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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11월 16일 (연중 33주일) 강론초 (마태 25:14-30 달란트의 비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11. 12.

2008년 11월 16일 연중 33주일 성서말씀

스바 1:7, 12-18

7 주 야훼 앞에서 입을 다물어라. 야훼께서 오실 날이 다가왔다. 야훼께서는 이미 제물을 마련하시고 손님들을 목욕재계시키셨다.
12 "그 때가 되면 나는 불을 켜들고 예루살렘을 뒤지리라. 팔자가 늘어져 스스로 말하기를 '야훼가 무슨 복을 주랴? 무슨 화를 주랴?' 하는 자들을 벌하리라. 13 그들의 재산은 털리고 집은 헐리리니, 일껏 집을 짓고도 거기에서 살지 못하고 일껏 포도 농사를 하고도 술을 빚어 마시지 못하리라."
14 야훼께서 오실 무서운 날이 다가왔다. 득달같이 다가왔다. 야훼께서 오실 날, 역마보다 날쌔게 오는구나. 군인보다도 잽싸게 닥치는구나. 15 그 날은 야훼의 분노가 터지는 날, 모두들 죽도록 고생하는 날, 폭풍에 휩쓸려가는 날, 먹구름이 뒤덮이는 어두운 날, 16 나팔 소리 울리며 함성이 터지는 날이다. "저 든든한 성을 쳐라. 귀퉁이에 솟아 있는 망대를 쳐라." 17 "내가 사람들을 몰아치리니, 그들은 소경처럼 더듬거리다가 피를 땅에 뿌리고 배알을 거름덩이처럼 쏟으리라. 그들이 나에게 죄를 지은 탓이다.
18 은과 금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으로 그 난을 면하지는 못하리라." 야훼의 분노가 타오르는 날, 온 세상은 활활 타버리리라. 그가 세상 사람을 송두리째 순식간에 멸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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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0:1-8, 12

1 주여, 당신은 대|대손|손 ∥ 우리의 피난처가 |되셨|나이|다.
2 산들이 생기기 전, 땅과 세상이 태어|나기|전, ∥ 한 옛날부터 영원히 당|신은|하느|님,
3 사람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 “사람아, 돌아가라” |하시|오-|니
4 당신 앞에서는 천 년도 하루|와 같|아 ∥ 지나간 어제 같고, 깨어 있는 밤과 |같사|오-|니
5 당신께서 휩쓸어 가시면, 인생은 한바탕 |꿈이|요, ∥ 아침에 돋아나는 |풀잎|입니|다.
6 아침에는 싱싱하게 피었|다가|도 ∥ 저녁이면 시들어 마르는 |풀잎|입니|다.
7 홧김을 한번 뿜으시면 우리는 없어져 |버리|고 ∥ 노기를 한번 띠시면 우리는 소|스라|칩니|다.
8 우리의 잘못을 당신 앞에 놓|으시|니 ∥ 우리의 숨은 죄 당신 앞에 낱낱이 |드러|납니|다.
12 우리에게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알게 |하시|고 ∥ 우리의 마음이 지혜에 이|르게|하소|서.
○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그리고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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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데살 5:1-11

1 교우 여러분, 그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습니다. 2  주님의 날이 마치 밤중의 도둑같이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사람들이 태평세월을 노래하고 있을 때에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들이닥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해산할 여자에게 닥치는 진통과 같아서 결코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4 그러나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암흑 속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그 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5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읍시다. 7 잠자는 사람들은 밤에 자고 술마시는 사람들도 밤에 마시고 취합니다. 8 그러나 우리는 대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음과 사랑으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구원의 희망으로 투구를 씁시다.
9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기로 작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10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 수 있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11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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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25:14-30

