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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부활에 대한 토론

by 분당교회 2016. 11. 6.

부활에 대한 토론


추풍낙엽. 가을바람에 마른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습니다. 가을의 깊은 맛은 이렇게 낙엽 흩어지는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름에 태풍이 불어올 때 나무뿌리가 뽑히고 가지가 찢길지언정 잎은 떨어지지 않았는데 시나브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창조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생명체가 모든 수고를 마치고 언젠가는 그 출발의 원점인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준엄한 법칙을 바라보면서 우리 삶을 출발한 원점을 생각합니다. 가을을 사색의 계절이라고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저 나뭇잎처럼 언젠가 돌아갈 본향을 바라보며 오늘의 나는 과연 제대로 살고 있는지, 어떤 열매를 안고 그 나라로 갈 것인지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와 신앙은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문제 앞에 선 인간에게 영생이라는 답을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옮아가는 것이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이승의 삶의 연장이 아닌 새로운 세계,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남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영생과 부활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이승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변화되어 살고 있느냐는 현재적인 문제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서자마자 예수께서는 성전을 더럽히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몰아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통해 이득을 봤던 사람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었습니다. 예수의 적대자들 중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밀정을 보내서 예수를 함정에 빠뜨릴 목적으로 질문을 합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하면 하느님을 거역하는 것이고,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의 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난처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라고 답해서 물리치십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와서 질문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은 형이 자녀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한다는 법을 내세워서 일곱 형제와 차례로 결혼한 한 여인은 과연 부활 때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는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에서는 시집 장가가는 일이 없다고 답하셨습니다. 부활의 새 생명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유한하고 죄 많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한다면 그것은 새 생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장애인으로 평생을 고생한 사람이 다시 장애인으로 태어난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요? 그러므로 부활을 단순히 이승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예수의 성전 정화, 야코프 요르단스, 1650년경, 캔버스에 유채, 288 x 436cm,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어느 미국의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숙제를 내었습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빈 달걀 껍질을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며 새롭게 거듭난 것을 상징할 수 있는 것을 채워오라고 했습니다. 학생 중에는 정신 장애가 있는 아이가 있었는데 항상 산만하고 가끔 괴성을 지르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과연 그 아이가 숙제를 이해했는지 의심을 했습니다. 다음 날 학생들은 선생님의 책상에다가 플라스틱 달걀을 얹어놓았습니다. 선생님이 하나씩 열어보았습니다. 첫 번째 달걀 안에는 꽃이 들어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과연 새롭게 변화된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고 칭찬했습니다. 두 번째 달걀 안에서는 예쁜 나비 모형이 나왔습니다. 역시 선생님은 새 생명을 잘 표현했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 달걀을 열어본 선생님은 슬그머니 달걀을 옆으로 치웠습니다. 달걀은 비어있었고 선생님은 그 달걀이 장애를 앓고 있는 아이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숙제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학생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왜 그 달걀은 보여주지 않느냐고 외쳤습니다. 선생님은 이 달걀은 이렇게 비어있다고 했습니다. 그 학생은 그것이 바로 새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무덤도 비어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서 그 빈 무덤의 뜻을 아느냐고 했습니다. 아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그의 아버지가 일으켜 세웠다고 했습니다. 선생님과 학생들은 경탄해 마지않았습니다. 이 일이 있고 석 달 뒤에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관 위에는 19개의 빈 달걀이 얹어져 있었습니다. 나머지 학생들이 부활에 대한 소망을 얹어놓은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아마도 고통스럽고 힘든 오늘을 참고 견디는 영적인 힘을 주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악하고 이기적인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선하게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앞에서 새 생명으로 옮아가는 그 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부자 청년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영생은 바로 지금 여기서 하느님 앞에 어떻게 서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11 6,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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