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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12월 7일 (대림2주일) 강론초 (마르1:1-8 복음의 시작)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12. 5.



2008년 12월 7일 대림 2주일 성서말씀

이사 40:1-11

1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2 "예루살렘 시민에게 다정스레 일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났다고, 그만하면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야훼의 손에서 죄벌을 곱절이나 받았다고 외쳐라."
3 한 소리 있어 외친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4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5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리니 모든 사람이 그 영화를 뵈리라. 야훼께서 친히 이렇게 약속하셨다."
6 한 소리 있어 명하신다. "외쳐라." "무엇을 외칠까요?" 하고 나는 물었다.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7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스쳐가는 야훼의 입김에. 백성이란 실로 풀과 같은 존재이다. 8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9 너, 시온아. 높은 산에 올라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너, 예루살렘아. 힘껏 외쳐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질러라. 유다의 모든 도시에 알려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저기 오신다. 10 주 야훼께서 저기 권능을 떨치시며 오신다. 팔을 휘둘러 정복하시고 승리하신 보람으로 찾은 백성을 데리고 오신다. 수고하신 값으로 얻은 백성을 앞세우고 오신다. 11 목자처럼 당신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며, 새끼 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 

시편 85:[1-2]8-13

[1 주여, 당신 땅을 어여삐 여|기시|어 ∥ 귀양살이 야곱을 돌아|오게|하시|고,
2 당신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며 ∥ 저희 모든 허물을 덮어 |주셨|으-|니,]
8 나는 들었나니, 주께서 무슨 말씀 하|셨는|가? ∥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 그것은 분명히 |평화|로-|다.
○ 당신 백성과 당신을 따르는 자들, 또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않으|면 ∥ 그들에게 평화를 |주시|리로|다.
9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정녕 가|까우|니 ∥ 그의 영광이 우리 땅에 |깃드|시리|라.
10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11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 |나오|고 ∥ 하늘에서 정의가 |굽어|보리|라.
12 주께서 복을 내리|시리|니 ∥ 우리 땅이 열매를 |맺어|주리|라.
13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 |나가|고, ∥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가리|라.
○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2베드 3:8-15상

8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9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갑자기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천체는 타서 녹아버리고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11 이렇게 모든 것이 다 파괴될 것이니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면서 12 하느님의 심판날을 기다릴 뿐 아니라 그 날이 속히 오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하늘은 불타 없어지고 천체는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여 있습니다.

14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만큼 티와 흠이 없이 살면서 하느님과 화목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15상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도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마르 1:1-8

1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2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이제 내가 일꾼을 너보다 먼저 보내니 그가 네 갈 길을 미리 닦아놓으리라." 하였고, 3 또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하였는데, 기록되어 있는 대로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하고 선포하였다.

5 그 때 온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 와서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

7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자비로우신 하느님,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회개를 선포하시고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에 귀 기울여 모든 죄를 멀리하고, 다시 오시는 구세주 예수를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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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마르 1:1-8)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마르코복음의 첫구절이자 그제목입니다. 한자어로 표현된 “복음(福音)”에서 “복받는 비결” 따위를 기대한다면 가벼운 오해를 한 셈이 되겠습니다.^^ 복음의 바른 이해는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마르코는 세상에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기쁜 소식”이라고 표현합니다. 왜, 무엇이 기쁜 소식일까요? 
 

우리는 흔히 하느님께 복을 구하는 것을 신앙생활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더 좋은 이해는 복을 주시는 하느님을 구하는 일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께 관한 일이 왜 기쁜 소식인가를 깨닫기 위해 우선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구원에 관한 이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시기 전에도 하느님은 하느님이셨습니다. 예수님과 관계없이도 사람들은 하느님께 복을 구했고 또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렸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망쳐버리고 스스로 화를 부른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의 잘못된 욕심이 죄를 부르고 죄가 굳어져 악이 됩니다. 악은 죽음의 권세를 행사하며 온갖 불행을 가져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징벌을 두려워하지만 실은 그 징벌은 구원의 과정입니다. 징계가 없어 사람들이 돌이키지 못하면 멸망의 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화를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잘못된 욕심과 판단을 일으키는 마음의 돌이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밖으로 규정대로 제물을 드려 속죄하는 것으로 화를 피하고자 하였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성전제사를 바치는 일이 하느님께의 순종이라는 본래 정신을 회복하는 일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하느님과의 거래를 통해서 화를 피하고 복을 기대하는 일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외면적인 기준으로 평가를 하다 보니 배운 것, 가진 것, 여유로움이 있는 이들은 더 율법을 잘 지키고 복을 받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무식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살기 바쁜 이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지 못하고 그 때문에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본래는 구원의 소식인 율법준수와 성전제사가 이제는 무거운 짐, 우울한 소식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의 살아계심이 도무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 등장하여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이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은 구원을 위하여 임박한 하느님의 징벌을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단지 징벌을 피하고 복을 받는 일보다 더 깊은 차원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구원이란 마음을 바꾸어 하느님 앞에,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전 제사로 드리는 제물이 아니라 회개를 통한 삶의 변화가 구원을 보장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참된 의미를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본래의 빛에서 밝혀 전한 세례자 요한은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높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는 곧 하느님의 다스림이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역으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리고 협조자 성령을 통한 사역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허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하여 선구자 역할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이 대림절기에 우리가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다시 들어야 하는 까닭은 오늘도 예수님에 관한 소식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에 과연 예수님에 관한 소식, 특별히 예수님을 머리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그 분의 일을 한다고 하는 교회가 과연 세상을 향해 기쁜 소식을 들려주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기쁜 소식으로 기뻐하고 정말 기쁨에 넘쳐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일까요?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통하여 우리는 다시금 성찰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맞아들이는 일은 외면적으로 그 분의 능력과 권세를 추앙하며 또 다시 그 분에게 화를 면하고 복을 구하는 기도를 바쳐서 종교적인 욕구를 채우려는 일로 작아져서는 안됩니다.