14 "하늘 나라는 또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었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돈 다섯 달란트를 주고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16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17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18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가서 그 돈을 땅에 묻어두었다. 19 얼마 뒤에 주인이 와서 그 종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주인님, 주인께서 저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1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하고 말하였다.
22 그 다음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와서 '주인님, 두 달란트를 저에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래서 주인은 그에게도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하고 말하였다.
24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와서 '주인님,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주인님의 돈을 가지고 가서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그 돈이 그대로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6 그러자 주인은 그 종에게 호통을 쳤다.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인 줄로 알고 있었다면 27 내 돈을 돈 쓸 사람에게 꾸어주었다가 내가 돌아올 때에 그 돈에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
28 여봐라, 저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29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30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아라.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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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영원하신 하느님, 태초부터 영원까지 살아계시며 이 세상을 다스리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재능으로 이 땅에서 신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여 영원한 나라를 얻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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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을 깨닫고 기쁘게 이루는 삶 (마태 25:14-30) 

“수명을 살지말고 생명을 살라”는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경험하는 결과로는 수명과 생명의 물리적 시간적 길이는 같습니다.
다른 것은 그 의미의 깊이입니다. 그 의미의 차이는 바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저절로 우연히 생긴 것으로 보는가 아니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보는가에서 생기기 시작합니다.

수명을 사는 사람은 모든 관심사가 자기 중심입니다. 자기에게 좋은 것은 선하고 정의로운 것이고 아니면 악하고 불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삶을 살아가며 판단하는 근거, 행동하는 동기는 어떤 일이 자기에게 얼마나 이로운가에 있습니다. 이롭지 않으면 구태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에 반해 생명을 사는 사람의 관심사는 하느님과 자신과 세상과의 삼위일체적 관계입니다. 그는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즉 소명으로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위해 원하시고 펼치시는 일을 맡겨주셨다는 깨달음입니다.
물론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압니다. 우리는 정말 먼지 같고 벌레 같은 존재입니다. 아무 것도 내세울 것도, 주장할 것도 없는 처지입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상대로, 하느님의 자녀로, 창조와 구원의 동역자로 삼아주신다는 것이 신비한 은총입니다.
생명을 사는 이가 판단하고 행동하는 근거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오늘 달란트의 비유는 종말에 관련된 비유 말씀입니다.

종말론(終末論, eschatology) 이라는 것은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에 대한 믿음을 일컫는 말입니다. 아주 오래된 믿음으로 우리가 물려받은 것이지만 현대인인 우리는 그 내용을 더욱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 때란 우리 모든 개인이 예상하고 있고 피할 수 없음을 아는 죽음의 순간에서 비롯한 생각입니다. 그것은 잉태되어 있다가 산고를 통해 생명이 태어나는 경험과도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개인을 넘어선 나라와 역사도 또한 파국과 새로운 창조, 곧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을 단선적인 시간이라는 면에서만 이해하면 부족합니다. 
그 마지막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가장 궁극적인 것을 묻는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마지막 때에 우리가 일생 가장 중요하게,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여기고 추구한 일들을 기준으로 심판을 받고 동시에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단지 그 일을 마지막 때로만 미루어두지 않고,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으로 그 물음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컬어 종말론적으로 살아간다고 표현합니다.
교회력으로 연중주일을 마감하며 복음서가 계속 종말론적인 말씀을 들려주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종말을 맞는 믿음과 태도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든 개인에게 죽음은 묻습니다. “네가 태어나서 한 평생을 살다가 이제 죽음을 맞을 순간이 되었다, 자 너는 네 일생동안 무엇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추구했느냐? 그것을 말해다오. 재물이냐, 권세냐, 안전이냐, 명예냐? 너 자신이냐, 연인이냐, 가족이냐, 일이냐?”

교우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무엇이 중요했다고, 그래서 일생 애써서 그것을 이만큼 성취했고 그것이 나의 보람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냉정한 진실은 죽음은 우리가 일생동안 쌓아올린 부귀와 권세와 명망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벌거벗은 존재로 하느님 앞에 세운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돌려세웁니다. 아니, 본래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이 세상에 와서 이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돌아가야 함을 알려주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여기게 된 그 어떤 것도 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생을 살아야만 했을 그 이유가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신앙은 바로 우리에게 그 결정적인 이유를 깨닫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힘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절대자는 우리에게 일생동안 어떤 일을 하도록 맡겨주셨다는 깨우침입니다. 이 깨우침이 바로 소명(召命)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생을 사는 동안 그 소명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살았다면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떳떳이 의연하게 죽음의 물음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누리고 사는 일,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내게 맡기신 일을 감당하는 것이 가장 궁극적인 일이었다.”고 말이지요.
 

