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설교

한 사람

by 분당교회 2016. 9. 12.

사람


자동차 판매 사원인 주인공이 딸에게 줄 생일 케이크를 자동차 뒷좌석에 싣고 집으로 달려갑니다. 터널을 통과하는 순간 갑자기 터널이 붕괴되어 갇힙니다. 휴대 전화로 부인과 119에 연락해서 구조를 요청합니다. 급히 출동한 구조대원들은 터널이 붕괴되어 무너진 산을 뚫고 안에 있는 사람을 구조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합니다. 어느 위치에 사람이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와중에 간신히 알아낸 환풍기 번호로 파악된 위치도 원래 설계대로 시공이 되지 않은 까닭에 오랜 기간 동안 진행된 시추 작업이 헛일이 되고 맙니다. 터널 밖에서는 고위층 사람들이 구조작업을 격려하고 사진을 찍고는 돌아가고, 기자들은 최장 시간 고립에 초점을 맞추어 보도를 합니다. 구조 작업은 지연되고 40일, 50일을 넘게 됩니다. 주인공은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딸을 주려고 산 케이크와 주유소에서 받은 물로 간신히 버티고 급기야는 자신의 소변을 마시기까지 합니다. 구조 기간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죽은 한 사람 때문에 경제적 손실이 너무 크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피곤하니까 그만 하자고 합니다. 그런 시점에 구조 작업장에서 사고로 노동자 한 사람이 죽습니다. 애타게 남편이 구조되기를 바라는 주인공의 부인은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받습니다. 이미 죽었을 사람을 구조하느라고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인명 피해까지 발생했다고 백안시하며 모든 책임을 구조를 요구하는 부인에게 돌립니다. 인근에 제2터널 공사를 위한 공청회에서 한 관리가 도룡뇽 때문에 터널 공사가 지연되어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초래한 사례를 말하는 순간 구조대원 한 사람이 말합니다. ‘저... 도룡뇽이 아니라 사람인데요? 지금 사람이 터널에 갇혀 있다고요!’


최근에 상영된 영화 ‘터널’의 내용입니다. 한 사람이 터널에 갇혀 있고 가족들은 애간장이 타는데 사람들은 경제적 손실을 계산하여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구조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세계 최고 기록의 고립 시간을 따지는 언론의 모습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 터널 중 한 장면)


이익과 효율을 위해 인간이 희생되는 사회는 비정하고 부도덕한 사회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경제적 활동 역시 인간을 위한 것이고 그 존엄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 생각할 때 한 사람의 생명과 존엄성이라도 훼손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루가 15:4)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의 문맥으로 보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그대로 둔 채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목자의 사명이요 당연한 처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매우 비경제적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양 한 마리를 찾아서는 어깨에 메고 돌아와 사람들을 불러 모아 기뻐할 것이라고 합니다. 목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기뻐할 일이라는 것이겠지요. 이렇듯 한 사람의 회개, 한 사람의 구원은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매우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성경 구절을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그 까닭은 다들 목자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 될 수도 있다는 공리주의적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자신이 들판에 내버려 둔 아흔 아홉 마리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서 목자의 처사를 매우 부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그 잃어버린 한 마리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아니면 내가 바로 그 한 마리처럼 길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까요? 그 목자가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아흔 아홉 마리에 속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사의 질량과 잃었던 한 마리가 느끼는 감사의 질량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전자는 관념 속에서 느끼는 감사이고 후자는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느끼는 감사일 것입니다. 은총과 사랑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누릴 줄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하느님 앞에 ‘보통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특별한 사랑과 은총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긴긴 인류 역사 속에서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고 또 살아가겠지만 같은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일 대 일로 특별하게 관계를 맺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자신이 하느님의 특별한 사람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회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9월 11일 연중 24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말씀/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비심 없는 죄  (0) 2016.09.26
뱀 같은 슬기  (0) 2016.09.19
자기 십자가  (0) 2016.09.05
관계 형통의 명약  (0) 2016.08.29
고통 받는 사람 앞에서  (0) 2016.08.21

댓글