성탄의 기다림은 복채를 들고 초조히 점괘를 기다리는 그런 기다림일 수 없습니다. 성탄의 기다림은 아기 예수를 태중에 간직한 성모 마리아의 그런 기다림입니다. 그 기다림은 온 세상에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소망을 포함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 마음 안에서부터 주님이 주님이 되시도록 준비하는 일이 됩니다. 그 분을 우리 마음의 주님, 우리 삶의 전부인 분으로 모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들을 우리의 삶에서 한 가지씩 시작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영과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됨을 경험하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 일을 표현하길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그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고 합니다.

4주간 대림절기를 보내며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되고 주님의 성탄과 공현을 맞으며 새해를 시작합니다. 교회력과 사회력의 맞물림은 세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믿음의 가치를 전해줍니다.
대림절 동안 우리가 이미 받은 축복을 깊이 감사하고, 앞으로 받을 풍성한 축복을 기원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더욱 귀한 일은 그 축복의 주님이 바로 우리 마음에 오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믿음을 굳게 간직하는 일입니다. 그 기쁨이 바로 복음의 그 기쁨의 원천입니다.

대림절기 동안 교회와 교우들의 기쁨이 더욱 더 커지고 깊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008.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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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개는 성령을 우리 안에 모셔 들이는 일 (마르 1:1-8)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듣습니다.

참된 “회개”를 위해서는 먼저 “죄”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성서에서 “죄”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이런저런 명령과 금령을 지키지 못한 일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의 내용 가운데서 죄의 기준이 되는 말씀들을 찾아내 정리하고 그것을 어김없이 지키려고 애쓰는, 이른바 청교도적인 태도로 사는 것이 거룩한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은 이런 이해도 복음을 충분히 이해한 것이 아닌 듯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15:12)는 새계명으로 모든 율법적인 요구를 대신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행위는 모두 다 죄가 됩니다.”(로마 14:23)고 바울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결국 “복음”이 관심하는 죄의 문제는 우리가 어떤 율법규정을 준수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사랑의 힘으로, 믿음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죄”의 본질은 우리가 하느님을 살아계신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데서 비롯합니다. 우리를 초월하는 절대자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곧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모든 일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하느님을 잊어버린,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잃어버린 우리는 모든 진정한 관계를 맺을 능력을 상실한 상태가 되고 맙니다.

저는 문득문득 모든 일과 대상과 사람에 그저 무덤덤하고 무관심하며 그저 나 개인의 희노애락에만 사로잡혀 지내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만, 이것이야말로 제가 죄에 사로잡혀 있음을 드러내는 모습일 터입니다. 우리가 다른 상대와 참된 교류를 나누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신에게 갇혀있고, 과거의 경험에 갇혀있고, 새로운 관계를 맺어갈 능력을 잃고 있음을 뜻하는데 그것이 바로 죄의 상태인 것입니다.  

“회개”란 바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돌아서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럼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만물과 올바른 관계속에 살아가는 일입니다. “회개”는 성전에서 제물을 드려서 벗어야 할 면죄의 문제가 아니고, 이제는 새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인정을 받자는 굳센 의지의 문제도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내게 오시는 주님을 온전히 내 안에 모셔 들이는 일입니다.

대림절기를 지키며 우리는 주님의 “오셨음”을 기억하고 “다시오심”을 기다리며 “늘 오셔계심”을 기도합니다. 이는 곧 살아계신 성 삼위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과 능력에 우리 과거, 현재, 미래의 일생을 온전히 내어 맡기며 나날의 새로움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2005.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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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뉘우치고 돌이켜서” 하느님의 나라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이 선포를 들으면서 이 대림절에 우리는 “회개”의 참뜻을 되새깁니다.

스스로 저지른 잘못에 대해 두렵고 슬프고 아픈 감정을 갖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지만 이 감정이 곧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철저한 반성이고 완전한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많은 이들이 근거 없는 막연한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고민하며 위축된 삶을 사는 것을 “회개”하는 모습이라 오해합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를 위해서는 먼저 죄악을 분별하는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깊은 반성 없이 우리에게 주입되고 내면화된 세상의 이런저런 명령과 금령을 그대로 추종한다고 해서 우리 자신과 세상이 더 의로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는 오직 하느님 앞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에 대한 분명한 기준은 기존의 인간질서가 아니라 바로 새로이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곧 “하느님의 다스림”이고 “부르심”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정죄하여 벌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의 나라, 즉 당신의 다스림 안에 들도록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율법 계명을 못 지켰다고 정죄하고 잘 지켰다고 구원하는 하느님의 이미지는 유대인들이 사로잡힌 옛 관념이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은 율법적 요구를 폐기하시고 당신의 무조건적인 연민과 의로움과 절대적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표현은 하느님의 이 새로운 구원의지를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바로 이 하느님나라의 시작이요, 완성이라는 것이 성서와 교회의 증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간적인 결함이 하느님나라에 드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가 아니고, 도리어 하느님나라를 거절하는 인간의 교만과 어리석음이 가장 심각한 죄가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의 약함과 어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회개를 통해 기쁨과 희망에 찬 새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불필요한 죄의식과 두려움에 허덕이고 서로를 정죄하며 위선적인 삶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기적인 동기와 태도로 찌들려 살던 삶을 뉘우치고 돌이켜서 하느님의 풍성하고 사랑스런 다스림을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그 크신 사랑을 체험하고 우리도 또한 우리의 이웃에게 그 사랑을 진실을 다해 함께 나누는 것, 그것이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약속되고 허락된 구원입니다. (200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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