오늘 달란트의 비유는 바로 이 소명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주인의 관심은 종들이 얼마나 능력이 있어서 영리하게 재산을 늘렸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재산을 나누어 줄 때 주인은 종들의 능력을 알고 있었고 거기에 알맞게 큰 돈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돈을 받은 종들의 믿음과 태도였습니다. 착하고 충성스런 종들은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합니다. 그 돈을 불려서 자신이 이익을 보겠다는 계산도 없이 주인의 돈을 내 돈처럼 여겨 그 기쁨으로 일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주인의 처사에서 도무지 동기부여를 받지 못합니다. 왜 귀찮게 내게 돈을 맡기는가? 나중에 간수를 못했다고 책망을 하면 어쩌지? 그가 고심하여 택한 결정은 그냥 안전하게 땅에 묻어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주인의 신뢰를 배반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생각 속에서 도리어 주인을 나쁜 인간으로 만들어냅니다.

자신의 삶 자체를 소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착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에서 기쁨과 보람을 누립니다.

자신의 삶을 우연하고 불안한 일들 이어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체로 악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안전해지는 데에만 관심을 두고 자신이 하는 일은 억지로 대충 하고 맙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시고 나는 몇 달란트를 받은 어떤 종에 해당될까를 먼저 묻지 마십시오. 우리는 좌우간 어떤 종에든 반드시 해당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착한 종과 악한 종의 차이는 받은 달란트의 액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것을 어떤 태도로 어떻게 여기는가에 달린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하느님께 받은 소명이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하고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여기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기꺼이 그 소명을 펼치며 기쁨과 보람을 누리고 살고 있는지, 아니면 공연한 부담으로 여기며 불평하고, 짐짓 방관하고 회피하며 살고 있는지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의 결론적인 말씀은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자, 우리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소명이 있는 사람은 점점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소명이 없는 사람은 점점 더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는 죽음 앞에서 그 소명을 이룬 것을 기준으로 하느님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소명을 받아서 얼마나 훌륭하게 이루겠는가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소명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무리 평범하여도 예외없이 그 능력에 알맞은 일이 맡겨진다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소명을 이루지 못했다는 변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지혜와 사랑과 용기가 없어서 소명을 깨닫지 못하고 소명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바로 교우님들에게 그 소명을 발견하게 돕습니다.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고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를 이루는 이 교회가 교우님들께 맡기는 일을 소명으로 이해하시면 충분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그 일에 저를 도구로 써주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의 소명은 하느님께 필요하고 우리에게 충분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런 기도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종말론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을 뵈올 터이고 오늘 읽은 친숙하고 아
름다운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다시 뵈올 때까지, 우리 모두 우리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실천하는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으로 일생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008.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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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려움 없는 기쁨으로 (마태 25:14-30) 

어떤 이는 말하길 우리 성공회는 달란트 비유의 셋째종도 못되고 비유에 나오지 않는 네 번째 종과 같답니다.
그 종은 한 달란트를 받아 땅에 파묻어두었다가 주인이 오자 어디에 파묻었는지를 잊어버려서 허둥대다가 그만 빈손으로 나왔다나요^^... 우스개치고는 너무 신랄합니다.
이 신랄한 아픔을 딛고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착하고 충성스런 종”으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셋째종의 악하고 게으름은 어디서 기인한 성격일까요? 단순히 타고난 성품이라면 이 비유는 아무런 교훈도 찾을 수 없는 무의미한 얘기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셋째종의 어리석은 행동의 이유는 그가 한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주인을 오해했고 두려워했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유지되는 주종관계이지, 그 이상의 자발성과 헌신은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저는 군대에서 사병으로 복무했는데 군생활을 통해 “자원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바보짓이요, “대충 눈치보며 적당히 중간쯤 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처세술을 익혔습니다.

