처럼 기능합니다. 돈도 그 자체로는 선한 것이고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돈이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처럼, 곧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인 것처럼, 우리의 가치관까지도 바꿀 수 있는 힘으로 여겨진다면 그 때 돈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악마적인 힘이 됩니다.
우리의 어둠, 우리의 위기의 본질은 이렇게 본분을 잊고 과도하게 행사되는 “율법의 지배”, “돈의 지배”에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중매체를 차분히 살펴보십시오. “율법의 지배”, “돈의 지배”를 강화해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입니다. 그것이 도리어 인간을 억압하고 타락시키는 길임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정작 인간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은총”, “십자가의 진리” 따위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무시되거나 율법과 돈의 지배를 합리화해주는 수단으로 왜곡됩니다.
천사는 당대의 정치가, 종교가, 세도가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지배, 권력의 지배, 돈의 지배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구태여 그리스도가 구유에 아기로 누워있는 있는 신비가 필요 없습니다. 마태오복음서에 전하듯 아기학살의 명령을 내리는 헤로데에게 성탄은 기쁜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천사는 당대의 최하층 신분인 목자들에게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달려가서 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구유에 한 아기가 누워있는 것을 보고 천사들이 알려준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성탄을 맞습니까? 우리가 만난 천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율법의 지배, 돈의 지배를 넘어서는 구원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구유에 누운 한 아기”에게서 마침내 “사랑의 왕국”,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완성되리라는 믿음과 소망을 갖습니까?
우리들 자신을 포함하여 외롭고 가난하고 고단하고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이들에게 이 성탄절기에 차분히 오늘 복음서가 전하는 성탄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떠들썩하고 화려한 파티의 유력 인사가 아니라 조용하고 가난한 구유 위의 아기가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표지입니다.
우리들 교회가 목자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알리는 천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 교회가 그 가난한 구유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 교회가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한 성모 마리아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 아기의 이름이 바로 “예수”라고!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참으로 높여야 합니다.(2008.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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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인내로 맞는 “아기" 구세주
어느덧 2002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돌아보면 보람과 아쉬움이 교차하지만 우리는 결국 올 한해도 은총으로 살아온 삶임을 깨닫고 고백하게 됩니다.
올해에도 팔레스타인, 러시아와 체첸, 카시미르와 지구 곳곳에서 전쟁과 테러는 그치질 않았습니다. 지금도 이라크에는 전쟁이 임박하고, 이 땅 한반도에도 벼랑 끝으로 치닫는 북한과 미국에 의한 핵위기가 현실입니다. 전 세계에 각종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고 우리 사회에도 계층간, 세대간, 지역간의 갈등이 깊어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까?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닌, 억지로 고통과 위험을 외면하려는 것이 아닌 참된 희망은 가능한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아기 예수님이 세상에 나신 이야기를 들으며 참된 희망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구원은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구세주는 초인적인 존재로 하늘에서 보좌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연약한 아기로 구유 위에 누워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며 거짓 희망을 만들어 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현실에 정직해야 합니다. 현실은 고통 자체입니다. 미움과 다툼, 시기와 질투가 있고 오해와 차별, 무지와 어둠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참된 희망은 희망 없는 현실에서 생겨납니다. 인간이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을 때, 살아계신 하느님을 향해 그저 부르짖을 수 밖에 없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희망이 무엇인지, 어떻게 가능한지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권력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고 재물이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진리만이 우리를 살리고 하느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바로 희망 없는 현실 속에서 찬란히 동터오는 구원의 희망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세주는 아직 어린 아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과 인내로서 아기 구세주를 맞이합니다. 이 아기는 우리들의 내면에서, 우리들의 관계 속에서, 우리들의 세상 속에서, 작은 속삭임으로 시작해서 참된 울림으로 커져가고 마침내 아무도 막지 못할 하느님 나라의 선포, 사랑과 진리의 외침으로 세상을 뒤흔드실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은 구유에 누워 방긋방긋 웃고 계신 아기 예수를 가슴에 품어 안고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도록 합시다. (2002.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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