한 때 공무원사회에서도 공연히 나서서 일을 만들어 열심히 하기보다는, 그저 가만히 시간이 흐르고 정책이나 정권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복지부동(伏地不動)의 태도가 유행했었는데 바로 셋째 종이 이런 자세였던 것입니다. 

그에 비해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들은 주인을 신뢰했고 주인의 너그러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자기들을 신뢰해준 일을 통해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누립니다. 주인이 돈을 불려놓으라고 엄명을 내리고 간 것도 아닌데도 주인을 사랑하는 그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용기와 지혜를 내고 열심히 일하여 주인의 돈을 불려놓습니다. 자기가 남긴 차액을 빼돌릴 생각은 추호도 없이, 천진한 마음으로 주인 앞에 나아와 주인의 기쁨을 기대합니다.

주인도 처음 맡긴 돈을 다시 이자 붙여 회수하지 않고 몽땅 종에게 내어줍니다. 애초에 그는 돈 욕심이 아니라 종들의 착함과 충성에 기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은연중 하느님을 우리에게 부담스런 요구를 하며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일일이 간섭하는 무서운 분으로 여깁니다.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사랑을 요구하시고,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시련으로 우리를 골탕 먹이시는 하느님...
그렇다면 그런 분과 우리의 관계는 그 분의 권능에 눌려 할 수 없이 유지되긴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기쁨과 순종으로 섬기는 “올바른” 관계는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오해를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를 부리고 착취하신다는 말씀입니까?
하느님은 오로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의 기회를 주시고, 우리가 기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불신입니다. 두려움 없는 기쁨으로 살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살고, 가르치신 복음입니다.(200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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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려움 없이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인생  

너무나도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 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성공회가 과연 세 부류의 종 가운데 어디에 해당할까 자문하게 됩니다.

세 번째의 악하고 게으른 종에 가까운 것 같다는 반성이 마음 아프지만 한 술 더 떠서 이런 우스개 소리도 있습니다. 우리 성공회는 이 이야기에는 나오지 않는 네 번째 종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 달란트를 받아 땅에 파묻어두었다가 주인이 오자 어디에 파묻었는지를 잊어버려서 허둥대다가 그만 빈손으로 나아왔다나요... 우스개치고는 너무 신랄하지요...?  

좀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우리 성공회는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일지도 모릅니다. 어째든 주어진 것들을 가지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로 작은 교세지만 훌륭하게 교회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있게 그렇다고 하지 못하고 그럴지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우리 성공회가 지금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성공회가 가지고 있는 귀한 가치와 높은 위상과 무궁한 잠재력이 너무도 큰 것이라는 상대적인 느낌의 표현입니다.  

두 종은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칭찬받고 한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꾸중 듣습니다.

무엇이 착한 것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을 선한 분으로 믿고 신뢰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인색하고 차가운 주인이 아니고 냉정하고 무자비한 심판관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넉넉하게 베푸시는 분이시고 이해하고 감싸 안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를 하느님께서 추궁하실까봐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패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불신이며 그로 인해 세상의 위력과 고통에 대해 겁먹고 소심한 태도로 세상살이를 회피하려는 자세가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종의 게으름은 주인과의 관계가 자발적인 사랑과 섬김의 성숙한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두려움과 처벌을 의식한 타율적 관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인의 너그러운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허락된 삶의 기회를 놓쳐버립니다. 우리는 죽으러 온 것이 아니라 살러 왔고, 망하러 온 것이 아니라 흥하러 왔습니다.  

우리 성공회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기 위해 계속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기 위해 세상살이도 최선을 다하고 교회생활도 열심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두려움을 하느님의 사랑에 맡깁니다.
실패가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사랑의 책임만을 의식하며 나가는 충성의 길은 기쁘고 보람찬 길입니다.
그것이 참된 축복, 진정한 행복입니다. (200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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